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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115화 (115/122)

115화. 외전 2_세르세 라폴리의 사정 (3)

에드알이 조심스럽게 전한 소식은 아네타를 만나러 가고자 했던 세르세의 의지를 꺾었다.

세르세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입술은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다물렸다.

세르세가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자,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보던 에드알은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에드알의 기척은 닫힌 문 너머로 사라졌다. 세르세는 고개를 숙이며 마른세수를 했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칼로스 발티모어는 척 봐도 질투가 많았다. 그래서 늘 아네타를 독점하길 바랐지만, 그녀에게 자신과 어울리지 말 것을 강요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손 놓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사람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칼로스는 치졸한 짓으로 아네타와 세르세 사이를 갈라놓기보다는, 본인의 입지를 더욱 단단히 굳힐 사람이었다.

그중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연 결혼이었기에,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이건 생각보다 너무 빠르잖아.’

세르세가 아네타를 피해 다닌 기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동안 두 사람은 부지런히 사랑을 키우고, 나누었을 터였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뭐라도 더 해 봤어야 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타들어 갔다.

그러나 후회하기엔 늦었다.

‘이제 정말 아네타를 포기해야 한다니.’

납치 사건의 후유증처럼 남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발버둥치다, 이제 겨우 숨통이 트였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날, 세르세는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채 침실에 틀어박혀 뜬눈으로 날을 지새웠다.

***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어.’

세르세가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고 다시금 아네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로부터 수일이 흐른 뒤였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그저 무력하게 시간을 보내던 세르세는 아무렇게나 대충 걸치고 있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침실을 벗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사용인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던 에드알이 그를 발견했다.

“주인님.”

“에드알. 나 아네타를 만나러 다녀올게.”

세르세는 놀란 기색을 감추며 다가오는 그에게 애써 덤덤한 투로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을 거야.”

아마도. 뒷말을 삼킨 세르세가 마차를 준비할 것을 명하자, 에드알은 곧장 마구간으로 사람을 보냈다.

저택을 나설 때까지 염려를 담은 눈빛이 제게서 떠나지 않았지만 세르세는 묵묵히 마차에 올랐다. 그 와중에도 그의 가슴은 조금 있으면 아네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쿵쿵 뛰었다.

세르세는 그런 자신을 바보 같다고 힐난하면서도, 마차를 돌리진 않았다.

***

지난 밤, 세르세는 취기 오른 몸을 이끌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필름이 끊기지는 않았다. 침대 위로 몸을 내던지듯 누운 것까지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으니까.

아마 그 뒤로 기절하듯 잠들었으리라. 세르세는 그리 짐작하며 깨질듯 아픈 머리를 짚었다. 잠시 그러고 있자, 자연히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네타를 보는 순간 그간의 그리움이 둑 터진 듯 흘러나와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누구도 두 사람의 만남을 막지 않았고, 저 혼자 사랑의 한계를 깨닫고 절망하며 그녀를 피했을 뿐인데도 그랬다.

어느 정도 말문이 트였을 때는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마음을 고백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뿐이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세르세는 정작 중요한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자신을 더 몰아가는 선택을 했다.

‘어쩌자고 그런 제안을 한 건지.’

세르세는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일순간 속이 울렁거렸지만, 한껏 가라앉은 기분 탓인지 곧 그마저도 깊게 가라앉았다.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다니. 과연 잘한 일일까.’

몇 번이고 자문했지만,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이었다.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자며 무를 생각도 없었다.

창밖을 응시하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세르세는 곧장 작업실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내에 약속을 이행하려면 지금 당장 시작해야 했다.

작업실 책상 앞에 앉은 세르세는 구상과 수정을 반복했다. 식사도 거부한 채 틀어박혀 있던 그가 작업실 밖으로 나온 것은 하루가 꼬박 지나서였다.

스케치북 하나를 손에 들고 나온 세르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도와줄 이들을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에티엔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물론,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 종종 자신을 도와주던 시녀 두 명까지 동원한 세르세는 그들에게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다.

그러자 소식은 얼마 안 가 에드알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에드알은 주인의 미련한 행동에 한숨을 지었지만 만류하지는 않았다.

무리하지만 말아 달라고 당부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세르세는 드레스를 만드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아네타가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는 순간에 더욱 아름다울 수 있도록. 그래야 저리도 아름다운 사람이라 내가 잡지 못한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테니까.

