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귀여운 방해꾼 (9)
특별한 일정은 따로 없다고 말해 두었던 것처럼 아네타는 크리스와 함께 소소한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몇 번 와 봤다고는 하지만, 크리스가 걸음한 곳은 기껏해야 정원이나 아네타의 집무실, 혹은 응접실 정도였다.
아네타는 이번 기회에 몸소 그녀에게 저택 구경을 시켜 주었다.
시작은 세르세가 감탄을 금치 못했던 복도였다.
그녀가 사들인, 그리고 후원하는 이들의 그림이 벽을 따라 늘어진 복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곳이었다.
크리스는 아네타가 아끼는 그림들을 조용히 감상했다.
아네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습관적으로 어느 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적이 만들어 낸 그림들이 걸려 있던 곳이었다.
세 점의 그림은 아네타가 이 세계로 돌아온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아네타는 그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이사벨을 시켜 다른 그림을 걸어 두게끔 했을 뿐이었다.
“꼭 아네타 님만의 갤러리 같아요.”
“그래?”
이곳은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네타의 결핍을 증명하는 곳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린 그림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보이면 무조건 사들이고, 후원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었다. 아네타는 앞으로 무언가에 얽매인 채로 그림을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가능할 것 같았다.
이런 것도 성장이라면 성장이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 아네타는 웃으며 크리스에게 물었다.
“더 가 보고 싶은 곳은 없어?”
“별관에 가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늘 궁금했었거든요.”
“안 될 이유야 없지.”
아네타는 크리스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곤 자신들의 뒤를 따르던 이사벨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사벨, 준비해 주겠어?”
“예, 각하.”
이사벨은 아네타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걸음으로 멀어지는 집사의 뒷모습을 보던 크리스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사벨 집사님은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열쇠 가지러.”
“아, 평소에는 잠겨 있는 곳인가 보네요?”
“청소할 때 빼고는 늘 잠가 둬.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거든.”
단순히 별관에 가는 것에 무슨 준비가 필요한가 싶겠지만, 아데나워의 별관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마 가 보면 알 거야.”
아네타는 쓰게 웃으며 크리스를 이끌었다.
본관에서 나온 두 사람은 별관이 있는 서쪽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먼저 움직였던 이사벨이 따로 보관하고 있던 열쇠를 가지고 내려와 그 뒤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남작님께선 각하의 승계 이후 별관에 출입하는 첫 손님이 되시겠군요.”
“제가요?”
“각하께선 이곳에 아무도 들이신 적이 없습니다. 발티모어 공작 전하께서도 들어가 보신 적이 없으시죠.”
“그런 곳에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이사벨의 말에 크리스는 깜짝 놀라 아네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칼로스조차 들어가 본 적 없는 곳이라니. 궁금증이 깊어지는 한편, 조심스러워졌다.
“당연히 되고말고. 칼로스는 들어가 보고 싶다는 말을 안 해서 그런 것뿐이니까 너무 부담 느끼지 마.”
이 사실이 칼로스의 귀에 들어가면 크리스는 당분간 그에게서 질투 어린 시선을 받게 되겠지만, 아네타는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별관 앞에는 세 명의 경비가 서 있었다.
아네타가 발길을 끊은 곳이었지만, 관리와 경비는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경비를 물린 이사벨은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자물쇠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성인 주먹만 한 것이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길 여러 번, 이사벨에 의해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세상에.”
문에 가려져 있던 광경이 드러나자, 크리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별관 안은 입구부터 온갖 값비싼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데나워의 재력을 뇌리에 단단히 새겨 넣는 수준의 풍경이었다.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아네타였다.
오랜만에 별관에 발을 들인 그녀는 사방에서 번쩍거리는 것들을 눈에 담는 즉시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네타의 입술이 못마땅함에 굳게 다물린 것과는 반대로, 크리스의 입술은 놀라움에 크게 벌어져 있었다.
크리스탈을 깎아 만든 화병, 전면에 크고 작은 보석이 박힌 장식용 갑옷, 그림, 벽에 걸려 있는 화려한 가검까지.
보이는 것들 중에는 누구나 알 법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물건도 있어 눈이 번쩍 뜨였다.
크리스는 이곳에 있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제국 최고의 재력을 지녔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오히려 눈으로 확인하기 전보다 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곳이 본관이나 황궁보다 더 화려한 것 같아요.”
크리스는 순수한 감탄을 꺼냈다. 탐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맑은 눈동자를 보며 아네타는 소란했던 마음이 한층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두 선대 가주들이 모아온 것들이야. 별관은 이런 물건들로 가득 차 있지.”
홀에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자물쇠를 여러 개 달아 놓고, 경비를 세우는 이유도 그 탓이었다.
청소를 할 때도 출입이 가능한 건 이사벨이 손수 선별한 이들뿐이었다. 이사벨의 지휘와 참관은 필수였다.
