119화. 외전 3_혈육 (4)
아네타의 상황을 들은 릴리에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의외의 소식을 전해 왔다.
아네타는 놀란 얼굴로 버논을 바라보며 물었다.
“고모님께서 제도에 오신다고? 그것도 직접?”
“그래. 아무래도 정말 무언가를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잡혀 있던 일정도 취소하고 오시는 걸 보면.”
버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지만, 아네타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바빠서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한 그녀였기에 제 일에 나서 주는 것이 마냥 놀랍기만 했다.
“너한테 공작저와 후작저, 둘 중 어디로 찾아가는 게 더 편할지 물어보라고 하시던데.”
“나 때문에 먼 길 오시는데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백작저로 찾아갈게.”
언뜻 보면 도움을 주러 오는 사람을 위한 배려 같았지만, 왠지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버논은 묘한 표정으로 아네타를 응시했다.
“……의외네. 난 네가 내 어머니도 별로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네가 네 아버지로 인해 힘들었을 때나, 실권을 빼앗으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셨잖아. 그것 때문이지, 뭐.”
버논은 제법 진지한 낯으로 과거의 일을 언급했다. 그 일을 떠올리면, 자신이라도 도울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를 느끼곤 했다.
“아직 어리구나.”
그러나 정작 아네타의 목소리에는 옅은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말이 왜 그렇게 돼?”
버논이 불퉁한 목소리로 항의해도, 아네타는 그에게 건넨 말을 취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건, 누군가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된다는 거야. 설령, 상대가 가족이라고 해도 말이야.”
아네타는 느긋한 투로 말을 이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고모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그분도 내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로 당한 일이 많았으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엮이고 싶지 않았겠지. 아마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유감도 없어.”
아네타는 진심이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자신의 말에 한 점 거짓도 섞지 않았다.
“만약 내가 고모님을 싫어했다면 이런 식으로 도움 받는 것도 거절했을 거야. 난 정말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빚을 지지 않거든. 그 빚을 언젠가는 내가 어떤 방법으로든 갚아야 하니까. 아, 물론 그랬다고 해도 네 부탁은 들어줬을 거야.”
“왜? 내게는 아무런 유감도 없어서?”
“그것도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빚을 지워 두기 위해서지. 다른 사람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주었으니 그 빚을 모른 척할 리 없잖아?”
아네타는 태연하게 답하며 찻물로 입 안을 축였다.
버논은 그런 그녀를 보며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만약 그런 식으로 도움을 받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잠깐 상상만 했을 뿐인데 등골이 서늘했다.
“……칼로스는 네가 이런 녀석이라는 거 알고 결혼한 거지?”
“당연하지. 너보다는 그이가 더 잘 알 걸.”
버논은 아네타의 입에서 나온 소름 끼치는 호칭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그런 반응이야?”
“네 입에서 그런 호칭이 나오니까 좀 어색해서. 아무튼 전할 말도 전했으니, 난 이만 가 봐야겠어.”
버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네타는 힐끗 시계를 보았다.
“곧 점심시간인데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지.”
“크리스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뭐 하러 너희랑 식사를 해? 그리고 난 눈칫밥 먹고 싶지 않다. 칼로스 녀석이 너랑 있는 시간을 방해 받았다고 까칠하게 굴 거 생각하면, 이대로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나아.”
장난스럽게 말한 버논은 인사를 대신해 손을 허공에다 휘적휘적 젓고는 응접실을 나섰다.
아네타는 버논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소파에 늘어지듯 등을 기댔다.
버논 앞에선 티내지 않았지만, 사실 아네타가 릴리에트를 원망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네타는 엘레나의 장례식 때를 떠올렸다.
그날 그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피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마주친 사람은 아네타 만큼이나 후작저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릴리에트였다.
상복 차림의 릴리에트는 아네타와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훔쳤다.
“방금 본 건 없었던 일로 해 주렴. 나는 이 눈물의 의미가 동정인지, 아니면 동질감인지 잘 모르겠거든.”
릴리에트는 그 말을 하곤 붙잡을 새도 없이 돌아서서 걷다가, 변덕처럼 잠시 멈추어 섰다.
“네 어머니는, 분명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란다.”
그게 릴리에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아네타는 그 말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말을 같은 자리에 서서 수십 번도 더 들었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듣고 눈물이 왈칵 쏟아진 까닭은 그녀가 진심으로 엘레나를 애도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집안을 나갔던 릴리에트가 후작저에 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아네타는 릴리에트가 남긴 말을 떠올리면 그때의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향한 데릭의 조롱과 멸시를 참아 가며 엘레나의 장례식에 참석해 준 사람을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아네타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
“아네타. 케이너 백작저에서 사람을 보내왔어. 당신 고모님이 저택에 도착했다더군.”
