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외전 3_혈육 (2)
아네타는 제로프 멜렛을 이끌고 본관으로 들어섰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걸음이 멈춰 힐끗 돌아보니, 문턱을 밟고 선 채로 정신없이 내부를 훑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곳곳을 뜯어보는 눈빛은 탐욕으로 번뜩였다.
벌어진 입이라도 다물었다면 적어도 추해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아네타는 그에게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그때였다. 제로프 멜렛이 어느 한 곳을 보더니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네타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 끝에는 검고 긴 털을 갈기처럼 휘날리며 달려오는 티르가 있었다.
아네타의 눈에는 그저 신이 나서 꼬리를 흔들며 뛰어오는 모습이었지만, 제로프 멜렛의 눈에는 사냥감을 쫓는 사자처럼 보였으리라.
맹수 같은 생김새의 티르가 가까이 다가오자 겁먹은 게 분명한 제로프 멜렛이 몸을 부르르 떨며 기겁했다. 주름진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귀신같이 아네타의 냄새를 맡고 나타난 티르는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부볐다.
“티르. 손님을 놀라게 하면 못 써.”
아네타는 타이르는 투로 말하면서도 귀를 쫑긋대는 티르의 머리를 칭찬하듯 쓰다듬어 주었다.
금방이라도 저택 문을 박차고 도망갈 것 같은 제로프 멜렛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티르도 아네타가 자신을 진심으로 혼내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챈 건지,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영민한 존재임을 증명하듯 아네타의 감정을 읽고 제로프 멜렛을 경계할 뿐이었다.
“응접실로 가시죠.”
아네타는 먼저 걸음을 뗐다. 티르가 그 뒤를 따랐지만 아네타는 저지하지 않았다.
제로프 멜렛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그 뒤를 쫓았다. 아네타를 따라가는 티르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였다.
“앉으세요.”
미우나 고우나 일단은 외조부였기에 아네타는 상석을 비워 두었다. 그러자 제로프 멜렛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본래부터 제 자리인 양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티르는 아네타가 자리에 앉자 그녀의 발치에서 배를 깔고 누웠다. 허튼짓을 하면 바로 달려들 것처럼 제로프 멜렛을 주시하는 눈빛에서 사나움이 엿보였다.
“큼. 아까는 내가 답지 않게 잠깐 흥분을 한 것 같구나.”
“그러셨군요.”
잠깐이 아니던데. 아네타는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그에 힘입어 제로프 멜렛이 말을 이었다.
“아까 날 가로막았던 기사 말이다.”
“카튼 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자. 내가 네 얼굴을 봐서 참으려고 했지만, 생각할수록 기가 차는구나. 검을 차고 공작가의 기사단에 속했다고 해서 제깟 게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꽤나 분했던 것인지, 이죽거리는 그의 목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 봤자 문지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주제에 방자하기 짝이 없어. 그자에게는 필히 내게 저지른 무례에 상응하는 벌을 내려야 한다.”
말을 이어갈수록 내뱉는 숨과 발음이 거칠어졌다.
사실 카튼은 이런 식으로 제로프 멜렛에게 무시당할 자가 아니었다. 제로프 멜렛은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준 지금, 그저 작위 없는 귀족일 뿐이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카튼은 백작가의 삼남이자, 뛰어난 실력을 갖춘 공작가의 기사였다. 그 말은 즉, 어딜 가든 한미한 가문의 남작 가문보다 더 극진한 대우를 받는 위치라는 뜻이었다.
카튼이 무력을 써서 제게 무례를 범한 제로프 멜렛을 제압한다 해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칼로스의 이름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아네타뿐이겠지만, 그녀는 하늘이 두 쪽 난다 해도 제로프 멜렛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제로프 멜렛은 씩씩거리며 분노를 드러냈다.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누구신데요?”
“누, 누구긴. 네 하나뿐인 할애비이자, 얼마 남지 않은 네 혈육이지. 그런 날 무시했으니, 이건 엄연히 공작 부인인 너 또한 무시하는 일이 아니냐.”
씨근덕거리던 제로프 멜렛은 아네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묻자 말을 더듬었다.
처벌해야 한다는 말에 순순히 응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는 예상 밖의 반응에 당황한 눈치였다.
“아무래도 단단히 착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네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전 당신을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러니 무시를 당하든 말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죠. 그게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고 난 뒤에 돌려받은 결과라면 더더욱이요.”
아네타는 물었다. 이제 와서 혈육이라고 자처하고 나서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그러자 제로프 멜렛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래도 네가 내게 많이 섭섭했던 것 같구나. 하지만 아네타. 내게도 사정이 있었단다.”
