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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102화 (102/122)

102화. 귀여운 방해꾼 (12)

먼동이 틀 무렵, 환하게 불을 밝힌 아데나워 저택은 어느 때보다 더 분주했다.

사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린 이사벨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크리스에게 내어 준 침실이었다.

크리스의 눈이 부어 있을 것을 염려한 그녀의 손에는 어제와 같은 얼음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배려가 무색하게도 크리스의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간 이사벨은 침구를 훑었다.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크리스가 있을 곳이야 뻔했다. 이사벨은 걸음을 돌려 아네타의 침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크리스는 아네타의 침실에서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결국 함께 주무셨구나. 평화로운 광경에 이사벨은 흐뭇하게 웃었다.

널찍한 침대 위에서 잠옷 차림으로 반듯하게 누워 자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사이좋은 자매 같았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 낼 수단이 없음에 아쉬움을 느끼던 이사벨은 얼음주머니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쉬이 볼 수 없는 주인의 모습에 기뻐하느라 직분을 잊을 뻔했다. 이사벨은 서둘러 두 사람을 깨우기 시작했다.

“각하, 남작님.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밖은 아직 어슴푸레했기에, 안으로 새어 드는 빛은 없었다.

“이제 그만 준비하러 가셔야 합니다.”

다행히 아네타는 이사벨이 또 한 번 입을 열기 무섭게 부스스 눈을 떴다.

상체를 일으킨 채로 느리게 두 눈을 깜빡이던 아네타는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사벨을 보곤 상황을 파악했다.

옆을 내려다보자, 크리스는 아직 곤히 잠들어 있었다.

“크리스, 크리스. 이제 일어나야지.”

아네타는 크리스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자다 깬 탓인지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몸이 흔들리자,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 자각 없는 모습이 영락없이 잠투정을 하는 아이 같았다.

이전에도 꾸벅꾸벅 졸다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잠들어 버리더니 아무래도 잠에 약한 게 아닐까. 안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크리스는 유독 더 그런 것 같았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어. 결혼식에 지각하는 신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

아네타의 말은 효과적이었다. 이불을 끌어모아 얼굴을 파묻으려던 크리스는 결혼식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언제 정신을 차리지 못했냐는 듯 말똥해진 눈에 아네타와 이사벨의 입가에 웃음이 걸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사벨. 나는 내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시녀들은 크리스에게만 붙여 줘.”

“괜찮으시겠습니까?”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당연하지. 시녀들에게 마음껏 솜씨 발휘하라고 전해 줘.”

“예. 그럼 가시죠, 남작님. 저를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이사벨은 크리스를 일으켜 단장 준비를 끝내 놓은 곳으로 이끌었다.

크리스가 다녀오겠다는 인사와 함께 이사벨의 뒤를 따라 나가자, 아네타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물이 차는 동안 아네타는 한쪽에 정리되어 있는 향유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탈의를 마쳤다. 그러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다, 크리스의 부재에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제 딱 한 번 같이 했을 뿐인데.’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으며 욕조 벽에 몸을 기댔다. 크리스와 함께 갈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분명 아침부터 마사지며 뭐며 정신없이 끌려 다녀야 했을 터였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아네타는 느긋하게 목욕을 즐겼다.

아네타가 목욕과 단장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에는 크리스 역시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착용할 패물이라거나 드레스는 모두 케이너 백작저에 있었기에 화장과 머리만 한 것 같았다.

“저 어때요?”

“예뻐. 버논이 보면 입이 떡 벌어지겠는걸.”

말아서 구불거리게 만든 머리카락을 반만 묶어 늘어뜨리자 크리스는 더욱 생기 있고 발랄해 보였다.

아네타는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넸다.

백작저까지 타고 갈 마차는 아네타가 미리 언질을 두었던 대로 아데나워가에서 가장 화려한 것이었다.

전면이 번쩍거리는 마차 앞에서 크리스가 우물쭈물거렸지만, 아네타는 무사히 그녀를 태우고 백작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에게 크리스를 보낸 뒤, 아네타는 홀로 식이 거행될 정원으로 향했다.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그간 했던 고생을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아네타는 잘못된 것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크고 작은 장식물까지 하나하나 세심히 훑었다. 그러다 마주친 사람은 버논이었다. 예복에 부토니에를 단 그는 아네타에게 먼저 다가왔다.

“어서 와, 아네타. 어제는 별일 없었지?”

“일이라면 있긴 있었지. 내가 크리스를 울렸거든.”

“크리스가 울었어?”

“어. 미리 말해 두지만 고의는 아니었어.”

“무슨 일인지 들어나 보자.”

버논은 예상 외로 차분했다. 아네타가 악의 어린 행동으로 크리스를 울릴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제,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빚은 내가 진즉에 다 갚았고, 지금까지 변제를 이유로 받았던 돈은 모두 돌려주겠다고 말했어. 그 돈으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는 조건으로 말이야. 그 이후로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결국 울려 버렸지.”

아네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버논의 입이 벌어졌다.

“빚을 네가 다 갚았다는 거, 정말이야?”

“사실이야. 버논 네가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차용증을 찢어 버리는 걸 내가 봤어.”

버논의 물음에 답한 사람은 아네타가 아니었다.

