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외전 2_세르세 라폴리의 사정 (2)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세르세는 긴 말 없이 응접실 문으로 향하는 아네타의 뒤를 따랐다. 어서 따라가라며 눈치를 주는 제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에 있어 봤자 탐욕스러운 자들의 한심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할 것이 뻔해 발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오늘따라 누군가의 뒤를 쫓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아직은 힘이 없으니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응접실을 벗어났다고 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동갑이라고 하니까 말 놓을게. 너도 말 편하게 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우리가 좋든 싫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으니 말이야.”
그러던 중, 아네타가 먼저 말문을 텄다. 시선은 앞을 향한 채였다.
“그래.”
존대를 하고 안 하고는 나이가 아닌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절하진 않았다. 나이가 같은데 존대를 하면서도 하대를 듣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세르세가 마다하는 시늉 한 번 하지 않고 받아들이자 아네타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너, 지금 네 처지가 어떤지 알고 있지?”
무감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거나 비꼬는 듯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덕분에 세르세는 동요하지 않고 덤덤하게 반응했다.
“모를 수가 없지. 하지만 난 누구 시종 노릇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어. 인형 노릇은 더더욱 싫고.”
제 아비의 의도가 들통났지만, 세르세는 변명하기 보다는 제 입장을 확실하게 밝혔다.
다행히 아네타는 세르세를 그런 식으로 취급할 생각이 없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할 것 없는 짧은 대화였지만 두 사람은 이미 서로에 대한 파악을 마쳤다.
‘자기 아버지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구나.’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느낀 공통된 감상이었다.
“아버지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네.”
“그러는 네 아버지도 만만치 않은 것 같던데.”
“맞아. 할 줄 아는 게 재산 축내는 거 아니면 망나니짓밖에 없거든.”
그렇다 보니 이어지는 말도 거리낌 없었다.
세르세는 속이 훤히 보이는 아부에 입이 찢어져라 웃던 후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이에게 붙어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고 애쓰는 제 아비의 수준도 알 만했다.
그래도 눈앞에 있는 아이는 꽤 마음에 들었다. 동병상련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도 저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아까와 다르게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가는 걸 보면.
“재산 축내는 건 우리 아버지도 일가견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조심해. 분명 사업 투자를 위해서 입 안의 혀처럼 구는 걸 테니까.”
“받아들이면 결국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는 거겠지.”
세르세의 경고에도 아네타는 그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말씀 안 드릴 거야?”
“내가 왜?”
아네타는 되물었다. 진심 어린 표정에 세르세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거야.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니까. 늘 있는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아네타는 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일관된 표정이었다.
“난 내 아버지가 싫어. 끔찍할 정도지.”
심지어 혐오를 드러내는 순간까지도.
“동감이야. 나도 그렇거든. 능력도 안 되면서 왜 자꾸 일을 벌이시는지 모르겠어. 빚이나 안 지면 다행인데 말이야.”
두 사람은 제법 죽이 잘 맞았다.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도 공통되었다.
어린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위화감이 있었지만, 본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 자금을 어머니 사업 쪽으로 댔더라면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자작 부인께선 무슨 일을 하시는데?”
“에티엔이라는 이름의 의상실을 하셔.”
“아. 나도 거기서 몇 번 드레스를 맞춘 적이 있어. 흠 잡을 곳 없는 솜씨라고 내 시녀들이 감탄하던걸. 물론 나도 거기서 맞춘 드레스들이 마음에 들었고.”
아네타의 호평에 세르세는 낯빛을 밝혔다. 마치 제가 칭찬을 받은 것처럼 뿌듯했다.
“난 반드시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사업을 물려받을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터였다. 연습 삼아 그려 본 드레스 디자인들은 하나 같이 성에 차지 않았으니까.
“너도 드레스를 만들려고?”
“왜. 너도 내가 바보 같아? 남자가 드레스를 만드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세르세는 자신을 비웃던 두 형들의 얼굴이 떠올라 연이어 물음을 쏟아 냈다.
제법 마음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아네타가 혹여 그렇다고 말할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애써 내색하진 않았다.
“아니. 이상한 걸로 따지면 직업에 성별을 따지는 게 더 이상하지. 난 그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야.”
다른 의도는 없었다는 말에 뾰족했던 눈초리가 풀렸다. 아네타가 꺼낸 말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오히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만드는 것은 물론 입는 것까지도. 넌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도망쳐 버렸지만.”
“그 일은 잊어 줘.”
