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귀여운 방해꾼 (13)
“…….”
아네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칼로스는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자, 본능적으로 그것을 낚아챘다. 과연 동물적인 반사 신경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때였다면 모두가 그 날랜 움직임에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핏줄이 도드라진 손에 잡힌 새하얀 부케는 신부의 손에 들려 있을 때와 다르게 너무나도 연약해 보였다. 그가 조금이라도 손에 힘을 주면 하나로 겹쳐진 꽃가지가 힘없이 툭 꺾일 것만 같았다.
“축하해, 칼로스. 부케를 잡았네.”
칼로스 역시 자신이 잡은 게 무엇인지 알고 할 말을 잃은 가운데,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아네타였다.
축하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목소리에선 웃음기가 만연했다.
“……당신 거야. 받아.”
“아니. 당신이 받은 거니까 당연히 당신이 가지고 있어야지.”
칼로스는 서둘러 아네타의 품에 부케를 안겨 주려 했지만, 아네타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고 있으니까 잘 어울리네. 누가 꽃인지 못 알아보겠어.”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로디온이 어딜 봐서 그렇게 보이냐는 얼굴로 아네타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했다.
시선을 피해 응시한 단상 위에서는 크리스가 칼로스의 손에 들어간 부케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곧 웃음을 터트렸다.
버논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그로 인해 얼굴이 붉어진 버논은 친구를 위해 상황을 정리했다. 시선을 제게로 돌리고자 행복하게 잘 살겠다는 말을 꺼낸 그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식이 마무리되자, 아네타와 칼로스는 로디온을 데리고 음식이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네타와 함께 로디온을 사이에 두고 앉은 칼로스의 무릎에는 부케가 올려져 있었다.
칼로스는 부케를 난감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마주치는 이들마다 묘한 표정으로 그와 부케를 번갈아 보는 까닭이었다.
의도치 않게 아네타에게서 부케를 가로챈 그는 그것을 그녀에게 돌려주고자 했으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아네타는 그가 건네는 부케를 받아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난감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
그때였다. 로디온이 작은 탄성을 내뱉자, 두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로디온은 불만에 찬 얼굴로 엎어진 찻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의자와 테이블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상황을 파악한 아네타는 서둘러 냅킨을 들어 흘러내리기 직전인 찻물을 닦았다. 그동안 칼로스는 로디온이 앉아 있는 의자를 안쪽으로 더 밀어 주었다.
“그러고 있으니까 공작 전하와 두 사람, 꼭 가족 같은데.”
지나가다 우연히 그 모습을 목격한 테르사는 걸음을 멈추곤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그녀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손발이 잘 맞는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테르사의 말을 기껍게 받아들인 칼로스는 아네타와 로디온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이런 느낌일까. 묘하게 아네타와 닮은 로디온을 보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눈치 빠른 로디온은 칼로스가 자신을 두고 무슨 상상을 하는지 눈치챘다.
아이는 저를 향해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칼로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네타를 향해 말했다.
“어머니.”
“왜 그러니?”
아네타는 뜻밖의 호칭에 깜짝 놀랐지만,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칼로스의 가슴에는 훈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가 더 아까워요. 아버지랑 이혼하시는 게 좋겠어요.”
“이미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는 그에게 너무 가혹했다. 아네타가 로디온의 장난을 받아 주자, 칼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파 오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 모습이 퍽 단란해 보여, 테르사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주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였지만 곧 흩어졌다.
***
로디온이 학원으로 돌아가기로 한 날은 결혼식 바로 다음 날이었다. 버논과 크리스는 아이를 배웅해 준 뒤 바로 신혼여행지로 떠날 예정이었다.
아네타와 칼로스 역시 기꺼이 시간을 내어 로디온을 배웅하기 위해 찾아왔다.
“누님, 보고 싶을 거예요. 저 없는 동안에도 건강하셔야 해요.”
로디온은 마차에 오르기에 앞서, 아네타의 앞에 서서 절절한 인사를 건넸다.
아네타 역시 보고 싶을 거라는 대답을 돌려주었지만, 아이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눈치였다.
“아무리 바빠도 일하는 중간중간에 꼭 휴식 시간을 가지고, 끼니도 거르시면 안 돼요.”
“알겠어, 로디온. 너무 걱정하지 마.”
아네타는 역할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제 손을 붙든 채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로디온, 네 형은 난데 왜 아네타 손을 붙들고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그때 버논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로디온의 곁으로 다가가 제 키의 반도 안 되는 몸을 끌어안고 우는 소리를 했다.
“내 걱정도 좀 해 줘. 형 섭섭해.”
무릎을 땅에 댄 채 동생의 애정을 갈구하며 작은 머리 위에 뺨을 부비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러운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것은 로디온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형, 이제 혼인도 한 몸인데 칭얼거리지 말고 의젓해져야지.”
로디온은 서운함을 토로하는 버논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졸지에 일곱 살짜리에게 의젓해지라는 지적까지 듣게 된 버논은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것 같았다.
