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외전 2_세르세 라폴리의 사정 (1)
보통 사람들은 두 번째 만남보다 첫 번째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에 새긴다.
하지만 세르세 라폴리의 경우는 반대였다. 그는 아네타 아데나워와의 두 번째 만남을 잊지 못했다.
짧고 굵게 끝났던 첫 만남 때처럼 뇌리에 깊게 박힐 만한 특별한 일은 없었다. 오히려 불쾌하고 불편한 분위기에서 눈치만 살피던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기억이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까닭은 그가 그때부터 아네타 아데나워라는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세르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어린 날의 기억을 회상했다.
***
이른 아침, 세르세는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욕실로 이끄는 이들에게 영문을 물었지만, 그들은 아버지인 라폴리 자작의 지시가 있었다는 대답만을 돌려줄 뿐이었다.
연유를 알 수 없는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차려입은 라폴리 자작이 서 있었다.
그는 세르세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행거에 걸린 옷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한 벌 고른 자작은 그것을 시녀의 손에 던지듯 넘겨주었다.
“이 옷으로 다시 갈아입혀. 시간이 없으니 얼른.”
눈 뜨자마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르세는 반항하지 않고 자작의 요구에 따라주었다.
큰 소리가 났다간 어머니가 걱정하실 테고, 건수를 잡고 득달같이 달려온 형들이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사용인들은 문이 닫히기 무섭게 표정을 일그러뜨린 세르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세르세는 목소리를 낮추며 묻는 이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용인은 그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참을성 없는 자작의 성격을 고려해 서둘러 환복을 도와줄 뿐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라폴리 자작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르세의 모습을 쭉 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야 좀 봐줄 만하군. 함께 가 봐야 할 곳이 있으니 따라오너라.”
권유가 아닌 통보를 남긴 채 뒤돌아선 자작은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눈이 아닌, 상품의 가치를 감정하는 장사치의 눈을 하고 있었다.
익숙한 일이었기에 일일이 반응하기도 귀찮았다. 세르세는 고분고분히 그 뒤를 따랐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일이 그가 원하는 대로 순탄하게 흘러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자신감이 넘치는 것과 별개로 제 아비는 운이 없었다.
금줄인 줄 알고 잡은 줄은 새끼줄에도 미치지 못하는 썩은 줄이었으며, 사업은 벌이는 족족 망했다.
분명 수익을 내기 위해 벌인 일들이지만, 늘어나는 것은 흑자가 아닌 적자였다.
그나마 그들이 적자를 메우고, 귀족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사업 덕분이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벌써 옛적에 귀족의 신분으로 길거리에 나앉았을 터였다.
멍청한 형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겉만 번지르르해 보일 뿐 가망은 없는 아버지의 사업에 목을 매고 있지만.
‘나라도 현실을 깨달았으니 망정이지.’
세르세는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차며 마차에 올랐다.
드레스 따위, 남자가 만드는 게 아니라고 폄하하는 그들 덕분에 자신이 보다 쉽게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어 다행이었다.
물론 그들이 진가를 알아보고 달려든다 해도 가뿐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서둘러 출발하게.”
자작이 마부를 닦달하자,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세르세는 그때가 되어서야 목적지를 물을 수 있었다.
“아버지. 절 어디로 데리고 가시는 건가요?”
“아데나워 후작저로 가고 있다.”
자작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답했다.
세르세는 그 말을 듣고 지난번 저택에서 보았던 얼굴을 떠올렸다. 어머니 손에 붙들려 억지로 신작 드레스를 입어야 했을 때 마주쳤던 낯선 소녀를.
보자마자 줄행랑을 쳤기 때문에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사용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녀가 무성한 소문 속의 ‘그’ 아네타 아데나워이며, 아버지인 아데나워 후작 손에 끌려와 저택에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이번에는 상황이 정반대가 되었으니, 그곳으로 가면 높은 확률로 그녀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혼자 가도 될 곳을 굳이 자신을 대동하는 것으로 보아 기대는 접어두는 게 좋을 성싶었다.
“후작저에 저를 무슨 이유로 데리고 가시는 건데요?”
“아데나워 후작에게는 너와 나이가 같은 딸이 하나 있지. 너는 반드시 그 영애와 친해져야 한다. 널 좋아하게 만들면 더 좋고. 이번 사업을 위해서는 그 집안과 친분이 있어야 하니까.”
자작은 제 아들이 이미 아네타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 차림으로 만났다고 말하면 좋은 말을 듣지 못할 것이 뻔했고, 어머니에게까지 불똥이 튈지도 몰랐기에 세르세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저 제 아비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곱씹으며 현실적인 걱정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영애가 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요?”
