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귀여운 방해꾼 (7)
아네타는 식사가 끝나자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내려온 로디온을 데리고 황궁으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던 기사 몇이 아이의 얼굴을 알고 있어 신분을 증명하는 과정은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
아네타는 곧장 로디온을 레녹스에 있는 집무실로 데리고 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칼로스는 늘 그랬듯 아네타를 반겼다.
“아네타, 왔어? 오늘은 영식도 함께 왔네.”
“로디온이 당신이랑 이야기하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
칼로스는 로디온을 보고도 그리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이가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래? 그럼 이쪽으로 앉아.”
아네타는 능청스럽게 소파로 아이를 안내하는 모습을 보며 예상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로디온은 말없이 그가 말한 대로 움직였다.
칼로스를 대하는 태도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로디온의 시선이 아닌 척 붕대를 감아 둔 칼로스의 손을 힐끔거리자 아네타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로디온은 자신이 품은 오해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칼로스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이런 자리를 한 번 가지고 싶었는데 잘 됐어. 영식이 날 싫어하는 이유가 궁금했었거든.”
로디온이 찾아온 이유를 짐작한 칼로스는 자신이 먼저 직접적인 말을 꺼냈다.
그러자 로디온은 아네타를 바라보며 뜸을 들였다. 당시 떠돌았던 말을 당사자 앞에서 또 한 번 꺼내어 상처를 주는 게 아닌지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아네타는 제 눈치를 살피는 로디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전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자, 로디온은 시선을 아래로 깔며 입을 열었다.
로디온은 아네타에게 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꺼내놓았다.
이혼 직후 보고 들었던 것들과 그로 인해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말하자, 아이의 말을 경청하던 칼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아이가 자신을 싫어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는 듯이.
“날 원망할 만도 하네. 나라도 그랬을 거야. 하지만 그땐 사정이 있었어.”
“어떤 사정인데요?”
“아네타가 떠난 지 얼마 안 돼서 열병을 앓았어. 그래서 바깥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지.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알았다면 바로 대응했을 거야.”
“하지만 공작가에 전해지는 소식이 느릴 리 없잖아요. 제가 공작가로 직접 서신을 보내기도 했고요.”
로디온은 그때 느꼈던 감정이 아직 남아 있는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가 그 소식을 듣게 된 건 업무에 복귀하는 날 당일이었어. 집사를 비롯해서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게 전달하지는 않았지.”
“어째서요?”
상황을 지켜보던 아네타는 그 이유를 눈치챘다. 그러나 칼로스가 해야 할 말을 가로채지는 않았다. 그의 입으로 말해야 진정성을 더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아픈 몸을 이끌고 그것들을 처리하러 갈 것을 염려했다더군. 제도를 떠나 있는 아네타는 소문을 들을 수 없으니 가주인 내 건강부터 우선으로 생각한 거겠지.”
칼로스는 아네타에게 미안한 눈치였지만, 정작 아네타는 그들의 대처에 대해 아무런 유감도 없었다.
그녀는 사용인들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공작가의 사용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섭섭함을 느끼기 보다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당장 칼로스에게 깊은 믿음을 보이는 이사벨도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물론 사용인들이 내가 다 나을 때까지 손 놓고 구경만 한 건 아니야. 보이지 않게 물밑 작업을 해 두었고, 덕분에 난 복귀하자마자 바로 그 일과 관련된 이들을 처리할 수 있었지.”
저 좋을 대로 남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이들 중 제대로 된 사람은 하나 없다. 그와 같은 불변의 법칙은 그들의 비리가 수면 위로 올라옴과 동시에 더 단단히 굳어졌다.
칼로스는 곧장 그들에 대해 러셀에게 보고했다. 보고서를 받아 든 러셀은 사감이 있음을 눈치챘지만, 칼로스를 타박하지는 않았다. 그가 없는 죄목을 만들어 그들을 쳐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당시 소문의 온상지였던 이들은 사이좋게 가산을 압류당한 뒤 철창신세가 되었다.
칼로스가 나서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처리해 버리자, 터무니없던 소문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네타가 소문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당신은 어째서 내게 그 일을 말해 주지 않은 거야?”
“들어 봤자 좋을 게 없는 일이었으니까. 차라리 감추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어.”
아네타는 다시 생각해도 불쾌하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린 칼로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터였다. 어느 누구도 사랑하는 이의 귀에 그런 심한 말이 들어가길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칼로스의 설명이 끝나자, 아네타는 로디온을 응시했다. 그녀의 예상이 모두 정확하게 들어맞았으니, 남은 건 로디온이 자신의 오해를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아네타는 로디온을 닦달하지 않았다. 칼로스 역시 차분하게 아이가 생각을 마치길 기다려 주었다.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마침내 로디온은 생각을 끝낸 듯 고개를 들었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동안 제가 전하를 오해하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로디온은 칼로스를 향해 똑바로 선 뒤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안 그래도 작은 아이가 허리를 숙이니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아네타는 그럴수록 더더욱 지금 이 순간에 아이의 편을 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아야, 저렇게 누군가에게 허리를 숙일 일이 없을 테니까.
