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귀여운 방해꾼 (11)
아네타는 노곤하게 풀린 몸을 욕탕 벽에 기대며 대답을 기다렸다.
알아 두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타는 크리스에게 꽤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거리낌은 없었다. 크리스가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거기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 중 하나는 릴리에트가 데릭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아네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고모님께선 사교계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뛰어난 수재셨어. 그만큼 욕심이 있었고, 그 욕심을 감당할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 그에 비하면 내 아버지는 정반대였어. 무능력하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난봉꾼이었거든.”
데릭을 향한 아네타의 평가는 가차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으리라.
릴리에트와 데릭은 극과 극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너무도 달랐다.
거의 모든 면에서 긍정적인 쪽은 릴리에트였고, 데릭은 부정적인 쪽이었다. 행동거지뿐만 아니라 사소한 습관마저도 그러했다.
“그래서 모두가 아데나워의 차기 가주는 내 아버지가 아닌 고모님이 될 거라고 예상했었지.”
폭력적인 데릭과 이성적인 릴리에트. 집안의 사용인들이 누구를 더 신뢰하고 따랐을지는 뻔했다.
하지만 끝내 릴리에트는 차기 가주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결과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국 릴리에트의 이름 뒤에 붙은 성은 아데나워가 아닌, 케이너였으니까.
“어머님께서 가주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설마…….”
그 세대라면 아주 유력한 이유가 있었다. 크리스는 부디 그 케케묵은 이유가 아니길 바랐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그녀의 바람을 배반했다.
“그 설마가 맞아. 할아버님께서는 고모님께서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로 내 아버지를 택하셨어. 아버지는 가주 자리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고모님을 지방 귀족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내려고 했고.”
“어떻게 그 결혼을 피하신 거예요?”
“집안을 나가서 당시 연인이었던 고숙과 혼인하셨지.”
“그럼 아네타 님의 아버님께서는 연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님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신 거예요?”
“맞아.”
“세상에.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내 어머니도 사 오듯이 데리고 와서 결혼한 사람이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겠지.”
크리스의 얼굴은 이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썹을 찡그리며 연신 손부채질을 하는 모습을 보니 열이 받는 모양이었다.
“하여튼 고모님께선 그 이후로 후작저 가까이도 오지 않으셨어. 단 한 번, 내 어머니의 장례식 때를 제외하면 말이야. 치를 떠실 만도 하지.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그때야 억울하게 자리를 빼앗겼지만, 지금은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에 비하면 데릭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들이라는 이유로 릴리에트를 제친 그는 폭군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며 저보다 낮다고 여겨지는 이들 위에서 군림했었다.
여자와 술에 빠져 살았던 그로 인해 아데나워의 재산은 유례없이 큰 폭으로 줄었다.
그것만으로도 아데나워의 역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겼을 텐데, 어느 날 취한 채로 거리를 나돌아 다니다 마차에 치여 죽기까지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모든 생의 운을 가주가 되는 데에 끌어다 쓴 것이 아닐까.
아네타는 차디찬 비소를 지었다.
“할아버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셨어. 그리고 당신을 찾지 않는 딸에 대한 속죄를 손녀인 내게 하셨지. 내게는 좋은 할아버지셨지만, 결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해.”
아네타는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첨언했다.
현명한 사람이 무조건 좋은 사람은 아닌 것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네타는 조부를 보며 깨달았다.
이전의 시대상에 익숙해져 있어 그랬던 것이라는 말은 변명거리가 아니었다.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네타는 제 조부의 몇 안 되는 단점 중 하나는 그 변화에 맞추어 흘러가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네타는 한숨과 함께 그에 관한 생각을 지워 냈다. 그만 화제를 돌려도 좋을 것 같았다.
“알아 두어야 할 건 이게 끝이야. 말하고 보니 선대 남작 내외께선 어떤 분들이셨을지 궁금하네. 이야기를 들어보면 굉장히 단란했을 것 같은데.”
아네타는 크리스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보답이라며 쿠키를 가지고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어머니가 가르쳐 준 것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것을 만들어 왔다고 했었다.
함께 목욕도 하고 요리도 하는 모습은 귀족가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네타는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슬쩍 크리스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오늘 같은 날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서 크리스의 그리움을 자극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제 부모님들께선 두 분 모두 좋은 분들이셨어요. 아무리 바빠도 잠깐이라도 짬을 내서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 주셨고, 자기 전에는 늘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셨죠.”
다행히 부모님을 언급하는 크리스의 표정은 밝았다.
아네타는 안도하며 크리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두 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늘 유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계셨어요. 보고 있는 제 마음까지 편안해져서 그 모습을 닮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죠.”
