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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100화 (100/122)

100화. 귀여운 방해꾼 (10)

“벌써 목욕 준비가 끝난 거예요?”

아네타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크리스는 한쪽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던 옷가지를 급히 집어 들었다.

“아직. 크기가 커서 물이 차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우선 앉아.”

아네타는 크리스에게 자리를 권하며 자신 역시 맞은편에 앉았다.

크리스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봉투로 향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건 뭐예요?”

“네게 주는 선물.”

“선물은 이미 주셨잖아요. 그런데 또 주시려고요?”

난색을 표한 크리스는 아네타가 납치 사건의 보상 겸 결혼 선물로 준 혼수품들을 떠올렸다.

함께 물건을 골랐지만, 크리스는 아네타가 총 얼마를 지출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네타가 미리 언질을 해 둔 모양인지, 가는 곳마다 가격표란 가격표는 모조리 사라져 있던 탓이었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건 결코 가볍게 생각할 만한 액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두 눈으로 아네타의 재력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액수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마음이 무거운 건 사실이었다.

“저는 죄송스럽고 부담스러워서 더는 못 받아요, 아네타 님. 지금까지 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분에 넘치는 걸요.”

“부담스러워도 어쩔 수 없어. 미안하다는 말은 미리 해 둘게. 이미 내 마음대로 일처리를 끝낸 지 오래라 물릴 수도 없고, 네가 거부할 수도 없거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넌 이미 내가 줄 선물을 받았어. 그것도 오래전에, 너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아네타는 크리스의 앞으로 가지고 있던 봉투를 밀어 주었다.

크리스는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된 얼굴로 제 앞으로 내밀어진 그것을 바라보았다.

“열어 봐.”

크리스는 주춤대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내용물을 꺼내 읽어 내리던 그녀는 곧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건…….”

“우리가 버논의 소개로 다시 만났던 날, 기억하지? 그때 했던 계약과 관련된 내역서야. 원래 차용증도 함께 있어야 하지만 그건…….”

아네타는 잠시 말을 멈추곤 크리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내역서를 빼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네타는 크리스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내역서를 쭉 잡아 찢었다.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꽂히자 크리스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버논에게서 넘겨받는 순간 이렇게 만들었지.”

아네타는 말을 잇는 동안에도 몇 번이고 내역서를 찢는 걸 반복했다.

갈기갈기 찢긴 종잇조각은 그대로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네가 빚을 변제하겠다면서 꼬박꼬박 갚았던 돈들은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모아 뒀어. 처음부터 네게 돌려줄 생각으로 모은 돈이지만, 아무 조건 없이 주지는 않을 거야.”

“돌려주지 않으셔도 돼요. 빚은 시일이 조금 걸리겠지만 제 힘으로 갚고 싶고요.”

“아니, 난 돌려줄 거야. 뭐든 내 것이 아닌 것을 취하는 건 내키지 않거든. 그러니까 넌 그 돈으로 그동안 네가 하고 싶었던 걸 해 봐. 빚을 갚느라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 말이야.”

아네타는 그게 자신이 돈을 돌려주는 조건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거절은 안 받아 줄 거야.”

“아네타 님, 이건 그동안 받았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라요.”

“내겐 같아. 이건 네가 늘 꿈꿔 오던 일이잖아. 빚을 청산하고, 사랑하는 남자와 동등하게 서는 것과 남작가의 사용인들에게 안정된 환경을 제공하는 것 말이야.”

버논과 결혼하기로 결정했어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빚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네타는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걱정을 덜어 주고 싶었다.

이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로 혼자 끙끙 앓게 내버려 두는 것은 그만해야 했다.

“이전에 주었던 것들이 부하인 크리스 데번에게 주는 선물이었다면, 이건 가족이 된 크리스 케이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선물을 줄 수도 있어. 가령, 별관에 있는 롭시아의 검이라던가.”

역사 속 전쟁 영웅의 검 이야기가 나오자 크리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네타가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물건을 언급한 목적은 투명했다.

검을 원한다고 말하면 넘겨줄 용의가 있었지만, 크리스가 그걸 원할 리 없었다. 아네타는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기꺼이 이용했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 꺼내다 줄 수도 있는데. 그걸 원해?”

“그럴 리가요!”

크리스는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지극히 크리스다운 반응에 아네타는 웃었다.

“네가 그러니까 더 챙겨 주고 싶은 거야. 내가 동화책에 나오는 요정 대모처럼 널 위해 요술은 못 부려 줘도 이 정도는 해 줄 능력 있어. 너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테고.”

“알지만, 죄송해서 그러죠. 이 은혜를 다 어떻게 갚아요.”

“살면서 꾸준히 갚아. 결혼했다고 일 그만두지 말고 내 밑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면서. 가끔 나랑 이렇게 시간을 보내 주면 더 좋고. 그거면 충분해.”

아네타는 단 한 번도 크리스에게 물질적인 보상을 바란 적이 없었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말하자 크리스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내일은 네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잖아. 그러니까 짐이 되는 건 내려놓고 가. 널 위해서, 그리고 너를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네타는 물기 어린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이 응시했다.

“내 선물, 받아 줄 거지?”