웨딩드레스에 사용되는 재료들은 대부분 편의를 위해 미리 만들어 두었던 것들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새로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짧은 기간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세르세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향한 모든 감정을 드레스에 쏟아 내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드레스 만드는 일에 정신없이 몰두했다.

그러다 하루는 결국 코피를 쏟고 말았다.

핏방울이 책상 위로 툭 떨어지자, 마침 고개를 들었던 직원 하나가 그것을 발견하곤 놀라 소리쳤다.

“세르세 님! 코피, 코피가 나요!”

놀란 이들이 그의 상태를 살피려 했지만, 정작 세르세는 본인의 몸보다 드레스가 우선이었다.

피가 묻지 않도록 재빨리 몸을 뒤로 물린 그는 드레스가 오염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묻지는 않았네.”

세르세는 혹시 모를 일을 방지하기 위해 책상에 떨어진 피까지 소매로 닦아 버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떨어지는 피로 인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에요. 일단 이걸로 막고 계세요!”

“제가 집사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세르세는 직원이 떠넘기듯 건네준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그사이 열심히 바느질을 하고 있던 시녀 한 명이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인님!”

소식을 듣고 들이닥친 에드알은 손수건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피를 보고 아연한 얼굴로 뛰어왔다.

그는 앞으로 고개를 숙인 세르세의 뒷목에 급히 챙겨온 얼음주머니를 대어 준 뒤 콧등을 눌러 주었다.

“제가 무리하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기어코 피를 보시는군요. 장하십니다.”

에드알이 세르세를 바라보는 눈빛은 흡사 말 안 듣는 아들을 보는 듯했다.

에드알은 세르세는 물론 그를 돕던 이들에게까지 적어도 세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다 올 것을 권했다.

휴식 시간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그들은 세르세의 눈치를 살폈다.

세르세는 그럴 시간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에드알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고 마지못해 허락해 주었다.

다행히 코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멎었다. 피에 젖은 손수건을 잘 갈무리한 에드알은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눈을 감은 세르세에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글쎄. 아네타에 대한 기대를 접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칼로스 발티모어를 골려 주기 위해서겠지.”

“발티모어 공작 전하를 말입니까?”

“지금쯤 내가 아네타의 웨딩드레스를 만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거야. 아네타는 몰라도 공작은 내 마음을 알고 있으니 분명 탐탁지 않아 하겠지.”

하지만 그것 가지고 아네타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는 없으리라.

세르세는 이 정도 심술쯤은 부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후작 각하께 고백하지 않으신 겁니까?”

“안 했어.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자신의 고백으로 아네타의 마음이 바뀐다면 수백, 아니 수천 번도 더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알에게 말했듯 아네타가 마음을 바꿀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결혼할 사람이야. 말해 봤자 괜히 속만 시끄럽고, 관계도 어색해질 뿐이야. 난 내 마음 때문에 아네타가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

세르세는 아네타와 어색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끝까지 남자가 아닌 친구로서 그녀 앞에 서야 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질투심이 강해서, 어쩌면 고백하는 순간 가문의 대가 끊길지도 몰라.”

“글쎄요. 후계자는 없지만, 바로 위에 형님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럼 마지막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청해야지. 그들이 가문을 잇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가 끊기는 게 나으니 저승길 동무로 삼아 달라고.”

에드알은 장난스럽게 건네 오는 말에 마찬가지로 장난스럽게 응수해 주었다.

하지만 진짜 웃음과 가짜 웃음을 구분하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부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잠시 침묵하던 에드알은 줄곧 혀끝에 맴돌던 말을 툭 꺼내놓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후작 각하가 조금 원망스럽습니다.”

“원망하지 마. 나 혼자 그 애 모르게 시작한 사랑이니까. 내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같은 감정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미련하군요.”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이게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방식인걸.”

세르세는 그 말을 끝으로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며 에드알에게 자리를 비켜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에드알에게 했던 말과는 다르게, 세르세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기점으로 감았던 눈을 떴다.

의자에 앉은 채로 상체를 숙여 가장 밑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연 것은 그다음이었다. 안으로 손을 넣어 공간 깊숙한 곳을 더듬자, 이내 손끝에 작은 케이스 하나가 걸렸다.

세르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안에 든 것은 그가 아네타에게 주고 싶어 만들었던 반지였다.

세르세는 끝내 전하지 못한 그것을 아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계절이 수차례 바뀔 때쯤엔 이 감정도 흐려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긴긴 세월을 앓아야겠지만, 어쩌겠는가.

선택받지 못한 이의 결말이란 본래 그런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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