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98화 (98/122)

98화. 귀여운 방해꾼 (8)

“각하, 케이너 백작가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지금 나갈게. 가자, 로디온.”

아네타는 로디온이 들고 있는 짐 가방을 대신 들어 주려고 했지만, 그 마저도 거절당했다.

아네타가 제 가방 쪽으로 뻗어 오는 손을 피해 버린 로디온은 의젓하게 말했다.

“제 건 제가 들게요.”

“아아, 장래를 약속한 상대가 있을 만큼 어리지 않아서?”

“누님!”

“알겠어. 그만 놀릴게.”

아네타는 웃으며 로디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네타의 꾸준한 놀림에 아이는 얼굴뿐만 아니라 귀까지 붉게 달아올라 버렸다.

버논이 마차를 끌고 이곳까지 온 것은 로디온을 데리고 감과 동시에 아네타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결혼식 하루 전. 아네타는 저택에서 크리스와 함께 여자들만의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그 때문에 희생된 사람은 로디온이었다.

버논은 저택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으면 외롭다는 이유로 로디온을 데려가겠다고 말했다.

집사가 널 보고 싶어 하는 데다, 하루쯤은 본가에서 머물러야 하지 않겠냐는 설득에 로디온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때 버논이 로디온의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준다는 듯 버논의 요구에 따라 준 로디온은 한껏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버논은 둘이서 아네타와 크리스 못지않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말하며 열심히 계획을 짜느라 아이의 반응을 보지 못했다.

‘아니, 차라리 못 봐서 다행인가.’

봤다면 분명 형에게 너무 차갑다며 우는 소리를 했을 게 뻔했다.

아네타는 애보다 더 애 같은 버논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로디온을 데리고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대문까지 나갈 필요는 없었다. 버논은 크리스와 함께 정원에 들어와 있었다.

아네타와 로디온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지만,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남의 저택 정원에서 한껏 분위기를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또 한 번 한숨이 나왔다.

아네타와 로디온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버논과 크리스는 두 손을 맞잡고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야 하는 연인처럼 애달픈 눈빛을 주고받았다.

“보고 싶을 거야.”

“저도요.”

“벌써부터 보고 싶은데 어쩌지?”

칼로스 덕분에 온갖 애정 표현에 익숙해져 있던 아네타였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겉모습만은 멀쩡한 버논이었지만, 분위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느끼했다.

얼굴만 잘나면 아무리 느끼한 말을 해도 멋있어 보인다던데. 가족에게는 해당 사항이 소멸해 버린 이적의 거울 조각보다 없었다.

‘이래서 가족의 연애는 실수로라도 목격하지 말아야 하는데.’

아네타는 속으로 혀를 차다가, 가족이라는 대목에서 뒤늦게 자신과 같은 광경을 보고 있을 로디온을 떠올렸다.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그녀 못지않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못 볼 걸 봤다. 아네타와 로디온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사이 버논과 크리스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네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로디온의 눈을 가려야 할까, 아니면 저 둘의 애정 행각을 막아야 할까.’

아네타가 잠시 고민에 빠진 사이, 로디온이 먼저 행동에 나섰다.

“여기 어린아이가 보고 있으니 애정 행각은 그쯤 하시는 게 어때요?”

로디온은 형과 형수의 키스 장면을 보지 않기 위해 자신의 나이를 강조했다. 어린 나이가 아니라며 부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네타는 속으로 로디온의 행동을 칭찬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크리스가 버논에게서 떨어져 나온 까닭이었다.

“어, 나왔어?”

동생 앞에서 민망한 모습을 보일 뻔했던 것과는 다르게, 버논의 태도는 뻔뻔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하는 모습에 로디온은 아네타에 이어 한숨을 쉬었다.

부끄러움은 모두 크리스의 몫이었다.

아네타와 로디온은 한마음 한뜻으로 크리스를 안타까워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도둑놈이야.”

“동감이에요, 누님.”

로디온은 아네타의 말에 동의하며 놀림을 받던 자신처럼 콕 찌르면 터져 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크리스를 응시했다.

“형수님, 정말 저희 형이랑 결혼해도 후회 안 하시겠어요?”

“네?”

갑자기 제게 말을 걸어오는 로디온의 행동에 크리스는 당황하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도망가실 수 있는 기회는 오늘뿐이에요. 내일이면 꼼짝없이 식장에 들어가야 한다고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아네타 누님께 도움을 청해서 도망치세요.”

“로디온, 그게 무슨 뜻이야?”

버논이 자신에 대한 취급이 너무하다며 우는 소리를 냈다. 누가 어른이고 애인지 모를 모습이었다.

“걱정해 주는 거 맞죠? 하지만 도망갈 일도, 후회할 일도 없을 거예요. 로디온도 알다시피 버논은 책임감 있는 사람이잖아요.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있어요.”

“역시 내겐 너뿐이야, 크리스.”

크리스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면서도 버논을 향한 믿음을 드러냈다.