부모님 이야기를 하는 크리스의 모습은 평소보다 신이 나 있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이들을 언급하면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크리스의 이야기는 목욕을 끝내고 젖은 머리카락을 말릴 때까지도 이어졌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다는 것부터, 어머니가 유독 단 것을 좋아했다는 것까지.
쉴 새 없이 재잘대는 말에도 아네타는 지루한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조용히 경청해 주었고, 때로는 질문을 건넸다.
“오랜만에 부모님 이야기를 하니까 좋네요. 유모나 오라버니 앞에선 이런 말 잘 못했거든요. 마음 아파할까 봐요.”
이야기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네타가 크리스를 제 침실로 데리고 와 손수 머리를 빗겨 줄 때였다.
“아무래도 전 부모님과 일찍 헤어질 운명이라 어릴 때 그렇게 사랑을 많이 받았었나 봐요. 부모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그 이후의 몫까지 미리 주신 게 아닐까 싶어요.”
크리스는 브러시로 제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는 아네타의 손길을 느끼며 줄곧 혼자 마음에 간직했던 말을 꺼냈다.
“지금도 두 분이 그립지만, 그래도 슬펐던 기억보다는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으니까 부모님을 떠올리는 순간에는 울기보다는 웃고 싶어요.”
제 생각을 솔직하게 꺼내놓는 것이 쑥스러운 모양인지, 발그레 물든 뺨이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살 만큼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다시 뵐 수 있지 않을까요?”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네?”
“살면서 나쁜 일은 한 번도 안 했으니까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로라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 네가 아니면 누가 가겠어.”
짓궂게 묻던 아네타는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라면 아마 법 없이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녀에 대해 아는 자라면 누구나 동의할 법한 생각이었다.
“저는 아이가 생기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제 부모님 같은 부모가 되어 주고 싶어요. 제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아네타는 굳이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답했다. 모든 부모가 제 아이에게 부성애나 모성애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크리스만큼은 자신의 부모만큼이나 아이를 사랑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아이는 반드시 너와 버논, 두 사람 모두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가지도록 해. 특히 가장 중요한 건 크리스 네 의사야. 아무리 버논이 제 역할을 잘 해낸다고 해도, 결국 아이를 품는 것은 물론 낳는 것까지 모두 네 몫이 될 테니까.”
아무리 버논이 크리스를 아껴도 그것까지 대신 해 줄 수는 없었다. 아네타는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
임신은 결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아이를 품는 순간부터 낳은 이후까지 크고 작은 신체 변화들이 무수히 일어난다. 몸이 무거워지고, 배가 부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변화에 불과하다.
그뿐이던가. 이전의 세계에서도 아이를 낳다 죽는 사례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아네타는 응당 알고 있어야 할 사실들을 크리스에게 알려 주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아 가는 크리스의 얼굴에선 놀라움이 가시지 않았다.
“부모가 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그만큼 생명의 무게가 무거운 거지. 자, 이제 다 됐다.”
아네타는 쥐고 있던 브러시를 내려놓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크리스는 거울을 통해 아네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거울 너머로 시선이 마주친 아네타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오늘따라 아네타 님이 제 부모님 같기도 하고, 또 언니 같기도 해서요. 제가 감히 이런 생각을 해도 될까요?”
“당연하지. 네가 싫다고 해도 난 이미 널 내 딸처럼, 또 동생처럼 여기고 있으니까.”
아네타는 습관처럼 손을 뻗어 크리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손길을 느끼며 크리스는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 제 머리를 부볐다.
“저는 지금껏 내가 이전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까, 라는 의심만 하며 살아왔어요. 나쁜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었죠.”
자칫하면 분위기가 무거워질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크리스는 눈물은 아까 다 흘렸다는 듯 여전히 밝은 기색이었다.
아네타는 그 모습을 보며 이어질 말을 걱정하지 않았다.ㅋ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제 곁에 있는 모든 분들이 자꾸만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줘요. 살아 있길 잘했다고 느끼게 해 줘요. 그때 모든 걸 포기했다면, 지금의 행복은 없었을 테니까요.”
예상대로 크리스는 더 단단해져 있었다. 아네타는 그 모습을 보며 장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진심으로 안도했다. 크리스가, 그리고 자신이 운명 아래 힘없이 주저앉지 않았음을.
“그중에서도 아네타 님은 버논 오라버니와 함께 제 인생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분이세요. 그래서 아네타 님이 제 행복을 빌어 주시는 것처럼, 저도 당신의 행복을 빌어 드리고 싶어요.”
크리스는 아네타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우리 이제 아픈 건 그만 해요. 아네타 님도 저도, 앞으로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네 말을 들으니까 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네.”
아네타는 생기로 반짝이는 눈을 내려다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꽉 채워진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