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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109화 (완결) (109/122)

109화. 재결합 (6)

아네타는 복도를 따라 늘어진 카펫 위를 걸었다.

시녀는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며 길게 늘어진 드레스 트레인을 들어 주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벨라인 드레스의 기본적인 틀을 이루는 것은 꽃과 잎사귀가 겹쳐지며 연결되는 골드 레이스였다.

그 위에 화이트 튤을 겹쳐 주름을 잡은 드레스의 포인트는 허리에 두른 화려한 벨트였다. 그것마저도 황금으로 만들어져, 아네타는 마치 온몸에 금빛을 두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네타의 마음은 그가 있을 연회장과 가까워질수록 조급해졌다.

마음 같아선 뛰어서라도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지만, 꾹 참아야 했다.

그 충동을 실행에 옮기기라도 했다간, 몇 년 간은 꼼짝없이 버논의 놀림감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아네타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충동을 떨쳐내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겨울의 절정에 다다른 시기였지만, 오늘따라 하늘이 맑고 날이 포근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을 약속하기엔 딱 좋은 날이었다.

칼로스와 이루게 될 가정에 대해 걱정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보통의 부부 관계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했고, 좋은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 혼인을 미루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누구나 처음은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 날 적부터 누군가의 배우자였던 사람은 없고, 부모였던 사람도 없다. 그러니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점차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네타는 그 길을 함께 걸을 사람이 칼로스라서 기뻤다.

그를 떠올리자, 가슴에 따뜻한 훈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붉은 카펫의 끝이 보였다.

사용인들을 대동한 채 연회장 앞을 지키고 있던 린든은 그녀가 다가오자, 몸소 나서서 문을 열었다.

아네타는 천천히 열리는 문틈으로 칼로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주례 겸 증인으로서 방문해 준 대신관조차 등진 채 문을 보고 서 있다가, 아네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환히 웃었다.

“어서 와, 아네타.”

칼로스는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먼저 다가와 손을 잡았다.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관 헤이든의 표정을 살폈다.

주신을 상징하는 진녹빛 의복을 갖추어 입은 그는 결혼식 주례를 설 만큼 한가한 이가 아니었지만, 러셀의 요청으로 교황이 특별히 보내 준 이였다.

헤이든은 아네타를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네타 역시 같은 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흐뭇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선 칼로스의 행동을 불쾌하게 느끼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시중을 들고 있던 시녀가 재빨리 트레인 자락을 정리한 뒤 몸을 물렸다.

다 되었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자, 칼로스가 입을 열었다.

“들어갈까?”

“좋아.”

문이 있는 지점부터 바닥에 깔린 카펫의 색은 하얀색이었다. 그 위로 발을 딛는 순간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터였다.

아네타는 칼로스가 에스코트 하듯 내민 손을 꼭 잡고 망설임 없이 그 선을 넘었다.

연회장 내부는 사용인들의 손에 의해 완벽하게 식장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더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하지 못하는 한을 풀겠다는 듯이 열성적으로 나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웅장한 행진곡도 환호하는 하객도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누군가는 두 가문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결혼식이라고 말하겠지만, 아네타는 이편이 더 좋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순백의 길을 걸었다. 남은 생도 이렇게 손을 잡고 발을 맞추며 걷는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난 내가 이런 행복을 느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힘들게 거머쥔 행복인 만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져 보려고.”

아네타는 세상에서 가장 변하기 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변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칼로스를 보며 깨달았다.

그렇기에 아네타는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그를 향한 자신의 사랑 역시 그랬다.

“오늘 이 선택을 후회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날 믿어 줘. 반드시 그렇게 만들게.”

칼로스의 단언을 끝으로 두 사람은 대신관이 있는 단상 앞에 다다랐다. 인자한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대신관은 주례의 시작을 알렸다. 웃음기가 싹 빠진 진지한 낯이었다.

대신관은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는 말들을 해 주었다.

아네타와 칼로스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회장 안을 울리는 건 오직 그의 엄숙한 목소리뿐이었다.

번잡한 데다 굳이 할 필요 없는 과정들을 과감히 제한 덕분에 식순은 간결했다.

부와 명예를 과시하고자 부러 시간을 끄는 이들과는 반대되는 선택이었다.

“그럼 이제 주신 아드모스 님의 앞에서 서약하겠습니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 서약을 할 차례가 되었다. 대신관은 먼저 칼로스를 향해 물었다.

“신랑 칼로스 발티모어 님께선 아네타 아데나워 님을 반려로 맞아 언제나 서로를 존중하고, 가정에 충실하며, 진실로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예. 맹세합니다.”

칼로스는 대신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대답했다.

다음은 아네타 차례였다.