버논은 유일하게 제 편을 들어주는 크리스의 모습에 감격한 듯 그녀에게 엉겨붙으려 했지만, 로디온의 따가운 눈초리로 인해 미수에 그쳤다.

“그런데 그사이에 호칭 정리를 끝낸 모양이네? 크리스가 두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는 걸 보면 말이야.”

“셋이서 외출한 날 정했어. 결혼까지 했는데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거나 사용인도 아닌데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거, 둘 다 이상하잖아. 그래서 차라리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지.”

“잘했네.”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해도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럼 크리스는 이제 내가 데리고 갈게. 로디온, 내일 보자.”

언제까지 정원에 서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아네타는 두 사람을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자 버논은 크리스를 보며 애타는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 내일 무사히 만나자.”

“왜. 내가 크리스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아네타는 죽고 못 사는 연인들을 억지로 갈라놓는 사람이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부정하지 않는 버논을 보니 더 몹쓸 짓을 저지른 것 같았다.

“크리스는 내가 내일 아침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얼른 가기나 해. 로디온이 기다리잖아.”

아네타는 여전히 짐 가방을 들고 서 있는 로디온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디온은 들고 있던 가방을 버논의 손에 떠넘겼다. 아네타를 대하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태도였다.

“누님 말씀대로 어서 가자, 형. 두 분이 함께 계실 시간도 얼마 없는데 방해하면 안 되잖아.”

로디온은 엉겁결에 가방을 받아 든 버논의 손을 잡아끌었다.

크리스는 마지못해 끌려가면서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버논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일이면 가족이 될 이들의 성격은 정말이지 각양각색이었다.

아네타는 세 사람을 바라보다 로디온과 버논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우리도 이만 들어가자, 크리스.”

“네, 아네타 님.”

아네타는 크리스를 데리고 본관으로 향했다. 문이 가까워지자, 크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조금 긴장되네요.”

후작저에 방문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묵고 간 적은 한 번도 없는 크리스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괜히 긴장하는 모습에 아네타는 웃음을 지었다.

“긴장 풀고 편하게 있다가 가. 사용인들도 다들 널 좋아하니까.”

“저를요?”

크리스는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을 하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다들 칭찬이 자자하던데. 그러니까 편하게 대해 줘. 분명 좋아할 거야.”

사용인들에 대한 말은 크리스를 배려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네타의 눈에 들어 후작가의 덕을 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 그렇다 보니 예의 바르고 심성 고운 크리스를 좋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를 주면 둘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이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그리고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묵겠어. 물론 나야 언제든 환영이지만.”

아네타는 로디온에게 그랬듯 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현관 홀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사벨이 고개를 숙여 왔다.

“오셨습니까, 데번 남작님.”

웃는 얼굴로 크리스를 반긴 이사벨은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가지고 오신 짐은 제가 침실에 올려놓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이사벨 집사님.”

고개를 숙여 인사한 크리스는 들고 있던 가방을 건네주었다. 이사벨이 가방을 가지고 계단을 오르자, 아네타는 크리스를 이끌고 응접실로 향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시녀들은 차를 내왔다.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아네타는 이전보다 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크리스의 모습을 응시했다. 결혼 준비와 함께 자세 교정도 받은 모양이었다.

“기분이 어때? 드디어 내일이잖아.”

“꿈만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이 맞은 것만으로도 신기한데 결혼이라니. 원래 이렇게 실감이 나지 않는 걸까요?”

아네타의 물음에 답하는 크리스의 얼굴은 환히 피어 있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는 듯 상기된 얼굴로 설레어 하는 것을 보니 그녀도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네 얼굴만 봐도 행복하다는 게 느껴지네.”

“모두 아네타 님 덕분이죠.”

“난 돈 쓴 기억밖에 없는데.”

“그보다 마음을 더 써 주셨잖아요.”

“누굴 닮아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버논에게는 너무 아깝단 말이야. 그냥 나한테 올래?”

“아, 저 방금 조금 설렌 것 같아요. 하지만 제겐 버논 오라버니뿐인 거 아시죠?”

버논을 칭하는 호칭이 이전으로 돌아갔지만, 크리스는 신경 쓰지 않고 아네타의 장난을 받아쳤다.

“내가 이렇게 차일 줄은 몰랐는데.”

“제가 그 청혼을 받아들이면 분명 공작 전하께서 저를 가만히 두지 않으실 걸요. 게다가 아네타 님께서 청혼하실 상대는 따로 있잖아요.”

“지금 나 놀리는 거지?”

크리스는 짓궂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눈치챘어?”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었는데, 직원을 붙들고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모습을 보고 확신했어요. 공작 전하께 청혼은 언제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그보다는 먼저 산부터 넘어야 할 것 같은데.”

“산이요?”

“그런 게 있어.”

크리스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네타는 말을 아꼈다. 아무리 뼛속까지 부려 먹히고 있어도 주군은 주군이었다.

아네타는 한 나라의 황제가 알고 보면 동생 바보라는 사실을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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