“웃지 마, 칼로스.”
“그러는 당신도 웃고 있잖아, 아네타.”
버논은 아네타와 칼로스에게 웃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크리스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두 사람처럼 대놓고 웃는 건 아니었지만, 제 부인 역시 고개를 돌린 채 몰래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별까지 하고 너무하네.”
“형한테는 형수님이 계시잖아.”
“아네타에게는 칼로스가 있어.”
“아.”
로디온은 칼로스가 언급되자, 짧은 탄성과 함께 몸을 돌렸다. 칼로스는 줄곧 아이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눈은 무리 없이 마주쳤다.
“그동안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작 전하.”
“실례랄 것까지야.”
숙였던 허리를 편 로디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칼로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두 주먹에 힘을 주며 경고했다.
“아네타 누님을 힘들게 하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충격을 떨쳐 낸 버논이 어이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잘못 짚었어, 로디온. 힘들게 하는 건 대부분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버논은 턱짓으로 칼로스와 아네타를 차례로 가리켰다.
아네타는 양심상 버논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칼로스에게 저지른 행동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하지만 아네타가 어떤 식으로 그를 대했든 로디온은 영원히 변치 않을 아네타의 편이었다. 아이는 버논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하며 재차 경고를 이어 나갔다.
“울려도 안 돼요.”
“아니, 글쎄. 그쪽은 해당 사항이 전혀 없다니까. 반대라고.”
버논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퍽퍽 쳤다. 그의 행동을 본 로디온은 불신 어린 눈초리로 버논을 응시했다.
“칼로스가 아네타 때문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느라 적신 베개만 해도 수십 개는 될 걸.”
“진짜예요?”
버논이 과장스럽게 말하자 이번만큼은 로디온도 아네타를 향해 진위를 물었다. 아네타는 슬그머니 아이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여부는 굳이 본인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칼로스는 울어도 제 앞에서 울었지, 혼자 울 사람은 아니었다. 눈물마저도 하나의 무기로 삼아 기회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네타가 정답을 알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잘한 게 없으니까. 그러니 입을 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적 없으니까 이상한 말 하지 마, 버논. 영식이 믿겠어.”
결국 버논의 말에 부정한 사람은 당사자인 칼로스였다. 로디온은 그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을 듣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듯 눈을 굴렸다.
“아네타를 힘들게 할 바에야 내가 힘든 게 낫고, 울릴 바에야 내가 우는 게 나아. 그러니까 그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해라.”
그러던 때에 들려온 칼로스의 대답은 로디온의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음을 굳힌 로디온은 칼로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칼로스는 스스럼없이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제 손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손이었지만, 어쩐지 아네타와의 관계를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직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누님을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다음에 만났을 땐 영식이 아니라 로디온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래. 고맙다.”
짧지만 진심 어린 말에, 로디온은 잡은 손을 두어 번 흔들고는 도로 거두어 갔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형수님.”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넨 사람은 크리스였다. 로디온은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시간이 다 됐다며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문이 닫히기 무섭게 출발했다. 말없이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던 아네타는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떠난 로디온을 떠올렸다.
“딱 로디온 같은 자식이 있으면 좋겠는데.”
중얼거리듯 흘린 말에 칼로스는 그녀가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반가워했다.
“아네타. 우리, 지금도 늦지 않았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으며 칼로스의 가슴을 툭 쳤다.
“난 진심인데.”
칼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은근슬쩍 그녀의 곁으로 붙었다. 그러자 익숙한 듯 그의 수작들을 지켜보던 버논은 혀를 끌끌 찼다.
“어쩌면 수작이 저렇게 날이 갈수록 발전하냐. 저것도 능력이야.”
누가 저 모습을 보고 그가 아네타 외에 다른 여자는 만나 본 적도 없을 거라고 생각할까.
버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두 사람 앞으로 손을 휘저었다. 어느새 딱 붙어 버린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 그쯤하고 닭살 돋는 건 이쪽으로 양보하지? 우리가 결혼했지 너네가 결혼했어?”
버논이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말은 칼로스의 가슴에 작은 비수가 되어 꽂혔다.
칼로스는 버논을 노려보았다.
“아차. 실수.”
버논은 따가운 시선이 제 살갗을 찔러들고 나서야 자신이 칼로스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제를 건드려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하하, 잠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우리도 슬슬 떠날 준비를 하러 들어가 봐야겠어. 아네타, 칼로스. 오늘 나와 줘서 고맙고 나중에 보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버논은 결국 칼로스에게서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한 손에는 능청스럽게 꺼내 들었던 시계를, 또 한 손에는 크리스의 손을 잡은 버논은 서둘러 저택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사라진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아네타와 칼로스는 곧 시선을 마주한 뒤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우리도 갈까?”
“그래.”
아네타는 칼로스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칼로스는 스스럼없어진 행동에 기뻐하며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