아네타는 자신의 바로 뒤에서 연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몸을 돌렸다.

“칼로스.”

칼로스는 아네타가 자신을 돌아보길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 모습을 잠시 꼴불견이라는 듯 바라보던 버논은 그 일이라면 크리스가 울 법도 하다고 수긍했다. 그러면서도 늘 아네타보다 한 발 느린 자신의 행동력을 한탄했다.

“내가 해 주고 싶었던 일인데. 번번이 선수를 쳐 버리네.”

“내가 선수 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닌데.”

“……뭐가 또 있어?”

한탄하던 버논은 이제 아네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어제 크리스랑 같이 목욕도 하고 한 침대에서 잠도 잤거든.”

버논은 아네타가 능청스레 꺼내 놓은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아네타는 넋을 놓은 그를 위로하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놀리는 기색이 역력하다는 걸 본인도 아는지, 그녀는 그가 원망을 쏟아 내기 전에 서둘러 발을 빼려 했다.

“우린 이만 저쪽으로 가 볼게. 하객 맞이 잘 해.”

가까스로 웃음을 참은 아네타는 칼로스를 이끌고 하객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돌아본 버논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버논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아네타는 더는 웃음을 참을 필요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줄곧 할 말이 있는 얼굴로 그녀를 따르던 칼로스가 물었다.

“아네타. 아까 했던 말, 버논 녀석을 놀리려고 그냥 한 번 해 본 말이었지?”

“목적은 그게 맞지만, 거짓말은 아니야. 식사, 목욕, 취침. 그것밖에 안 했어.”

“내겐 ‘그것밖에’가 아닌데. 당신이 날 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긍정이 돌아오자, 칼로스는 배신감에 젖은 얼굴로 아네타를 응시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겠어, 칼로스.”

“나랑은 목욕 한 번 같이 안 해 줬으면서.”

칼로스는 은근슬쩍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다 번번이 문 앞에서 내쫓겼던 기억을 상기하며 눈매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아네타의 동정심을 자극할 때마다 짓는 표정이었다.

“당신이랑 들어가면 곱게는 못 나올 테니까. 욕실은 씻는 곳이지 엄한 일을 하는 곳이 아니야, 칼로스. 억울하면 다음 생에는 크리스로 태어나던지.”

“난 다음 생에도 당신 남편으로 태어날 건데.”

“그렇게 내가 좋아?”

“좋기만 하겠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지.”

“못 당하겠다니까.”

아네타는 거침없는 사랑 표현에 백기를 들었다.

그녀는 칼로스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나도 사랑해.”

몇 번을 들어도 믿기지 않는 말과 함께 살갗 위에서 말캉한 감촉이 느껴지자 칼로스는 곧장 그녀의 뺨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의도가 빤한 행동에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다.

아네타는 칼로스의 손이 제 뺨을 감싸기 직전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칼로스가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여도 아네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어, 칼로스. 그리고 저기, 자라나는 새싹도 있고.”

아네타는 눈짓으로 로디온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다행히 로디온은 아직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힘없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칼로스는 로디온이 보이자 미련을 접어야만 했다. 가까스로 딴 점수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저쪽으로 가 볼까?”

“좋아.”

아네타는 칼로스의 제안에 따라 로디온에게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 아이는 피곤해 보이는 낯이었다.

“두 분, 언제 오셨어요?”

“방금. 그런데 로디온. 오늘따라 조금 피곤해 보이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었니?”

“형이 옆에서 잠도 못 자게 괴롭혔어요. 설레서 잠이 안 온다고요.”

로디온은 자신이 형 때문에 고생이 많다며 스스로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던 아네타는 곧 누군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찾고 있는 이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네타는 결국 로디온에게 물었다.

“고모님께서는 아직 안 오셨니?”

“안 그래도 오늘 아침 일찍 저택으로 서신이 도착했어요. 바빠서 참석 못 하실 것 같다고요.”

“서운하겠네. 뵙고 싶었을 텐데.”

“괜찮아요. 가끔 학원으로 찾아오시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네타는 씩씩하게 답하는 로디온이 대견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칼로스가 부럽다는 듯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애써 외면했다.

결혼식이 시작한 건 그로부터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하객들은 집사의 안내에 따라 바닥에 깔린 새하얀 카펫 옆으로 길게 늘어섰다.

신랑과 신부의 입장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화려한 아치 아래에 나란히 서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축복의 길을 걸었다.

예식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신랑과 신부는 하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반지를 나누어 낀 뒤, 변치 않을 사랑을 맹세하며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세상에 둘밖에 없다는 듯 한참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 부케를 던질 때가 되자,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속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저렇게 웃는 거지?”

“글쎄.”

아네타는 잘 모르겠다는 듯 대답하면서도 둘이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유추해 내는 것과 동시에, 짐작은 현실이 되었다.

크리스는 정확히 아네타를 바라보며 있는 힘껏 부케를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그것은 큰 이변이 없는 이상 그녀의 품 안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네타보다 먼저 그것을 낚아챈 이가 있었으니, 바로 곁에 있던 칼로스였다.

아네타에게 갈 것이라 여겼던 부케가 칼로스의 손에 들어가자, 식장은 한 순간에 침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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