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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106화 (106/122)

106화. 재결합 (3)

장소를 망각해 본의 아니게 러셀의 앞에서 민망한 꼴을 보인 아네타와 칼로스는 서둘러 황제궁을 벗어났다.

폐하라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 거라고 말하는 칼로스와 다르게, 아네타의 귀 끝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상기하며 끙끙대고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네타는 칼로스에게 제대로 된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아무도 없는 정원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러곤 말했다.

“칼로스. 나는 당신과 함께라면 내 앞에 어떤 일이 닥치든 거뜬히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아. 지금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당신이 내게 주는 사랑과 믿음은 지금까지 날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으니까.”

멀리 돌고 돌아온 사랑이지만, 그만큼 깊어진 사랑이었다. 더욱 간절히 서로를 원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는 그것만으로 만족 못 해. 나는 이제 당신의 모든 걸 가지고 싶어졌어. 별거 아닌 일상, 사소한 감정 하나까지도 당신과 나누고 싶어.”

지금 이 자리에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아네타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와 결혼해 줄래?”

아네타의 목소리에서는 채 감추지 못한 떨림이 묻어났다. 황제의 앞에서도 떨지 않은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로스는 그 모습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그의 대답은 그녀를 향한 마음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기꺼이.”

기다려 온 시간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말이었지만, 칼로스는 그 한 마디에 모든 감정을 담았다.

그러곤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한참 동안 사랑을 속삭였다.

정원을 벗어날 때는 손을 맞잡은 채였다. 깍지 낀 손가락을 살살 쓸어 주던 칼로스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네타. 반지는 주지 않는 거야?”

칼로스는 아쉬운 마음으로 비어 있는 그녀의 약지를 더듬었다.

“반지라면 당신이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들어서 따로 준비하지는 않았어. 꽃다발은 아마 지금쯤 공작저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너무 많아서 그쪽으로 보냈거든.”

아네타는 향이 짙은 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칼로스를 위해 준비한 꽃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굳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의 꽃을 보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모르는 채로 직접 보는 편이 더 좋을 테니까.

“만약 다른 반지를 원하는 거라면 지금 바로 맞추러 가자.”

그가 이전의 결혼반지를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따로 준비하지 않은 게 실책이었을까. 아네타는 그의 반응을 살폈고, 칼로스는 단 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떤 반지든 상관없어. 당신과 나누어 낀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는 거니까.”

칼로스의 말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었다.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만한 반지도 또 없었다. 칼로스가 직접 고른 것이었기에 더 애착이 가기도 했다.

반지 문제를 시작으로 아네타와 칼로스는 황궁을 벗어나며 여러 문제에 대해 결정을 지었다.

작게는 혼수 문제부터 크게는 거주 문제까지. 말을 꺼내는 즉시 척척 정해 버리는 모습은 언뜻 보기에는 성의 없어 보였지만, 두 사람은 선택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였다.

***

언어는 무형의 것이다. 형태가 없으니 퍼지는 것은 쉬웠다. 힘들일 것도 없이 입술만 달싹이면 끝이었으니까.

아네타와 칼로스의 재결합 소식은 굳이 알리려 하지 않아도 널리 퍼졌다.

소문이 퍼지는 일에 가장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칼로스였다.

칼로스는 아네타가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그녀에게 들러붙던 영식들의 얼굴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몸소 소문을 퍼트린 이유는 그런 이들에게 경고를 하고, 제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소식을 듣고 놀라는 이들은 몇 없었다. 대부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로스를 대하는 아네타의 태도가 변한 순간부터 예측하고 있던 결과였다.

그중 한가로운 이들은 둘 중 누가 더 아깝다는 말로 입씨름을 벌였다. 별거 아닌 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들은 할 일 없는 귀족들뿐만이 아니었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저는 절대 못 물러납니다.”

“저 역시 물러날 생각이 없습니다. 포기하시지요.”

아네타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기 싸움을 눈에 담았다.

설전의 주인공은 아데나워와 발티모어의 집사들이었다.

이사벨은 후작저로 찾아온 린든과 인사를 나누는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거주 문제부터 결혼식 장소, 준비까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일인 만큼 하나라도 더 자신들의 역할을 늘리려 하는 그들의 눈치 싸움은 치열했다.

특히 그들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문제는 거주 문제였다. 아네타는 처음 그들이 주장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이사벨은 첫 혼인 때에는 공작저에서 지냈으니 이번에는 후작저에서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린든이 아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다 못한 아네타는 두 사람에게 일정한 주기를 두고 두 저택에서 번갈아 가며 생활할 거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칼로스와 함께 결정했던 사안 중 하나였다.

그러자 두 사람은 이제 순서를 다투고 있었다.

아네타는 거주 문제로 대립하는 두 사람을 보며 자신과 칼로스가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포네라도 된 것 같다고 느꼈다.