하지만 그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널 보면 엘레나 생각이 나서 차마 만나러 갈 수 없었어. 딸 잃은 아비의 심정을 이해해 주렴.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 아이를 보냈는지 너는 모를 거다.”
서러운 듯 늘어놓는 말은 모두 거짓투성이였다.
아네타는 그가 엘레나의 장례식 다음 날 데릭 아데나워가 있는 술집으로 가 함께 술판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목적이야 뻔했다.
‘돈줄을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
엘레나가 죽었으니 돈을 얻어낼 새로운 수단을 찾으려 했을 터였다. 진심으로 엘레나를 애도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제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네요. 그런데 어쩌죠? 전 당신이 내 어머니에게 저지른 일들을 알고 있어요. 또, 어머니 장례식 다음 날 어디에 가서 뭘 했는지도 알고 있죠.”
아네타는 허리를 꼿꼿이 가누며 제로프 멜렛을 응시했다.
“그러니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시고 돌아가 주세요.”
그것은 통하지 않을 거짓말은 그만두라는 경고였다. 다행히 제로프 멜렛은 아네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챘다.
그는 계속해서 엘레나를 언급해 봐야 이로울 게 하나 없다는 걸 깨달은 건지, 아네타의 말대로 본론을 꺼냈다.
“실은…… 내가 돈이 좀 필요해서 말이다.”
제로프 멜렛은 남작가에 닥친 재정적 위기에 대해 말했다.
외숙인 트로일 멜렛이 집안의 모든 자금을 끌어다 투자를 했는데, 그 사업이 망하고 말았다고. 그래서 그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말에 아네타는 실소했다.
“네가 그 돈을 대신 갚아 주었으면 하는데.”
돈 문제일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염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빌려달라는 것도 아닌 갚아 달라니.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아네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로프 멜렛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도 이래선 안 된다는 거 잘 안다. 네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내 선에서 해결해 보려고도 했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염치 불고하고 네게 찾아온 거란다.”
“안 된다는 걸 알면, 끝까지 찾아오지 마셨어야죠.”
“아비 된 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더구나. 제발 네 외숙을 도와다오. 나는 미워해도 좋지만, 트로일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지 않니!”
“자신이 누리게 될 이점을 위해 동생을 팔아넘기는 일에 동조한 사람에게 잘못이 없다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아네타는 트로일 멜렛에 대해 떠올렸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로 모든 설명이 가능했으니까.
“네가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적에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도 부정하실 생각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잠든 척 눈을 감고 있을 때, 엘레나가 친정에서 데리고 온 하녀와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은 것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엘레나의 목소리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아네타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하자, 제로프 멜렛의 입이 딱 다물렸다.
“오늘 들은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죠. 이만 돌아가 주세요.”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트로일을 도와줄 거냐. 그래, 내가 네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을까?”
아네타가 응접실에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제로프 멜렛 역시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듯한 기세에 아네타의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그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딸을 팔아넘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제 나이의 반도 안 되는 손녀 앞에서 무릎까지 꿇으려 하다니. 대단한 아들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엘레나에게 주었더라면 지금 이 순간 아네타의 선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엘레나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모든 의사를 무시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아들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그러니 그들의 상황을 동정할 이유는 없었다.
“무릎 꿇지 마세요.”
“그럼…….”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빚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당신 무릎에 그 정도 가치는 없거든요.”
무슨 희망을 품은 건지, 한 순간 밝아지는 얼굴을 보며 아네타는 못 박았다. 조부에 대한 공경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다. 예의라는 건 그럴 만한 인격을 가진 상대에게 갖추는 것이었다.
아네타가 강하게 대응하자, 제로프 멜렛은 위협적인 기세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겁을 주려던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그가 아네타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순간, 티르가 쏜살같이 몸을 일으켰다.
아네타를 지키기 위해 앞을 막아선 채 낮게 으르렁거리자, 제로프 멜렛이 몸을 흠칫 떨었다.
“아. 조심하세요. 이 아이, 사람은 안 물지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은 물거든요.”
“젠장!”
티르는 아네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을 벌렸다.
사람 목 정도는 무리 없이 물어뜯을 수 있을 것 같은 날카로운 이가 드러나자, 제로프 멜렛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다시는 얼굴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한심하다는 듯 그를 보던 아네타는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순순히 포기할 제로프 멜렛이 아니었다.
“잠깐.”
“아직도 할 말이 남으셨나요?”
아네타는 자신을 멈춰 세우는 목소리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네가 아무리 나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해도, 멜렛 남작가가 네 외가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러니 많은 걸 가지고 있음에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을 외면한다면, 분명 구설수에 오르게 될 테지. 그래도 괜찮겠느냐?”
“저는 왜 그 말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겠다는 협박처럼 들릴까요?”
“협박이 맞으니까 그렇지.”
제로프 멜렛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