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재결합 (1)
머물던 손님이 모두 떠나가자, 아데나워 저택은 익숙한 정적에 휩싸였다. 아네타는 늘 그랬듯 홀로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양송이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수프부터 결을 살려 노릇하게 구운 크루아상, 몽글몽글하게 뭉쳐진 스크램블 에그, 마지막으로 색색의 과일과 채소가 들어간 샐러드까지. 무엇 하나 정성이 안 들어간 게 없었지만, 아침이라 그런지 그리 식욕이 돌지는 않았다.
그러나 물릴 수는 없었다. 아네타는 힐끗 이사벨을 보았다. 꼿꼿이 서 있는 그녀의 집사는 제법 단호한 눈빛을 보내왔다. 감시의 목적이 두드러지는 모습이었다.
아네타는 이사벨의 기세에 못 이겨 차례로 접시를 비워 나갔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과일 한 조각까지 입에 넣고 나서야 커트러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잘 먹었어.”
아네타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먹는 일을 그리 즐기진 않았다. 그럼에도 끼니를 꼬박꼬박 챙기는 것은 지금과 같은 이사벨의 노력 덕분이었다.
오늘도 주인의 못된 버릇과 맞선 이사벨은 말끔히 비워진 접시를 보며 흡족한 기색을 보였다.
“아. 나 오늘, 칼로스에게 청혼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그에 맞추어 준비를…… 예?”
그러던 중 들려온 말은 이사벨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리며 여상스러운 투로 꺼낸 말은 그녀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송구합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오늘 칼로스에게 청혼할 거야. 하지만 그 전에 폐하의 동의를 얻어야겠지.”
러셀의 동의가 없으면 칼로스와 재혼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 헤어지든, 다시 재결합을 하든 두 사람의 자유였고, 두 사람의 문제였다. 아무리 러셀이라고 해도 그런 문제까지 강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아네타가 굳이 러셀과 거래를 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후작가 때문이었다. 이전처럼 혼인 이후에도 성을 바꾸지 않고, 작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보통의 대가 가지고는 안 되겠군요.”
이사벨은 아네타가 긴 말을 하지 않아도 곧장 그 의미를 파악했다.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으로 인해 요동치던 감정은 어느새 잔잔한 물결처럼 가라앉았다.
“맞아. 그러니 잠시 별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바로 열쇠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긴 이사벨이 돌아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네타는 이사벨을 대동한 채 별관으로 향했다.
러셀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만큼 그 대가 또한 확실히 취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사벨의 말대로 보통의 것은 가지고 가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아네타의 걸음은 거침없이 별관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러셀이 만족할 만한 대가를 바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물건은 단 하나였다.
아네타는 그것을 꺼내기 위해서 금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은색의 벨벳 케이스였다.
“각하, 정말 그걸 폐하께 바치시려는 겁니까?”
아네타가 그것을 꺼내 들자, 이사벨은 놀라 물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데나워가의 집사로서 모를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폐하의 마음에 들려면 이것만 한 것도 없으니까.”
아네타가 집어 든 것은 별관 곳곳에 장식된 다른 물건들과는 다르게 금고에 넣어두었던 데다, 케이스에 따로 열쇠 구멍이 있을 만큼 귀중하게 보관되던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케이스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이사벨도 아닌 아네타가 따로 보관해 오고 있었다.
아네타는 주머니 안에 있는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주인의 뜻을 존중하는 이사벨 역시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아네타는 그것을 들고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무리 아네타라고 해도 황제는 만나고 싶다고 해서 바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궁이 아닌 레녹스로 향했다. 알현이 허락된 시간까지 서류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칼로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네타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인사를 나눈 아네타는 책상 앞에 앉기에 앞서 그에게 말했다.
“칼로스. 조금 있다가 나랑 같이 갈 곳이 있는데. 혹시 시간 돼?”
“걱정 마. 당신과 함께라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어디든 따라갈 테니까.”
아네타는 칼로스의 장담에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서둘러 일을 처리하는 그녀의 손은 분주했다. 그동안 칼로스는 먼저 서류를 끝낸 뒤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벌써 끝냈어?”
“당신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 두려면 서류 같은 건 일찌감치 끝내야지.”
“그럼 조금만 기다려 줘.”
서류가 끝날 때까지 붙어 있을 심산인지, 칼로스는 슬그머니 그녀의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그에 아네타는 시간을 확인했다. 곧 알현을 약속한 시간이었다.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던 찰나, 그녀는 칼로스의 얼굴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가지고 들어왔던 케이스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아네타는 칼로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러셀에게 바칠 물건이 들어 있는 케이스는 반지 케이스와 비슷한 크기였다. 그러니 그가 할 만한 생각이야 뻔했다.
사실을 말해 줄 법도 하건만, 아네타는 그럴 생각은 접어 두었다. 미리 밝히기 보다는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게다가 비록 안에 든 것은 그와 나누어 낄 반지는 아니지만, 최종적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할 예정이기도 했다.
