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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118화 (118/122)

118화. 외전 3_혈육 (3)

“설마 제가 그런 질 낮은 협박에 겁먹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제로프 멜렛은 아네타의 성격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가 이제 와서 조부랍시고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 멜렛 남작님. 저는 당신 요구에 응해 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설령 당신이 비열한 수를 쓴다고 해도 말이에요. 그러니 어디 뜻대로 해 보세요. 대신, 뒷감당은 알아서 하셔야 할 거예요.”

아네타는 의사를 더욱 분명히 밝힘과 동시에 경고했다. 이윽고 그녀는 더는 볼 일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배웅은 않겠습니다. 부디 안녕히 가시길.”

“저…… 저!”

이마에 핏대가 선 제로프 멜렛이 등 뒤로 삿대질을 하며 외쳤지만, 아네타는 티르와 함께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안쪽에서 천박한 욕설이 들려왔지만, 아네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칼로스가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다.

***

제로프 멜렛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눈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체력이 큰 폭으로 깎여 나간 것 같았다. 아마 정신적인 시달림을 당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황궁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한 것은 오직 칼로스 때문이었다.

아네타는 그의 얼굴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땅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꾸역꾸역 옮겼다.

시간이 갈수록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나 삐죽삐죽 돋아났던 가시는 칼로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형체를 잃고 사르르 녹아내렸다.

문을 닫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아네타는 꿀처럼 달콤한 눈빛을 보내오는 그의 품에 덥석 안겼다.

“보고 싶었어, 칼로스.”

널따란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안기자, 칼로스는 안정감 있게 아네타의 몸을 지탱했다.

아네타는 편하게 그의 몸에 기대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어?”

“일이야 있었지. 당신, 저택에 누가 왔는지 못 들었어?”

“손님이 찾아와서 늦을 거라는 말만 전해 들었어. 대체 누가 왔길래 그래?”

“전 멜렛 남작.”

제로프 멜렛이 언급되기 무섭게 칼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네타는 그 반응을 보고 사용인이 어째서 그에게 방문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누구인지 알았다면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저택으로 돌아왔으리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자가 당신에게 무슨 용건으로?”

“뻔하지. 돈 때문이었어. 내게 빚을 갚아 달라고 하더라고.”

아네타는 제로프 멜렛이 신세타령을 하듯 늘어놓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네타의 말이 이어질수록 칼로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세상은 넓고, 그 넓은 세상에는 염치를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중 하나가 제로프 멜렛이었지만, 칼로스는 분노를 터트리기보다는 아네타를 위로해 주는 것을 택했다.

“아침부터 고생했네, 내 사랑.”

칼로스는 아네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다친 곳은 없지?”

그 성격에 그냥 물러났을 리 없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하게 했다면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칼로스는 그리 다짐하며 칼을 갈았지만, 다행히 아네타는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벌게진 얼굴로 위협하려고 했는데 티르가 막아 줬어. 하여간 겁은 많아서. 티르가 으르렁거리니까 바로 물러나던데.”

아네타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감히 내 부인을 위협하려 들다니. 간이 부었군.”

칼로스는 티르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오르는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

하필 찾아와도 오늘 같은 날 찾아와서는.

자신이 그녀의 곁에 없었다는 게 죄스러웠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해 줘.”

칼로스의 물음에 아네타는 잠시 고민했다.

제로프 멜렛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힘으로 억누를 것이냐, 아니면 그가 일을 벌일 때까지 기다리다가 상황에 맞추어 대응할 것이냐.

두 가지 선택지의 장단점을 비교해 보던 아네타는 결국 후자를 택했다.

전자의 방법을 택한다면 없던 구설도 생길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

제로프 멜렛은 아네타는 물론 칼로스까지 모함할 터였다. 아네타는 칼로스에게까지 더러운 물이 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당신은 멜렛 남작가의 상황과 동태를 살펴 줘.”

“그거면 되겠어?”

“일단은.”

제로프 멜렛이 협박의 수단으로 소문을 택한 이유야 뻔했다.

부정적인 소문은 사실과 관련 없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대상과 가문의 명예에 큰 타격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아네타가 그간 숱한 소문에 시달려 왔다는 걸 생각하면, 그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로프 멜렛이 고려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가 엘레나에게 했던 짓이 온 세상에 자자하게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아네타가 외가를 돕지 않는다고 해도, 비난은 거세지 않을 것이다.

아네타는 그저 제로프 멜렛이 일을 벌인 뒤에, 사실에 근거하여 더 강하게 반박하면 그만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던 아네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난 윗대로 인해 고통받을 팔자인가 봐. 혈육이라는 자들이 어쩜 이렇게 엉망일까. 당신 얼굴 보기 창피할 지경이야.”

한동안 평화롭다 싶더니 이런 식으로 또 일이 터질 줄이야. 덕분에 아침부터 기분이 영 엉망이었다.

