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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107화 (107/122)

107화. 재결합 (4)

세르세는 끝내 제 마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쓰린 속을 달래며 술을 들이켜는 것뿐이었다.

독한 술이 들어가자, 화끈한 열기가 속을 달궜다. 타는 듯한 갈증이 이는 것은 비단 술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웨딩드레스는 주문했어?”

세르세는 먹기 좋게 잘려 있는 과일 하나를 입에 넣으며 물었다. 맞물린 이 사이로 과육이 머금고 있던 즙이 흘러나왔지만, 여전히 그의 입안은 쓰디썼다.

“아직.”

“왜 아직도 안 한 거야? 제작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따로 제작하기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기성복을 입을지, 아니면 이전에 입었던 것을 입을지 고민 중이었어. 어차피 둘이서만 치를 거니까.”

사실 기성복보다는 첫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 쪽으로 마음이 기울긴 했다.

아네타는 가지고 있는 드레스들 중에 가장 고가지만, 한 번 입고 줄곧 보관만 해 오던 것을 떠올렸다.

웨딩드레스가 일반 드레스값의 두 배라면, 아네타가 입었던 것은 그 두 배의 네 배쯤 되는 값이었다.

새로 제작해 봤자 같은 신세가 될 것이 뻔한데 굳이 또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결혼식이 언젠데?”

“열흘 뒤야.”

크리스와 버논을 보고 자극을 받은 건지, 칼로스는 최대한 결혼식을 빨리 올리길 바랐다.

크리스 때에 비하면 준비할 것이 적었기에, 아네타는 기꺼이 그의 뜻에 따라 주었다.

아네타는 남은 일을 헤아렸다. 기껏해야 한 손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만 남아 있었다.

“그럼 네 드레스, 나한테 맡겨. 내가 만들어 줄게.”

그러던 중 세르세가 꺼낸 말은 다분히 충동적인 듯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취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짧은 기간 안에? 아무리 너라도 그건 무리 아닐까.”

“날 너무 무시하는데. 기한은 그 정도면 충분해. 직원들 손을 빌리면 되니까.”

“에티엔은 어쩌고?”

“어차피 여는 날보다 닫는 날이 더 많은 거 알잖아. 문제없어.”

사장 본인이 괜찮다니 에티엔에 대해서는 더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아네타는 고민하며 잔 표면을 검지 끝으로 툭툭 쳤다.

이 세계엔 다소 성능이 뒤떨어지긴 해도 엄연히 재봉틀이 존재했다.

그러나 세르세와 그의 사람들은 바느질 한 땀까지 모두 손으로 놓는 이들이었다.

그녀가 쉽게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물론 세르세의 솜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아네타는 결국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녀보다 세르세가 더 빨랐다. 낌새를 눈치챈 그는 재빨리 선수를 쳤다.

“내 소원이야.”

“내가 네 드레스를 입는 게?”

“이런 말을 해야 네가 내 말을 들을 거 아니야.”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전처럼 데면데면할 때라면 모를까, 하나뿐인 친구가 결혼한다는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할 수 있는 걸 해 주려는 것뿐이니까 만들어 준다고 할 때 받아. 이런 기회 두 번은 없어.”

“글쎄. 난 차라리 이전의 관계가 더 나은 것 같은데. 그때의 우린 사이가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서로 피해 다니지는 않았으니까.”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준 것은 기특했다. 그러나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였다.

아네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세르세를 응시했다.

“……그건.”

“그건?”

아네타는 어디 한 번 말해 보라는 듯이 말끝을 따라하며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 역시 사람이기에 상처를 받았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피하는데 의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널 지키지 못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져서 그랬던 거야.”

세르세가 납치 사건 때를 언급하자, 아네타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그녀가 독주를 마시고 각혈을 했을 때, 세르세는 마치 자신이 독주를 마신 것처럼 괴로워했었다.

그때 그녀가 느낀 것이 육체적 고통이었다면, 세르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젖어 심적인 고통을 느꼈으리라.

“너, 그때 일로 아직까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거야?”

아네타의 물음에 세르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타를 피한 이유가 그것뿐만이 아니었지만, 마음을 전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상 그에 대해서 입 밖에 내는 일은 없어야 했다.

“너, 나 모르게 에레즈 바우터에게 협력했니?”

“내가 미쳤어? 그런 일을 벌였을 리 없잖아.”

단박에 인상을 구기는 세르세의 입에서 제법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격한 부정에도 아네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면 죄책감 같은 거 느낄 필요 없어. 정작 일을 벌인 장본인은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우릴 저주하며 죽었을 게 뻔한데 왜 아무 잘못 없는 네가 자책을 해?”

아네타의 입장에서는 세르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어째서 날 지키지 못했냐는 말 따위로 널 원망할 생각 추호도 없어. 그 논리대로라면 너와 크리스도 나 때문에 납치당했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아니. 절대.”

세르세는 아네타의 말이 끝나는 즉시 부정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더는 그 일로 마음고생하면서 굴 파고 들어가지 마. 네 제안은 고맙게 받아들일 테니까.”