“가 봐야겠어.”
칼로스가 릴리에트의 도착을 알리자, 아네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덕분에 의자가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아네타는 선 채로 급하게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헛손질을 하기 일쑤였다.
답지 않게 긴장한 듯한 모습에 칼로스는 천천히 아네타에게로 다가갔다. 하마터면 쏟아질 뻔한 잉크병을 잡아 똑바로 세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는 아네타의 손을 잡아 움직임을 저지했다.
“아네타. 정리는 내가 해 줄 테니까 어서 백작저로 가 봐. 긴장한 당신 모습도 사랑스럽지만, 그러다 다칠지도 모르니까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알겠어.”
“잘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칼로스는 아네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칼로스.”
아네타는 보답하듯 입을 맞추고는 저택을 나섰다.
칼로스의 명으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부는 아네타가 마차에 오르는 즉시 말을 몰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너 백작저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아네타 님.”
백작저 앞에서 아네타를 맞이한 사람은 크리스였다.
아네타는 크리스의 뒤를 따르기에 앞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 긴장감이 제게도 훅 끼쳐 오는 것 같아, 크리스는 작게 웃었다.
“아네타 님이 긴장하시는 거 처음 봐요.”
“긴장할 수밖에. 고모님은 보통 분이 아니시거든.”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저도 많이 긴장되거든요.”
아네타는 크리스와 대화를 나누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본관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열린 문 사이로 오랜만에 보는 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금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누가 봐도 아네타와 가족인 것을 알아볼 듯한 외모의 소유자는 릴리에트 케이너였다.
그녀는 홀로 세월이 비껴간 것처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모님.”
“오셨습니까, 공작 부인.”
“공작 부인이라니요.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사양하지 않으마.”
아네타가 낯선 말투에 하대를 권하자, 릴리에트는 별다른 거부 없이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크리스는 방긋 웃는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한 뒤 물러갔다.
처음부터 서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인지, 아네타를 응접실로 안내하는 건 릴리에트의 몫이었다.
“우리 며늘아기가 아네타 너를 많이 따르는 것 같더구나. 네 마중을 나가겠다고 자처하지 뭐니.”
“아끼는 아이랍니다.”
“나도 마음에 쏙 들더구나. 버논이 다른 건 몰라도 결혼 하나는 잘 했어. 저런 아이인 줄 알았다면 진작 한 번 만나 볼 것을.”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신가요?”
“그래. 어릴 때부터 함께 어울리는 건 알았지만, 관여를 안 했으니까. 어떤 사람과 어울리고, 어떤 사람과 혼인할지는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
정면을 응시하던 릴리에트는 힐끗 아네타를 돌아보았다.
“너와 로디온이 자주 어울린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란다. 내가 해 줄 건 그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믿어 주는 것뿐이니까.”
별거 아니라는 말투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두 아들을 향한 신뢰가 묻어 나왔다.
“크리스를 잘 부탁드려요.”
아네타는 그 신뢰를 크리스도 받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확실하게 소속될 수 있을 테니까. 이름을 언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건 그 아이의 시어미인 내가 해야 할 부탁이 아닐까 싶은데.”
이후로도 이야기는 염려했던 바와는 다르게 제법 매끄럽게 이어졌다. 한 손으로 꼽고도 손가락이 남는 횟수의 만남을 가진 것치고는 딱히 어색함이랄 것도 없었다.
본론이 아닌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서류 봉투 하나뿐이었다.
릴리에트는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네타는 눈치챘다.
버논의 말대로 릴리에트에게는 제로프 멜렛과 남작가의 수작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것은 저 봉투 안에 들어 있으리라.
“응접실에 도착했으니 이만 본론으로 넘어가자꾸나. 듣자 하니 네 외가가 말썽을 피우고 있다지?”
릴리에트는 아네타 못지않게 직설적인 화법을 가지고 있었다.
버논이 소식을 접하고 찾아와 건넨 말과 별다를 바 없는 말이기도 했다.
“어째 아데나워는 하루라도 바람 잘 날이 없구나. 가주가 엉망이거나, 그게 아니면 가까운 가족이 엉망이거나. 언제나 둘 중 하나지.”
릴리에트는 진심으로 질린다는 표정을 짓다가,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조카에게 무례가 될까 싶어서였지만, 다행히 아네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동조하는 눈치였기에, 릴리에트는 한결 편하게 말을 이었다.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휘둘리지 말고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걸 잊지 말렴.”
“명심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게 이런 이야기라니. 안타깝지만 어쩌겠니.”
릴리에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아네타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제도에 온 건, 네 어머니가 살아생전 내게 부탁한 것을 들어주기 위해서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