“당신은 엄연히 피해자야. 그러니까 나 보기 창피하다는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우리 두 사람, 이제 부부잖아. 당신이 겪은 일은 곧 내가 겪은 일이야. 혼자 다 해결하려고 들지 말고 힘들 땐 내게 좀 더 의지해 줬으면 좋겠어.”

칼로스는 아네타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제 품 깊숙이 끌어당겼다.

“안 그러면 나, 많이 서운할 것 같아.”

“지금도 충분히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아직 부족해. 당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알고 싶고 관여하고 싶어. 내 욕심일까?”

칼로스는 아네타의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그의 머리카락이 숨결과 함께 목덜미를 스치자, 아네타는 몸을 움츠리면서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욕심이라고 생각 안 해.”

“그럼 약속해 줘. 뭐든 내게 털어놓겠다고.”

“알겠어. 약속할게.”

아네타는 칼로스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칼로스는 곧장 고개를 들어 아네타의 입술 새로 파고들었다.

누가 더 적극적이라고 할 것 없이, 두 사람은 열렬히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

그날 이후, 제로프 멜렛은 사람들의 동정을 사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공작저를 찾아왔다.

기사들은 칼로스의 명령으로 절대 문을 열어 주지 않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제로프 멜렛은 매일 아침 큰 소리로 신세 한탄을 했고, 제발 자신들을 도와달라며 애원했다.

아네타를 협박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이들도 몇 생겼다.

그들은 어차피 공작가와 재결합하여 더 많은 부를 누리고 있을 텐데 어째서 외가를 외면하느냐고 아네타를 탓했다.

그러나 그 수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아네타의 예상대로였다.

다만, 소문은 세간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저들 입맛대로 물고 뜯는 안줏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난번 추문 때처럼 헛소문을 퍼트리는 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고소당한 자들의 가문이 하나같이 큰 타격을 입는 걸 보았으니 마음껏 입을 놀리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누구도 그녀의 앞에서 멜렛 남작가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스스럼없이 그녀의 상황을 입에 올리는 예외적 인물이 하나 있었다.

“소식 들었어. 외가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며?”

집무실로 찾아온 버논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물었다.

“대체 빚이 얼마길래 저 난리야?”

“칼로스가 알아본 바로는 가산 1억 8,000만 벨론을 모두 날리고도 3억 4,000만 벨론의 빚이 남았대.”

처음엔 빚을 질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재산을 모두 잃고도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간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감과 동시에, 처음의 손실을 만회하고자 빚을 내어 또 다른 투자를 한 것이다.

트로일 멜렛의 두 번째 투자까지 망하자, 멜렛 남작가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아네타의 이름을 팔아 돈을 빌리려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아네타가 외가라면 치를 떤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이라면 다 알았기 때문이었다.

“돈, 줄 거야? 너라면 그 정도는 앉은 자리에서 갚아 줄 수 있잖아.”

“아니. 그 사람들에게 줄 돈은 없어. 차라리 버리는 편이 덜 아깝지.”

버논은 예상했던 대답이 들려오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결책은 있고?”

“지금 대리인을 시켜서 아데나워가 멜렛에게 내어 준 돈의 내역을 정리하고 있어. 그게 끝나는 대로 멜렛 남작가를 상대로 접근 금지 신청을 할 생각이야.”

아네타는 협박을 당했을 때부터 생각해 온 방법을 말해 주었다.

제로프 멜렛이 발티모어 공작저 앞에서 매일같이 소란을 피운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녀는 이미 가문에서 멜렛 가문에 대한 도리를 다했음을 증명하기만 하면 일은 쉽게 풀릴 터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이 일은 내 어머니께서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

“……고모님께서? 그게 무슨 말이야?”

아네타는 의외의 인물이 언급되자 자세히 말해 보라며 버논을 닦달했다.

“실은 네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어머니께서 제도를 떠나기 전에 내게 당부하셨어. 네가 외가인 멜렛 남작가 때문에 난처한 일에 처하게 되면 당신에게 꼭 알리라고 말이야.”

버논은 턱을 매만지며 제 어머니인 릴리에트를 떠올렸다.

릴리에트는 아데나워 후작가라면 학을 뗐지만, 적어도 아네타까지 싫어하진 않았다.

그녀는 아무 죄 없는 조카까지 미워할 성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데릭 아데나워 같은 자를 부모로 두고 태어난 아네타가 안타깝다는 말까지 했으니 확실했다. 그러니 떠나기 전에 그런 말을 남긴 것이 놀랍진 않았다.

“아무래도 아데나워 후작가와 멜렛 남작가, 두 가문과 관련된 무언가를 알고 계신 것 같아. 그래서 너만 괜찮다면 어머니께 이 일을 알릴까 하는데. 어때?”

이전 같았으면 아네타에게 상의도 없이 바로 릴리에트에게 소식을 전했을 테지만, 버논은 굳이 아네타에게 의사를 물었다. 지금의 관계는 전과 달랐으니까.

“나야 그래 주면 고맙지.”

아네타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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