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재결합 (2)
“폐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데나워가는 이제 영광의 가문이 아니게 되었죠.”
아네타는 러셀이 들쑤셨던 사실을 제 입으로 재차 언급했다.
조금도 기죽지 않은 모습에 칼로스는 그녀에게 생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았다.
러셀은 여전히 입가에 삐딱한 웃음을 띤 채로 아네타를 향해 턱짓했다. 계속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아네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하게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하지만 영광이 소멸된 이후에도 아데나워는 굳건히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와 제 가문의 가치는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가문도 아데나워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재력.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자신 있게 전면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이었다.
누군가는 가진 것을 드러내는 행동을 천박하다고 여기지만, 아네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진짜 천박한 행동은 손에 쥔 것을 내보이는 게 아닌, 악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네타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제가 가진 패를 내보일 생각이었다.
“제게 무얼 보고 칼로스를 보내겠느냐고 물으셨죠?”
아네타는 품 안에서 열쇠를 꺼냈다. 이윽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케이스의 열쇠 구멍에 그것을 맞추었다.
열쇠를 돌리자 달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잠금쇠가 풀렸다.
아네타는 케이스를 열어 러셀이 있는 쪽으로 그것을 돌렸다. 그러자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의 모습이 드러났다.
“재력을 보고 보내시면 될 것 같네요.”
아네타가 러셀과의 거래를 위해 가지고 온 것은 핏빛 다이아몬드였다. 아무리 러셀이라고 해도 그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좀 놀랍군. 설마 가보를 가지고 올 줄이야.”
러셀은 제 왕관을 장식한 것보다 크고 선명한 빛을 띠는 붉은 다이아몬드를 응시했다.
타원형의 보석은 손가락 두 마디에 조금 못 미치는 크기였다.
아데나워 후작가가 소유한 앙리엔 광산에서는 주로 핑크 다이아몬드가 채굴되지만, 극히 드물게 레드 다이아몬드가 나오기도 한다.
아네타가 가지고 온 다이아몬드는 그중 하나였다. 핑크도 희귀하지만, 레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레드 다이아몬드는 그 어떤 보석보다 희소성 있고 값비싼 보석이었다.
특히 아네타가 내어놓은 것은 존재가 알려진 몇 안 되는 것들 중에서도 크기가 가장 큰 것이었기에 그 가치는 천문학적이었다.
당대의 아데나워 후작은 발견된 다이아몬드에 대륙의 심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뒤 가보로 지정했다.
덕분에 그것은 이적의 영광 못지않게 유명한 아데나워의 보물이 되었다.
이적이 사라진 지금, 아데나워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보물은 단연 대륙의 심장이었다. 그것을 내어주겠다는 태도에 러셀은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했다.
“지금 이걸 내게 주겠다는 건가?”
“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러셀은 감정이 누그러졌는지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러나 시험하듯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했다.
아네타는 그에 맞서서 단언했다.
“그럴 일 없습니다. 후회할 것 같았다면 처음부터 다른 것을 준비했을 겁니다. 아니, 그 이전에 재혼을 결심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만큼 칼로스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가볍게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가장 귀한 이를 얻으려면, 응당 가장 귀한 것을 바쳐야 한다. 아네타가 하고많은 재물 중에 굳이 대륙의 심장을 꺼내 온 이유는 그것이었다.
“전과 같은 일로 칼로스에게 상처 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 한 번만 저를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아네타는 앉은 채로 러셀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그 상태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라.”
러셀은 흡족한 듯 아네타에게 명했다.
“처음부터 내가 진심으로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역시 거래 때문인가?”
“네.”
“무엇을 요구할지 뻔하군. 보나마나 이전처럼 작위와 성을 유지하는 걸 원하는 거겠지.”
“맞습니다.”
러셀의 추측은 정확했다. 아네타는 긴 말 없이 긍정했다.
단순히 누리고 있던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러셀에게 거래를 청한 것은 아니었다.
가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피붙이가 있었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넘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네타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케이너 백작가를 제외하면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딸을 팔아넘긴 외가뿐이었다.
케이너 백작가라면 아네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일이 없겠지만, 멜렛 남작가는 아니었다. 그들이라면 아네타의 성이 바뀌는 즉시 가문을 달라며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 뻔했다.
아네타는 두 눈에 흙이 들어와도 그 꼴은 볼 수 없었다.
달란다고 넘길 그녀가 아니었지만, 조금의 여지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으니까.
러셀의 앞에서 그와 같은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아네타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꼬았던 다리를 푼 러셀은 손끝으로 팔 받침을 툭툭 두드렸다.