“이제라도 오해를 풀었으니 됐어. 사과해 줘서 고맙다.”
다행히 칼로스는 로디온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 굽힌 허리를 펴게끔 해 준 칼로스는 아이를 소파에 앉혔다.
“오해도 풀렸으니, 앞으로는 나를 좋아해 줄 수 있을까?”
“그거랑 이건 별개의 문제 아닐까요?”
“아네타를 닮은 네게 미움을 받으면 마음이 아파서 그래.”
금세 경계하며 벽을 치는 아이를 보며 칼로스는 아부를 시도했다. 칼로스에게 있어 아네타를 닮았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이었고, 그것은 로디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누님을 닮았다고요?”
“그래. 버논과는 다르게 말이야.”
아부는 즉각 아이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긍정이 돌아오자 로디온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애써 안 그런 척하지만, 두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뭐…… 좋아해 주는 건 앞으로 차차 노력해 볼게요.”
돌아온 대답은 긍정이라고 하기엔 애매했지만, 칼로스는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확실하게 점수를 딴 것으로 보이는 칼로스는 보며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자신의 생각보다 두 사람의 죽이 잘 맞을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
오해를 푼 로디온은 마차를 타고 먼저 저택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퇴근한 것은 그로부터 서너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세 사람은 후작저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칼로스는 이전처럼 두 사람을 챙겼고, 로디온은 더 이상 호의를 외면하지 않았다.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칼로스를 경계하던 로디온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사용인들은 애써 놀라움을 감췄다. 개중에는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공작 전하께서 무슨 수를 쓰셨구나. 그리 짐작하는 그들이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제 몫의 티푸드 접시를 비운 로디온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칼로스가 돌아가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도 않던 이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아네타는 어제 일을 떠올리며 로디온의 방으로 향했다. 곧 버논이 아이를 데리러 오기로 한 시간이었다.
방 문 앞에 서서 똑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로디온은 짐 정리에 한창이었다.
아이는 바닥에 펼쳐 둔 짐 가방 앞에 쭈그려 앉아, 손가락을 꼽아가며 빠트린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본래 사용인을 붙여 주려 했지만, 로디온은 그것을 거절했다. 자기 물건은 자기가 챙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짐은 다 챙겼니? 내가 도와줄까?”
“아니에요. 이제 정리만 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슬쩍 제안해 봤지만, 역시나 로디온은 도움을 거부했다.
아네타는 문턱에 기대어 제법 야무진 손길로 가방을 정리하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혼자 제 할 일을 척척 해내는 것을 보면 기특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로디온은 유복자였다. 고숙인 레이든이 병사한 뒤, 릴리에트는 로디온이 태중에 있음을 깨달았다.
장자인 버논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늦둥이인 데다, 앞서 말한 탄생 배경이 있었기에 모두가 아이가 응석받이로 자랄 거라고 말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버논이 레이든의 여유 있고 유들유들한 성격을 닮았다면, 로디온은 릴리에트의 강한 자립심을 닮았다.
아네타는 그것이 자라온 환경 탓임을 알고 있었다. 아이가 유독 눈에 밟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버논은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로디온은 아니었다. 버논은 어떻게든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우려 아이에게 애정을 쏟았지만, 형제의 사랑과 부모의 사랑은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로디온이 아네타에게 깊은 유대감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에게 공통된 결핍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친해졌으니까.
“버논이 결혼해서 아쉽지는 않니?”
그만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네타뿐이었다.
아네타는 아이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부모 대신이었던 형을 빼앗긴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으니까.
“아쉽다기보다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졸업하려면 적어도 6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그때까지 형더러 혼자 있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부족한 형 곁에 형수님 같은 분이 계셔 주신다면 감사한 일이죠.”
로디온은 말을 이어 가면서도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 형에게 소유권을 주장할 만큼 어리지 않아요, 누님. 벌써 장래를 약속한 상대도 있으니까요.”
“……정말?”
폭탄과도 같은 발언은 아네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요즘 애들 참 빠르다. 저도 모르게 한 생각에 헛웃음을 지은 건 그다음이었다.
“제가 누님께 거짓말을 하겠어요? 아, 형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알게 되면 분명 귀찮게 할 테니까요.”
로디온은 정리를 끝낸 가방을 닫고는 몸을 일으켰다.
깜짝 놀라게 해놓고 본인은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자, 아네타의 장난기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언제는 나랑 결혼하고 싶다더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로디온.”
“누님, 그건…….”
과거의 일을 언급하자, 로디온은 아네타의 의도대로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아네타는 그 모습이 귀여워 또 한 번 짓궂게 말했다.
“나는 아직도 네가 내 결혼 사실을 알고 엉엉 울던 모습을 기억하는데.”
“잊어 주세요.”
“그건 안 되겠어. 네가 그 아이를 데리고 오면 이야기해 줄 거거든. 설마 나한테 소개도 안 해 줄 생각은 아니지?”
“누님…….”
로디온은 아네타의 놀림에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네타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어진 아이의 얼굴을 보며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평화로운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