아네타가 확답을 요구하자, 크리스는 왈칵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는 연신 같은 말을 반복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네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작게 들썩이며 우는 그녀를 안아 주었다.

“내게 감사하면 그만큼 더 잘 살면 돼. 나는 소중하고 귀한 네가 누구보다 행복해지길 바라거든.”

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옷이 젖었지만, 아네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크리스를 다독였다.

울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억지로 그치게 하는 것보다는 이참에 참아 왔던 감정을 모두 쏟아 내게 하는 편이 더 좋을 터였다.

크리스는 그간의 설움을 토해 내듯 울면서도 습관적으로 소리를 죽였다. 아네타는 그 모습에서 또 한 번 제 모습을 보았다.

‘이런 것까지 닮았을 줄은 몰랐네.’

홀로 서는 것조차도 힘들 나이에 모든 것을 짊어져야만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아네타는 크리스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힘에 겨워 주저앉아 있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주는 이들이 자신이나 크리스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있으니 이젠 정말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아네타는 그리 생각하며 크리스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크리스가 울음을 그친 것은 그로부터 수 분이 흐른 뒤였다. 떨림도 점차 잦아들었지만, 크리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부끄럽니?”

아네타는 그 행동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묻자, 크리스는 대답 대신 그녀의 어깨에 더욱 깊이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는 아네타에게서 떨어져 나와야 했다. 누군가가 문 밖에서 노크를 해 온 까닭이었다.

“누구야?”

“이사벨입니다, 각하.”

아네타는 제게서 떨어져 나간 크리스를 살폈다.

누가 봐도 운 티가 났지만 이사벨이라면 안으로 들여도 괜찮지 않을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크리스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도 좋아, 이사벨.”

아네타의 허락이 떨어지자 안으로 들어오던 이사벨은 깜짝 놀랐다. 내일이면 결혼식을 올릴 새 신부의 눈이 붉게 부어 있는 까닭이었다.

물론 티를 내진 않았다. 크리스의 뺨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과 젖어 있는 아네타의 어깨,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익숙한 봉투를 보고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냈을 뿐이었다.

“목욕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지금 바로 대욕탕으로 모실까요?”

이사벨은 보고도 보이지 않는 척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 가자, 크리스.”

내일은 새벽 같이 일어나 준비를 해야 하니 자기 전에 목욕을 하려면 지금 해야 했다.

아네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네.”

크리스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웃고 있었다.

아네타와 크리스는 그 길로 곧장 대욕탕으로 향했다. 각자 탈의를 한 뒤 가운을 입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까와는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욕탕 한가운데에 서 있는 네 마리의 사자 석상은 쉴 새 없이 뜨거운 물을 쏟아 냈다.

그 위로 피어오른 수증기가 춤을 추듯 허공에서 너울댔다.

아네타는 드러난 살갗에 더운 습기가 스치는 것을 느끼며 욕탕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새하얀 욕탕에선 향긋한 향유 향기가 피어올랐다.

욕탕에 들어가기에 앞서 몸을 씻어낸 두 사람은 함께 몸을 담갔다. 젖어도 안이 비치지 않는 가운을 걸치고 있음에도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 어색했다.

크리스는 이사벨이 들어와 슬며시 건네고 간 얼음주머니를 눈가에 대고 있었다.

습하고 더운 공기 탓에 얼음이 빠르게 녹아내린 것인지, 주머니는 처음과 다르게 옆으로 푹 퍼져 있었다.

“내일 일어나 보면 얼굴이 아니라 눈이 부어 있겠는데?”

“놀리지 말아 주세요, 아네타 님.”

크리스는 뒤늦게 아이처럼 펑펑 운 일을 후회하는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게 있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아, 그러고 보니 버논 오라버니에 대해 말씀해 주실 게 있다면서요?”

“누가 그래?”

눈 위에 두었던 주머니를 치우며 하는 말에 아네타는 웃었다.

“오라버니께서요. 아네타 님이 자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실지 걱정된다고 하시던데요?”

“내 앞에선 ‘크리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권리가 있는 사람이니까’라고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더니. 뒤늦게 불안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아네타는 당시 버논의 말투를 따라하며 생각했다. 이럴 때 보면 제법 귀여운 짓을 한다고.

물론 버논 앞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금물이었다. 수도 없이 물고 늘어질 테니까.

“저는 오히려 기대돼요. 제가 몰랐던 모습을 알게 될 수도 있잖아요.”

“내가 그 기대에 부응해 주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건 그냥 버논을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이었거든.”

“그랬던 거예요? 조금 아쉽네요.”

“내가 버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별로 없어. 고모님께서 내 아버지라면 질색을 하셨거든. 우리도 그 영향을 받아서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서로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않았지. 아마 나보다는 네가 더 버논에 대해 잘 알고 있을걸.”

이름뿐인 친척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아네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수면이 얕게 일렁였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우리 바로 윗대나 로디온에 관한 것밖에 없어. 그걸 듣고 싶다면 얼마든지 알려 줄게.”

어차피 가문의 내사에 관해서는 혼인 직후 케이너 백작가의 집사 입으로 듣게 되겠지만, 양가 사람 모두에게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집사보다는 아네타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었다. 사용인들이 입을 열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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