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외전 3_혈육 (1)
결혼 이후, 아네타와 칼로스는 늘 함께였다.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한 뒤, 또다시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드는 생활의 반복이다 보니 거의 모든 시간을 서로와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딜 가든 함께인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말했다. 저렇게 붙어 다니다 보면 얼마 안 가 서로에게 질려 버릴 거라고.
당연하게도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들이 무슨 말을 떠들어 대든 두 사람의 애정 전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붙어 있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끈끈해졌다.
‘칼로스는 지금쯤 황궁에 도착해서 폐하와 이야기 중이려나.’
아네타는 러셀의 부름을 받고 다른 때보다 일찍 출근한 칼로스를 떠올렸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몇 번이고 뒤돌아보던 그는 발을 질질 끌던 끝에 결국 마차에 올랐다.
보고 싶을 거라는 말을 남긴 채였다.
물론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은 것은 칼로스뿐만이 아니었다. 웃으며 보내 주었던 아네타 역시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보고 싶은 건지.’
늘 지척에 있어 고개만 돌려도 볼 수 있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하여간 중증이 따로 없다.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으며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후작저에서 두 달을 지내고 공작저로 옮겨온 지도 벌써 십여 일째. 이곳에 없는 이사벨을 대신해서 아네타를 대문까지 배웅해 주는 역할을 맡은 이는 린든이었다.
아네타가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리고 있던 티르가 짧게 짖었다.
“좋은 아침이야.”
아네타는 티르의 인사에 답해 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티르는 얌전히 눈을 감으며 윤기가 흐르는 복슬복슬한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들려오는 소리는 제법 위협적이었지만, 그것이 애교라는 걸 아는 아네타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티르와 인사도 나누셨으니 이제 가실까요, 마님?”
그러던 중 들려온 린든의 목소리는 아네타에게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조금 더 있다가 가도 늦진 않겠지만, 지금쯤 목 빼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주인을 생각하면 그 사이로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어. 다녀올게, 티르. 잘 놀고 있어야 해.”
아네타는 대답하듯 또 한 번 짖는 티르에게 웃어 준 뒤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또다시 하루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본관을 나서자 아침 특유의 신선한 공기가 가슴 깊이 차올랐다.
날이 많이 풀린 덕에 이른 아침임에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자, 아네타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요즘 아네타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안온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모두 칼로스 덕분이었다.
아네타는 되도록 오래 이 평화가 깨지지 않길 소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본디 조용할 날 없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혼인을 했다고 해서 그 팔자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닌지, 파란을 예고하는 고성이 귓가를 찔러들었다.
“썩 비키지 못하겠나!”
아네타와 린든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낯선 목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저택 앞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이 일은 제 선에서 해결한 뒤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마님께서는 곧장 마차에 오르시지요.”
“그렇게 해.”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네타는 순순히 린든에게 처리를 맡겼다. 그래도 아침 댓바람부터 공작저 앞에서 큰 소리를 내는 간 큰 이의 얼굴 정도는 확인해 둘 요량이었다.
“내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가? 나는 그 아이 외조부 되는 사람일세!”
이어서 들려오는 말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거기까지만 했을 터였다.
아네타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엔 모르는 목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불현듯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정말 각하의 외조부님이시라면, 절차를 지켜 정식으로 방문 요청을 해 주십시오.”
“할애비가 손녀 얼굴 한 번 보겠다는데 절차는 무슨 절차!”
“송구합니다만, 이곳은 공작가입니다. 아무리 그러셔도 기별 없이 찾아오신 분께 문을 열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 실랑이는 이어졌다. 저택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는 정중한 태도로 응수하면서도 결코 물러나지 않았고, 상대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그 덕분에 아네타는 기사와 대치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제로프 멜렛.
전 멜렛 남작이기도 한 그는 엘레나의 아버지였다.
저자가 무슨 낯으로 여기까지 온 걸까. 아네타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내가 멜렛 남작가의 일원이라는 증거가 있네. 이래도 안 된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네타는 증거를 내밀고 있음에도 기사가 사과의 말을 건네며 꿋꿋이 버티자, 진의를 눈치챘다.
“대치하고 있는 분은 아무래도 카튼 경인 것 같습니다. 카튼 경이라면 마님의 외조부님을 모르진 않을 텐데요…….”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 같아.”
“그렇군요.”
린든은 아네타에게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엘레나 아데나워가 어떤 식으로 데릭 아데나워와 결혼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돈 때문에 딸을 팔아넘긴 이가 이제 와서 손녀를 찾는 이유야 뻔했다. 카튼은 아마 그것을 눈치채고 제로프 멜렛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리라.
“……린든. 아무래도 이 일은 내가 처리해야 할 것 같아.”