“……알겠어.”

“나 피하지도 말고.”

“이제 안 피해. 약속할게.”

“그 말, 믿고 있을게.”

아네타는 확답을 받고 나서야 표정을 풀며 안도했다.

***

레녹스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네타는 곧장 소파로 가 앉았다.

힘없이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녀는 모습만 보였다 하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이들로 인해 진이 빠져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건네 오는 말은 모두 축하 인사였다. 그녀가 한 명 한 명 짧게나마 상대해 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들의 축하가 진심인지, 아니면 그저 잘 보이기 위해서 건네는 빈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반가운 얼굴도 몇 있었다.

축하와 함께 남편인 라일의 서신을 전해 준 테르사부터 클로린 공작, 헤첸 백작, 마지막으로 아주 오랜만에 보는 루이사까지.

소중한 인연들 중에서도 가장 반가웠던 이는 루이사였다.

그녀는 전보다 더 짧은 단발을 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루이사의 근무지가 발티모어 공작가, 그것도 연무장이기 때문에 그동안 얼굴 볼 일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아닐 터였다. 재혼하게 되면 자주 보게 될 테니까.

‘루이사에게 가신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탐나는 인재를 이런 식으로 얻게 될 줄은 몰랐다.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으며 루이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공작 전하께서 이번에야말로 신혼집 꾸미는 팔불출이 되셨더군요.”

루이사의 말에 의하면, 칼로스는 함께 사용할 집무실을 꾸밀 때보다 더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얼굴엔 늘상 웃음꽃이 피어 있다더라.

“과도하게 관대해지신 걸로도 모자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다니십니다. 그 모습을 하도 봤더니 요즘 제 꿈자리가 뒤숭숭합니다.”

물론 그 뒤에 이어진, 루이사 특유의 직설적인 말은 칼로스에게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도 신혼이 아닌 건 마찬가지 아닌가?’

같은 사람과 재혼한 직후도 신혼으로 쳐야 하는 걸까. 그리 생각하던 때에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칼로스였다면 노크 직후 문을 열었을 테니 그는 아니었다. 아네타는 부디 방문객의 목적이 축하가 아니길 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와도 좋아요.”

아네타는 출입을 허락한 뒤 앉은 상태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열리는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진짜 신혼인 크리스와 버논이었다.

“우리 왔어.”

“두 사람, 내일 돌아오는 거 아니었어?”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예상하지 못한 이들이기도 했다.

아네타는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는 사이, 버논은 크리스를 데리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일정을 하루 앞당겼어. 누구 씨들이 치사하게 우리 없는 사이에 결혼 발표를 해서 말이지.”

버논은 신혼여행지까지 소문이 파다하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한테는 너무 여유 없이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니. 정작 너희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하는구나?”

“비교 대상이 잘못됐어. 우리는 재혼이고 너희는 초혼이니까 경우가 다르지. 게다가 아무도 초대하지 않으니까 준비할 것도 적고.”

“뭐가 그렇게 급했어? 어? 나처럼 하루라도 빨리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싶었던 거야?”

아네타가 딱 잘라 말했지만 버논은 굴하지 않았다. 건수를 잡았다는 듯 능글맞게 웃는 그를 보며 아네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로디온의 말대로 버논은 좀 의젓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버논은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한결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 뒤로 몇 마디를 더 붙이며 아네타의 한숨을 자아냈다.

“그만해요, 버논. 아네타 님께 장난치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보다 못한 크리스는 버논을 만류했다. 그러곤 가지고 있던 짐 중 하나를 꺼내 그녀의 앞에 조심스레 놓아두었다.

“이게 뭐야? 기념품이라도 사 온 거야?”

질린 기색으로 버논을 바라보던 아네타는 소리 없이 제 앞에 놓인 상자를 보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네타 님께서 제게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 결과가 이거예요.”

“이게?”

아네타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제가 그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아네타 님께 선물을 드리는 거였거든요. 그걸 위해서 조금씩 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결국 그 바람마저도 아네타 님 덕분에 이루게 되네요.”

크리스는 놀라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아네타에게 물었다.

“제 선물, 받아주실 거죠?”

“네 선물 고르는 일에 어찌나 열과 성을 다하는지, 하루 종일 발품 팔고 다녔어. 질투 나는 것도 참았으니까 성의를 봐서라도 거절하지 말고 받아 줘.”

버논은 혹여 아네타가 크리스의 선물을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제 부인을 거들고 나섰다.

“그런 거라면 고맙게 받을게.”

그러나 그들의 걱정은 기우였다.

아네타는 기쁘게 웃으며 크리스의 성의를 받아 주었다.

주기만 하고 받는 건 잘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어 설득이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은 순순히 나오는 대답에 제법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크리스는 기쁨으로 인한 떨림을 가라앉히고자 두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아네타 님께서 제게 해 주셨던 말씀, 돌려드릴게요. 제게 내려진 축복처럼 소중하고 귀한 당신이 부디 행복하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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