아네타는 마음 같아선 별관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팔아 치우고 싶었지만, 가문의 보물이었다.
값보다는 가치를 높게 사 그대로 두었지만, 눈에 거슬리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별관에다 둔 것이었다.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아예 사용되지 않는 건가요?”
“아니. 본관의 장식품을 교체하는 데에 쓰고 있어. 몇 개만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거지.”
쉽게 말하면 금고 대용이었다. 본관이 워낙 넓은 데다, 함께 사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별관은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처럼 손님이 머물다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아네타는 크리스를 데리고 별관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그때마다 크리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아네타는 그런 크리스의 반응이 귀여워 웃었다.
“여긴 대욕탕이야.”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별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욕탕이었다.
아네타는 자신 역시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곳의 내부를 훑었다.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메말라 있는 내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름을 짐작할 수 없는 크기의 욕탕이었다.
“별관에는 이런 곳도 있네요? 이렇게 큰 욕탕은 처음 봤어요.”
크리스는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값비싼 보물을 볼 때보다 더 반짝이는 눈빛에, 아네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이사벨을 응시했다.
“이사벨. 여기, 아직도 사용 가능해?”
“그럼요. 꾸준히 관리를 해 왔으니 지금 바로 사용 가능하실 겁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아네타는 크리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에 들면 오늘 여기서 같이 목욕이나 할까? 어때?”
“저야 좋죠. 제도로 올라온 뒤로 혼자 목욕할 때마다 얼마나 심심했는지 몰라요.”
“영지에 있을 땐 다른 사람이랑 같이 했었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이틀에 한 번 꼴로 함께 했었어요. 그 외에는 유모랑 종종? 처음엔 조금 부끄러웠지만, 역시 무슨 일이든 함께 하는 게 즐겁더라고요. 아네타 님은요?”
“나는 한 번도 없어. 그래서 지금 기대 중이야.”
크리스와 다르게 아네타는 한 번도 다른 사람과 욕조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욕조 밖에서 목욕 시중을 들어주는 이들뿐이었기에, 아네타는 지금껏 대욕탕을 사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혼자 목욕을 즐기자고 저 넓은 곳에 물을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함께 즐겨 줄 이가 생겼다. 아네타는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목욕 준비는 언제까지 해 드리면 될까요?”
아네타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사벨은 안타까운 마음을 삭이며 물었다.
아네타는 대답 대신 크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제가 좋겠어?”
“자기 전에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잠이 잘 올 것 같아요.”
“그래, 그럼 그때 하자.”
아네타가 동의하자, 이사벨이 눈치 좋게 답했다.
“그럼 그때까지 물을 채워 놓겠습니다.”
“고마워.”
“별 말씀을요. 그보다도, 이제 그만 본관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을 겁니다.”
“그래. 그러자.”
아네타와 크리스는 이사벨의 의견대로 별관을 나섰다.
이사벨은 가지고 있던 열쇠 꾸러미로 다시 별관의 문단속을 했고, 문이 단단히 잠긴 것을 확인한 뒤에야 두 사람의 뒤를 따라나섰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게 될 곳이라도 열어 두는 것은 금물이었다.
식당 안은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준비가 끝났을 거라는 말대로, 식기가 세팅된 테이블 앞에 앉기 무섭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이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다들 널 위해서 실력 발휘를 한 것 같네. 많이 먹어, 크리스.”
아네타는 가까이 있던 하녀에게 시켜 크리스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앞으로 옮겨 주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식사를 시작한 크리스는 자신이 받은 정성에 보답하고자 제법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다행히 음식이 입에 맞는 모양인지, 크리스는 흡족한 얼굴로 식사를 끝냈다. 그러다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제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아무래도 저, 너무 많이 먹은 게 아닐까요? 이러다 내일 부으면 어떡하죠?”
크리스의 걱정에 아네타는 힐끗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시간은 여섯 시밖에 되지 않았으니 걱정하는 것처럼 얼굴이 붓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잘 때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
“그럼 딱 이것까지만 먹을게요.”
크리스는 때마침 후식으로 나온 딸기 타르트를 보곤 다시 포크를 들었다.
원래 밥 배와 후식 배는 따로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크리스는 타르트가 올라가 있던 접시를 말끔히 비웠다.
식사 이후에는 잠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시녀에게 크리스의 안내를 맡긴 뒤 집무실로 올라온 아네타는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크리스의 빚을 갚기 위해 지출했던 내역서였다.
차용 증서는 버논에게 받는 즉시 찢었지만, 이것만은 재산의 출납을 기록하기 위해 남겨 두었다.
처리가 끝나, 이젠 필요 없어진 내역서를 보며 아네타는 생각했다. 이제 슬슬 본인도 이 일에 대해 알아야 할 때가 됐다고.
크리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녀를 받아 준 것만큼이나 잘한 일이 대신 빚을 청산해 주는 것이었으니까.
아네타는 결국 봉투를 들고 크리스에게 내어 준 방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좋을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