세르세는 자신이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고 이상하다며 손가락질하던 과거의 친구를 떠올렸다.
지난번에 봤던 아데나워 후작과 닮았다면, 그녀 역시 그러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럴 일 없도록 비위를 잘 맞춰야지. 네가 영애와 친하게 지내야 내가 아데나워 후작에게 한 번이라도 말을 붙일 건수가 생길 게 아니냐.”
자작은 제 꿍꿍이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말수가 없는 걸로 보아 낯을 좀 가리는 것 같다만, 무릇 그 나이 또래 계집애들은 예쁜 걸 좋아하지. 넌 네 어미를 닮아 얼굴 하나는 계집애처럼 곱상하니 마음을 얻는 일이 어렵진 않을 거다.”
세르세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제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아네타 아데나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쥐여 줄 인형 같은 것이었다. 손수 옷까지 골라 입혔으니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마침 나이가 동갑이기까지 하니 기회다 싶었겠지. 사람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세르세가 제 처지에 환멸을 느끼는 사이, 마차는 어느 대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가 아데나워 저택이구나.’
기가 질릴 정도로 크다. 감상은 그것이 전부였다. 세르세는 멀뚱히 서서 저택을 응시했다.
“넋 빼고 서 있지 말고 얼른 따라오거라.”
자작은 조급한 투로 일갈하곤 아들을 위한 배려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또래보다 성장이 빠르다고 한들 성인의 보폭을 따라갈 수 없는 세르세는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각하와 아가씨는 응접실에 계십니다. 제가 그곳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저택의 내부는 귀족인 그들마저도 기가 질릴 만큼 화려했다. 응접실 앞에 다다르자, 사용인은 문을 두드려 그들의 도착을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안으로 들어가자 닮은 듯 닮지 않는 부녀가 보였다. 그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네자, 후작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눈을 흘겼다.
“늦었군. 감히 날 기다리게 하다니.”
같은 영광의 가문 가주를 대하는 것치고는 제 감정을 감출 이유가 없다는 듯이 노골적인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자작은 불쾌한 기색 없이 꾸벅 허리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이 녀석이 각하를 뵈러 간다는 말에 아무 옷이나 입고 갈 수 없다며 법석을 떠는 바람에…….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를 나이지만, 각하의 존함 뒤를 따르는 명성까지 모를 수는 없지요. 오늘따라 긴장해서 안 하던 행동을 한 것은 모두 그 때문인가 봅니다.”
자작은 사실을 왜곡하고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며 후작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아첨했다.
“부디 각하를 존경하는 마음을 어여삐 여기시어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세르세는 반박은 하지 않았지만, 동조도 하지 않았다. 설마 저런 말을 듣고 기분을 풀까. 그리 여겼지만, 이번에는 그가 아닌 자작의 판단이 맞았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줄 테니 다음부터는 늦지 말게. 자, 앉지.”
후작은 언제 타박을 했냐는 듯 입꼬리를 씰룩이며 자리를 권했다. 그들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자신들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자작은 혀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입을 열 때마다 아첨을 술술 쏟아 냈다. 아무리 제 아비라지만 질리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더불어 후작은 그의 아첨에 부정하는 시늉도 않은 채 거들먹거리기 바빴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데릭 아데나워는 타인이 자신을 칭송하는 것에 사족을 못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끼리끼리 어울리는 거겠지.’
둘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대로 손잡고 제국을 영영 떠나 주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세르세는 아네타에게로 눈을 돌렸다.
지금까지 인사 한 마디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네타는 더는 두 남자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듣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듯 눈을 돌렸다.
마치 자기 혼자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벽을 치는 모습에 세르세는 아네타가 낯을 가린다는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저건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그냥 무관심한 것 같은데.’
그러는 사이, 세르세를 아네타에게 붙여 놓을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던 자작이 슬그머니 운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아데나워 영애께서 제 아들과 나이가 같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사실입니까?”
“그래. 듣기로는 그렇다더군.”
자작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척 언급하자, 후작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을 향한 칭송이 멎은 까닭이었다.
이야기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에서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금세 지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었지만, 자작은 포기할 수 없었다.
“영애만 괜찮다면 여기서 잘 모르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 게 아니라, 제 아들에게 저택 구경을 시켜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은 아네타에게 하고 있지만, 실상은 후작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각하께 드릴 말씀도 있고요.”
무슨 이야기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나 마나 사업 이야기일 것이 뻔했다.
세르세는 하마터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혀를 찰 뻔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 알아서 해.”
후작은 귀찮다는 듯 허공에다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가만히 앉아 있던 아네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아네타는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르세와 시선을 맞추며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