고민은 짧았다. 아네타의 본심을 보다 확실하게 확인했으니 더는 버티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요구도 대가에 비하면 어려울 것이 하나 없었으므로, 그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다. 성과 작위를 유지한 채 재혼하는 걸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아네타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
목적을 달성한 아네타는 러셀의 집무실을 나섰다.
아네타의 손에 이끌려 집무실 앞에선 칼로스는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밖으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네타는 멍하니 서 있는 칼로스의 앞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칼로스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왜 그런 표정이야? 분명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착각 아니야. 단지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그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거든.”
“꿈이길 바라?”
“그럴 리가 없잖아. 아네타, 정말 나랑 다시 결혼해 줄 거야?”
“할 거야. 나도 이제 당신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으니까.”
둘 중 하나만 아쉬운 관계는 옛적에 끝났다. 아네타는 그 사실을 칼로스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당신, 부케 받았잖아. 반년 안에 결혼 못 하면 3년 동안 못 한다는 말이 있는데, 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거든.”
딱히 속설을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뒤늦게 쑥스러움이 밀려든 까닭이었다.
아네타는 괜히 칼로스의 대답을 닦달했다.
“싫어?”
“싫을 리가. 좋다는 말로 표현이 다 안 될 만큼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칼로스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차오르는 고양감을 누르지 못한 그는 아네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칼로스는 아네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은 머리에서 이마로, 또 이마에서 눈, 코 순으로 진한 입맞춤을 남기며 내려갔다.
종착지는 입술이었다. 칼로스는 아네타의 입술 위에 살며시 제 입술을 포갰다.
아네타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품에 더욱 깊이 파고들자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더해졌다.
가만히 입술을 맞대고 있던 칼로스의 기세가 변한 것도 그때였다.
칼로스는 혀를 세워 아네타의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잊은 채였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아네타의 몸이 움찔 떨렸지만, 떨림은 곧 가라앉았다.
칼로스는 그녀를 달래듯 뺨을 어루만지면서도 갈급한 듯 쉼 없이 입 안을 헤집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뒤섞였다. 온몸의 감각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몸을 감싼 천 너머로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느껴졌다.
몇 번이고 시야가 점멸하며 빛이 번뜩였다. 아네타는 아찔하게 밀려드는 감각에 못 이겨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것은 그를 더 자극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칼로스는 아네타의 숨을 앗아다 제 목구멍 너머로 탐욕스럽게 삼켰다.
칼로스가 제 욕심껏 그녀의 입술을 탐하고 있던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의 시선이 문을 열고 나온 자에게로 향했다.
칼로스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린 러셀과 시선이 마주치고 나서야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자각했다.
뒤늦게 아네타에게서 떨어져 나오려 했지만, 그보다는 러셀이 문을 닫는 게 더 빨랐다.
쾅!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숨을 헐떡이던 아네타는 그제야 러셀의 집무실 문을 응시했다.
“……보셨겠지?”
“응.”
칼로스가 사실을 말하자 아네타는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서둘러 자리를 떠 주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터였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네타는 칼로스의 입가에 번진 립스틱 자국을 발견하곤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칼로스는 아네타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도 모르는 채 허리를 숙여 주었다. 그의 얼굴이 한층 더 가까워지자, 아네타는 가까스로 탄성을 삼켰다.
“지우기 아까워.”
하얀 피부 위에 번진 붉은 흔적은 몹시도 관능적이었다.
아네타는 느리게 손을 뻗어 그것을 문질렀다. 립스틱이 번진 범위가 넓어진 것은 그녀가 의도한 결과였다.
“어쩐지 이 립스틱은 나보다 당신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아네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 있는 칼로스를 향해 발돋움했다. 그러곤 번진 흔적에 또 한 번 입을 맞췄다.
***
같은 시각, 자신의 집무실 안에 갇힌 꼴이 되어 버린 러셀은 이마를 짚었다.
“어쩌다 내 신세가 이리 되었는지.”
한탄해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러셀은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다 목격하게 된 장면을 떠올렸다.
아무리 그가 아우를 아낀다고는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사절이었다.
이전에는 주인 없는 자신의 집무실 안에서 묘한 분위기로 스킨십을 하더니 안이 안 되니까 이번에는 밖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러셀은 오늘도 산통을 깨는 역할이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아 주기엔 두 사람이 괘씸했다. 어째서 매번 자신들의 연애를 직관시켜 주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두 사람을 골려 주다 허락해 줄 것을. 러셀은 혀를 끌끌 찼다.
“연애를 할 거면 제발 다른 곳에서 해라.”
오늘도 그의 한숨은 깊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