아네타가 첫 만남 때 있었던 일을 언급하자 세르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곱지 못한 눈초리를 보내오던 이는 어디 갔는지, 작은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못 잊을 것 같은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예뻤거든.”
“그래도 예쁘다는 말은 좀…….”
남자라서 예쁘다는 수식어가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면, 애초에 자신의 목표를 비웃는 이들을 불쾌하게 생각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세르세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덤덤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는 칭찬이. 마치 지당한 사실을 말하듯 흔들림 없는 기색 때문에 민망함은 모두 제 몫이었다.
“부끄럽구나?”
“…….”
세르세는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이런 때에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아네타는 단번에 진실을 꿰뚫어 보고는 도로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순진한 면이 있었네.”
이윽고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기며 놀리는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를 냈다.
“의외라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칭찬은 고맙게 받을게.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정원. 어쨌든 난 네게 저택 구경을 시켜 줘야 하는데 보여 줄 만한 곳은 그곳뿐이거든. 대충 구색이라도 맞춰 둬야 너나 나나 나중에 덜 귀찮아지지.”
이 넓디넓은 저택에 설마 구경 시켜 줄 곳이 그곳뿐일까. 의문이 앞섰지만 특별히 가 보고 싶은 곳도 없었기에 세르세는 아네타의 결정에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러나 그 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세르세는 어느 그림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라오던 이의 발소리가 멎자 아네타는 몸을 돌려 세르세의 시선을 좇았다.
그 끝에 자리한 것은 엘레나의 그림이었다.
“저 그림이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이야.”
한색 위주로 사용된 그림임에도 그랬다. 특징이 도드라지는 화풍은 한 번 보면 쉬이 잊혀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세르세는 넋을 놓고 벽에 걸린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내 어머니께서 그린 그림이야.”
엘레나 아데나워, 그러니까 아데나워 후작 부인은 여러모로 유명했다.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출신이지만, 외모 하나로 후작의 눈에 들어 제국 최고의 재력가 가문의 안주인이 된 여자.
그런 인물이 언급되자 세르세는 힐끗 아네타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놀랐다. 후작 부인을 언급하는 아네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져 있는 까닭이었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그녀 역시 감정이 있는 사람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지만, 의외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후작을 언급할 때와는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른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세르세는 한참 동안이나 그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영감이 반짝 빛을 내며 떠올랐다.
세르세는 떠오르는 잔상을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나마 여러 번 그 형태를 덧그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동안 끙끙 앓아 왔던 일을 해치울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
잠시 과거의 일을 떠올리던 세르세는 그 이후의 일을 떠올렸다.
저택에 도착하는 즉시 방으로 향한 어린 날의 자신은 아네타의 웃음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종이에 옮겼다.
난생처음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그려 낸 순간이었다. 여전히 서툴기 짝이 없는 솜씨였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세르세는 종종 갤러리에 가던 어머니에게 동행을 청했다.
아네타와는 절친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였었다. 보고 있으면 곧잘 영감이 떠오르곤 하는 뮤즈이기도 했다.
하지만 감정의 실체는 따로 있었다. 세르세는 그 사실을 아네타가 혼인을 통보할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다. 그저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에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히는 것이 전부였다.
세르세가 제 감정을 자각한 것은 아네타의 친구로서 결혼식에 초대 받았을 때였다.
그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칼로스와 나란히 서 있는 아네타를 보고나서야 제 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각과 동시에 포기해야 했지.’
쓰디쓴 기억에 세르세는 설핏 웃음을 지었다.
아네타가 이혼했을 때에는 솔직히 기대했었다.
제게도 기회가 주어질 거라는 믿음과 함께 그녀를 기다렸지만, 아네타는 끝내 칼로스를 선택했다.
세르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로스는 아네타의 사랑은 물론,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무력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납치 사건 때의 참상을 떠올린 세르세는 마른세수를 하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무력함에 발목을 붙들려 만남을 피한 것도 벌써 몇 주째였다.
‘보고 싶다.’
과거를 떠올리고 있자니 그녀가 그리워졌다. 제가 먼저 그녀를 피해 놓고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뻔뻔한 건 알지만 만나러 가 볼까.’
세르세는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결단을 내렸다.
외출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때마침 집사 에드알이 그가 있던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 잘 왔어, 에드알. 아데나워 후작저로 갈 거야. 마차를 준비해 줘.”
다른 때였다면 지시를 전하기 위해 서둘러 떠났을 에드알은 어째서인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세르세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집사의 모습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주인님. 후작저로 가시기에 앞서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데나워 후작 각하께서 칼로스 발티모어 공작 전하와 재혼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