더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아네타는 결정을 내렸다.

“일단 결혼식은 공작저에서 올리는 게 좋겠어.”

“각하!”

린든이 안색을 밝히는 것과 반대로, 이사벨은 흡사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은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아네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대신 처음엔 후작저에서 먼저 지내게 될 거야. 불만 없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사벨과 린든의 희비가 교차했다. 그러나 최대한 공평하게 내린 결정임을 알기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없습니다.”

“저도 없습니다.”

린든과 이사벨은 아네타의 결정에 순순히 동의했다.

이사벨이 신혼 초의 두 사람을 보필하게 된다면, 린든은 결혼식과 관련된 일들을 전반적으로 담당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결혼식은 칼로스와 둘이서만 조촐하게 치를까 해.”

아네타가 내린 결정들은 모두 칼로스와의 상의를 통해 내린 결정을 기반으로 한 것들이었다.

두 사람은 아네타의 청혼이 있었던 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대부분의 결정을 마쳤다. 정치를 하며 길렀던 결정력과 추진력이 발휘된 결과였다.

첫 결혼식이 필요 이상으로 호화로웠으니, 두 번째는 둘이서만 조용히 치러도 된다. 그러한 생각에서 기인된 결정은 이사벨과 린든에게 있어 청천벽력 같았다.

“재고해 주십시오, 마님.”

“결정을 물러만 주신다면 나머지는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집사들은 언제 의견 대립을 겪었냐는 듯 한마음 한뜻으로 아네타를 향해 청했다. 쉬이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기세였다.

“아네타 님, 라폴리 자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아네타를 구해 낸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집무실 문 앞에 서서 세르세의 방문을 알리는 목소리에 린든의 눈이 묘하게 번뜩인 느낌이었다.

아네타는 손님이 왔으니 이만 가 보겠다는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해야 할 것은 모두 정하고, 알려야 할 것도 알렸으니 이쯤하고 자리를 파할 생각이었다.

“이미 칼로스도 동의한 일이야. 그러니 부탁할게.”

아네타는 자리를 뜨기 전 그 말을 남긴 뒤 도망치듯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세르세의 방문을 알린 시녀에게 그의 행방을 묻자,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네타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세르세의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이야. 네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하마터면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릴 뻔했어. 크리스 결혼식 때도 안 오고.”

“그럴 만한 일이 좀 있었어.”

아네타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에 세르세는 조용히 웃었다. 더 묻지 말아 달라는 듯한 분위기에 아네타는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온 거야, 기별도 없이?”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한 잔 할까 싶어서.”

“낮부터 술친구 해 달라고 온 거였어?”

“……그래. 맞아. 친구.”

짧은 세 마디의 말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짙게 묻어났다.

아네타는 말없이 그를 지켜보다 당김줄을 당겨 시녀를 불렀다.

낮부터 술을 찾는 주인의 행동에 놀랄 법도 하건만, 시녀는 손님 앞에서 능숙하게 감정을 감춘 채 자리를 떴다.

시녀가 가지고 온 것은 특정 지방에서 올라온 호박색의 몰트 위스키였다. 그 뒤를 이어 주방장이 만들어 준 것으로 보이는 안주들이 나왔다.

투명한 아이스 버킷에 들어 있던 얼음 조각을 잔에 넣은 아네타는 능숙하게 위스키 병을 땄다.

세르세는 아네타가 제 잔을 채우자, 자신 역시 병을 건네받아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

위스키가 유리벽을 타고 오르자, 안에 있던 얼음이 달칵거리며 움직였다.

아네타와 세르세는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위스키를 넘기자 목구멍에 홧홧한 열기가 맺혔다. 특유의 씁쓰레함이 가신 입 안에서 진한 과일향이 맴돌았다.

빠르게 비어 가는 위스키 병과는 다르게, 주방장이 정성을 들여 만든 안주는 좀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술만 마셨다. 둘 다 주량으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았기에 정신을 놓을 걱정은 없었다.

“너 결혼한다며.”

세르세가 입을 연 것은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간 뒤였다.

“두문불출한다더니 그 소식은 용케 알고 있었네.”

“어제 집사에게 들었어. 축하해.”

세르세는 벌써 네 번째 잔을 비워 내며 축하를 건넸다.

독한 술을 붓고 나니 건네기 힘들 것 같던 말도 술술 나왔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술의 힘을 빌려 전하고자 한 말이 있었지만, 정신은 흐려지기는커녕 더욱 선명해졌다.

“고마워.”

그 사실을 모르는 아네타는 축하 인사를 가볍게 받아 주었다.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세르세는 수 차례 고민했다.

말할까, 말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연신 입술만 달싹이던 그는 결국 체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네타는 빈 잔을 채우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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