“신부 아네타 아데나워 님께선 칼로스 발티모어 님을 반려로 맞아 언제나 서로를 존중하고, 가정에 충실하며, 진실로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아네타는 대답하기에 앞서 칼로스를 응시했다.

아네타의 시선을 느낀 칼로스는 곧장 시선을 마주쳐 왔다. 여전히 맹목적인 애정을 담은 눈빛이었다.

“네. 맹세합니다.”

아네타는 칼로스를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잡은 손에 깍지를 끼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불경한 생각인 건 알지만, 칼로스는 다른 증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서로가 맹세의 증인이자, 주인이기만 하면 되었다.

“마지막으로 반지를 교환해 주십시오.”

예식은 어느덧 마지막 순서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칼로스는 가지고 있던 반지 케이스에서 아네타가 끼던 반지를 꺼냈다. 아네타는 칼로스가 집어 든 반지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의 손에 비하면 제 반지는 턱없이 작아 보였다.

아네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는 손길에선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분명 첫 결혼식 때에도 경험한 것이었지만, 그때 느끼는 감정과 지금 느끼는 감정의 차이는 확연했다.

오랜만에 낀 반지는 여전히 그녀의 손에 잘 맞았다. 아네타는 반지에 박힌 푸른 다이아몬드를 내려다보다, 케이스에서 그의 반지를 꺼내 끼워 주었다.

반지가 각각 주인을 찾아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신관의 얼굴에는 처음과 같은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눈앞에 있는 이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며 예식을 마무리 지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두 분이 부부가 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이것으로 두 사람은 또다시 부부가 되었다.

***

인내는 칼로스 발티모어의 오랜 습관이자, 특기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맞는 밤을 앞둔 지금의 그에게선 인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전장에도 나가 본 적이 있는 그였기에 죽을 고비쯤은 심심찮게 넘겨봤다.

그러나 그는 그때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아찔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두 번씩이나, 그것도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어.”

아네타는 괜스레 반지를 낀 칼로스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성적인 의도가 조금도 없는, 담백한 스킨십이었지만 칼로스의 사정은 달랐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후작저에 있는 아네타의 침실이었다. 즉,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남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체향으로 가득 찬 공간이기까지 하니 칼로스의 입장에선 몸이 동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칼로스는 아네타의 말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아네타도 대답을 듣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니라는 듯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의 반지를 내려다보며 손끝으로 표면을 더듬을 뿐이었다.

아네타는 처음으로 그의 반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손가락 중 어디에도 맞지 않을 것이다. 굳이 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을 곱씹으며 아네타는 새삼스럽게 자신과 그의 손 크기 차이를 실감했다.

“아네타. 너무 자극적인데.”

그때 그녀의 손길을 견디다 못한 칼로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뭘 했는데? 설마 지금 손 좀 만졌다고 그러는 거야?”

아네타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벙긋거리다 물었다.

“그동안 말은 안 했는데, 사실 난 당신 생각만 해도 동해. 그런데 그렇게 만지면 내가 어떻게 참겠어.”

칼로스는 뻔뻔하게 대답하면서도 은근슬쩍 아네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그녀의 몸을 들어 제 다리 위로 끌어오는 데에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내 생각만으로도 동한다며. 이건 더 위험한 거 아니야?”

“안 참고 일 치르고 싶다고 어필하는 거야. 그런데, 이건 뭐야?”

칼로스는 아네타의 허벅지 부근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를 드레스 위로 만지작거렸다. 얇은 실내용 드레스라 그런지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 이거. 웨딩 가터야. 당신이 좋아할 것 같아서 그대로 입고 왔어.”

칼로스는 그 말을 듣고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의 몸이 뻣뻣이 굳어 버리자, 아네타의 장난기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보여 줄까?”

아네타는 치맛자락을 슬쩍 들추며 가터의 모양을 직접 보여 주었다.

다리를 가리던 치맛자락이 걷히고, 허벅지를 감싼 레이스가 드러나자 칼로스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은 레이스 사이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충동적으로 뻗을 뻔했던 손을 꾹 눌러 쥔 채였다.

솔직히 말하면 아네타는 칼로스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석상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흡사 주인의 허락을 기다리는 충견처럼 열망 어린 눈빛으로 아네타를 응시할 뿐이었다.

주먹을 쥔 손에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등 위로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아네타는 이번에야말로 그가 바라 마지않던 의도를 담아 그 위를 쓸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일, 어디 한번 치러 봐.”

이윽고 상을 주듯 그가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끊어 놓자, 곧장 반응이 나타났다.

아네타는 반전되는 시야 속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조급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많았고, 아네타는 그와 함께 할 모든 순간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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