아네타는 자신이 거절당할 거라는 전제는 애초에 머릿속에 들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아는 칼로스라면 당장 내일 혼인하자고 손을 잡아끌 사람이었다.
“칼로스.”
아네타는 여전히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는 칼로스의 시선을 끌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짓하자, 의아한 듯 그녀 쪽으로 상체를 숙이던 칼로스는 곧 제 타이를 당기는 힘을 느꼈다.
끌려가지 않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보잘것없는 힘이었지만, 칼로스는 순순히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에 대한 보상은 목마른 대지에 내린 단비처럼 찾아왔다.
칼로스의 목에 매인 천 끝을 잡고 제 앞으로 끌어당긴 아네타는 그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쪽.
일부러 낸 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아네타는 그가 채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타이를 잡은 손을 놓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는 오늘도 기습으로 당한 입맞춤에 넋을 놓고 있었다. 가만히 두면 달려들 것을 뻔히 아는 아네타는 먼저 선수를 쳐 소파를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당신이 거기 앉아 있으면 설레서 집중이 안 돼.”
칼로스는 그 말에 홀린 듯이 소파로 가 쓰러지듯 앉았다.
“정말, 이건 반칙이잖아.”
“반칙이면 어때. 어디서 들었는데, 사랑에 페어플레이 같은 건 필요 없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중얼거리는 말에 아네타는 서류를 보며 답했다.
“그 말, 누가 한 건지 궁금하군.”
“왜?”
“그자에게 뭐라도 주고 싶어졌어.”
“실없긴.”
아네타는 웃으며 도로 시선을 돌렸지만, 칼로스는 진심이었다. 지금 같은 기분이라면 누군지도 모를 그를 업고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대화를 끝으로 칼로스는 바빠 보이는 아네타를 배려해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아네타는 다행히 알현 시간 전에 서류를 끝낼 수 있었다.
“이제 가자.”
아네타는 자리를 정리한 뒤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던 칼로스는 황궁의 입구가 아닌,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네타. 가야 할 곳이라는 게 폐하의 집무실이었어?”
“맞아. 실망했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칼로스는 부정했지만, 분명 실망한 눈치였다.
아네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삼키며 모르는 척 황제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미리 알현 요청을 해 둔 탓인지, 내부에 있는 사용인들은 몇 없었다. 두 사람은 시종장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그를 따라 러셀의 집무실로 향했다.
시종장이 아네타와 칼로스의 방문을 고하자, 러셀은 기다렸다는 듯 출입을 허락했다.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차례로 인사를 올린 뒤 고개를 들었다.
“그래.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알현을 청한 거지, 아데나워 후작?”
러셀은 두 사람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용건을 물어왔다. 제게 볼일이 있는 사람이 아네타라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아직 내게 거래를 청할 사안이 남았나?”
“네.”
러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네타의 목적을 유추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손에 들린 케이스 때문이었다.
아무리 값비싼 패물이라고 해도 열쇠가 따로 있는 케이스에 보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귀한 물건일 것이 자명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온 것 같은데.”
러셀은 아네타가 들고 있는 케이스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네타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디 저희 두 사람의 재혼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이 들려오자 칼로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놀란 그는 고개를 휙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아네타는 러셀의 시선을 받아내기 바빠 그의 반응까지 신경 써 줄 겨를이 없었다.
러셀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아네타를 응시했다.
곧은 시선은 금방이라도 속내를 꿰뚫어 볼 듯 날카롭게 번뜩였지만, 아네타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반대한다면?”
러셀은 부러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후작은 내 아우에게 좋은 배우자가 되어 주지 못했지. 더는 영광의 가문도 아니니 그 이름값은 과거에 비할 수 없고.”
지금껏 누구도 그녀의 앞에서 잃어버린 영광을 들먹이며 가문의 이름을 낮추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는 달랐다. 러셀은 기꺼이 그녀를 제 발치 아래에 두고 내려다보았다.
“그런 후작에게 내가 뭘 보고 친애하는 아우를 보내야 하지?”
삐딱하게 웃으며 가슴 앞에 팔짱을 낀 그는 아네타를 압도하려 했다.
“폐하.”
“너는 가만히 있거라, 칼로스.”
칼로스는 러셀을 만류하려 했지만, 그는 아우의 발언을 막아 버렸다. 시선은 여전히 아네타에게 고정한 채였다.
“대답해 보도록, 아데나워 후작.”
러셀은 아네타의 대답을 종용했다.
아네타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그가 자신들의 재혼을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반대할 사람이었다면 반응을 떠보는 것조차 하지 않고 거절을 말했을 터였다.
칼로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나서려 한 것은 러셀의 말이 아네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리라.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네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러셀이 한 말은 그저 사실일 뿐이었다.
애초에 반대하진 않아도, 호락호락하게 허락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네타는 러셀의 말에 모욕감을 느끼기 보다는, 그 외에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강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