자신을 위해 나서 준 카튼에겐 고맙지만, 제로프 멜렛은 그가 가로막는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이가 아니었다.
아네타는 린든에게 맡기기로 했던 것을 취소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 마.”
아네타가 굳이 어려운 길을 걸어가면서까지 힘을 키운 것은 모두 탐욕스러운 혈육들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 과정에서 단단해진 것은 정치판에서의 입지뿐만이 아니었다.
아네타는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든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멈추었던 걸음을 옮겨 대문으로 향하자, 닫힌 문 안쪽을 지키고 있던 또 다른 기사가 아네타를 보고 당황스러운 낯을 했다.
“가, 각하. 지금은 밖으로 나가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기사 로이는 목소리를 낮춘 채 소곤거렸다. 그의 의도는 카튼과 같았다.
“밖에 누가 와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어요. 목소리가 워낙 커서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리더군요. 괜찮으니 문을 열도록 해요.”
“예. 지금 바로 열겠습니다.”
로이는 당황스러운 낯을 했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걱정은 됐지만 뜻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 로이 경. 지금 문을 열면……!”
안쪽에서 문이 열리자, 제로프 멜렛을 막아서고 있던 카튼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난 로이로 인해 열린 문 사이로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이는 아네타였다.
“마님.”
카튼이 낭패라는 듯 중얼거리는 것과 다르게, 분에 못 이겨 씩씩대던 제로프 멜렛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붉어진 낯을 밝혔다.
연갈색 머리카락부터 녹빛 눈동자까지. 사랑하는 어머니와 정확히 일치하는 색채였지만, 그녀의 가슴에선 애틋함보다는 반감이 넘실댔다.
“오, 내 사랑스러운 손녀 아네타야. 드디어 네 얼굴을 보는구나!”
연극조로 외친 제로프 멜렛은 곧장 카튼을 제치고 열린 문 사이로 발을 들이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훈련 한 번 받아 본 적 없는 이가 기사인 카튼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카튼은 다시 제로프 멜렛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 놈이 또!”
아네타는 공작가의 기사를 놈이라고 칭하는 제로프 멜렛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언성을 높이려던 그는 아차하며 말을 멈추었다.
“큼. 내가 잠시 흥분했군.”
제로프 멜렛은 아네타의 눈치를 살피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네타가 나타나자 돌변하는 태도를 보니 분명 원하는 게 있으리라. 기사들과 린든은 그리 생각했다.
“아네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비켜 주겠나?”
제로프 멜렛은 점잖은 체하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아네타는 새어 나오는 코웃음을 삼켰다. 지금 당장 카튼의 뺨을 올려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눈빛으로 잘도 말한다 싶었다.
“카튼 경, 물러서도 좋아요.”
흉흉한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카튼은 아네타의 한 마디에 곧장 비켜섰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 우선순위는 눈앞에 있는 불청객의 의사가 아닌, 아네타의 의사였으니까.
아네타가 카튼을 물리자, 그것이 저를 위한 행동이라고 착각한 제로프 멜렛은 성큼성큼 아네타에게 다가섰다. 그러곤 가증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닦아 내는 척했다.
“아네타. 정말 많이 컸구나. 걸음마를 배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 훌륭한 집안과 맺어지다니. 이 할애비는 이제 여한이 없어.”
누가 들으면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지켜본 줄 알겠다. 아네타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짓고 멋대로 말을 꺼내는 외조부를 응시했다.
아네타가 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엘레나의 장례식 때였다. 그런 그가 어릴 때를 언급하니 우스울 따름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제로프 멜렛은 그때보다 더 나이 들어 있었다. 이전엔 그의 얼굴에서 엘레나를 찾아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그의 성품을 드러내듯 인상이 확 변해 버린 까닭이었다.
물론 인상이 변하지 않았다고 해도 제로프 멜렛을 대하는 아네타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애써 반감을 드러내지 않으며 물었다.
“이곳엔 어쩐 일이세요?”
“아네타.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말씀하세요.”
“……여기서?”
“네.”
제로프 멜렛은 린든과 로이, 그리고 카튼을 차례로 훑었다. 그들 때문에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그를 보니 할 말이라는 게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네타는 제로프 멜렛을 꿰뚫어 볼 듯 응시하다 결국 공작저 출입을 허락했다.
“들어오세요.”
제로프 멜렛은 혹여 아네타의 마음이 바뀔세라 잽싸게 그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아네타는 그를 데리고 자리를 뜨기에 앞서, 린든을 돌아보았다.
“린든. 황궁으로 사람을 보내서 칼로스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말 좀 전해 줘. 말없이 늦으면 그 사람, 분명 걱정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네타는 린든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하며 걸음을 떼었다. 어서 빨리 제로프 멜렛을 돌려보내고 칼로스를 보러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