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귀여운 방해꾼 (6)
칼로스를 배웅하고 돌아온 아네타는 곧장 로디온이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던 시녀들은 모두 물린 채였다.
똑똑.
노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로디온은 그 틈으로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네.”
로디온은 아네타가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순순히 문 앞에서 비켜섰다.
기가 죽은 듯 축 처진 뒷모습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간 아네타는 아이를 침대에 앉히고, 한쪽에 놓여 있던 의자를 가지고 왔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고, 아이가 지내는 공간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는지부터 살폈다.
“누님, 저한테 화나셨어요?”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로디온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아니. 화가 나지는 않았어. 칼로스가 다친 건 사고였고, 너도 다칠 뻔했으니까.”
아네타는 아이와 눈을 맞춘 채 차분히 말했다. 자신을 탓하지 않는 아네타의 말에 안도할 법도 하건만, 로디온은 안색을 밝히지 않았다. 이어질 말이 있음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다만 조금 속상할 뿐이야. 나는 내가 아끼는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 주었으면 좋겠거든.”
아네타는 손을 뻗어 로디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디온은 그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그 사람을 싫어하는 거니? 칼로스가 네게 무슨 실수라도 저지른 거야?”
그런 일은 없다고 말했던 칼로스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었다. 다만,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를 수도 있기에 아네타는 물었다.
“아니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럼 왜? 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랬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분명 이혼 전까지는 이렇게 날이 서 있지 않았다. 갑자기 이러는 게 이상했다.
“그건…….”
로디온은 말끝을 흐리며 입고 있던 셔츠의 끝단을 말아 쥐었다. 입을 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아네타는 아이를 닦달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기다려 줄 뿐이었다.
“……누님께서 이혼하신 직후에 모두가 입을 맞춘 것처럼 떠들었어요. 분명 누님에게 문제가 있어서 두 분이 이혼한 걸 거라고요. 그러지 않고는 도망치듯 제도를 떠날 리가 없다면서.”
잠시 망설이며 눈치를 보던 로디온은 마침내 제 속내를 털어놓기로 결정을 내린 듯해 보였다.
아네타는 침묵을 깨고 나온 아이의 미성에 귀를 기울였다.
“떠도는 말은 많았어요. 어린 제 귀에도 누님께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석녀라느니, 애초에 잠자리를 가졌을 리 없다는 말까지 들려왔으니까요.”
아이의 입에서 나올 일이 없어야 할 원색적인 말들이 나열되자 아네타는 조금 놀랐다.
아이가 듣는 줄도 모르고 제멋대로 떠들어 댔을 족속들을 생각하니 신물이 넘어올 것 같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흐름을 끊으면 아이가 다시 말을 꺼내기 어려울 것 같아 잠자코 하는 말들을 들어줄 뿐이었다.
“하지만 공작 전하는 제가 입학할 때까지도 그 모욕적인 말들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어요. 제가 보다 못해 저택으로 서신을 보냈음에도 말이에요.”
아이의 얼굴은 말을 이어 갈수록 울듯이 일그러졌었다. 아무래도 그와 같은 일들을 겪으며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아마 로디온의 눈에는 결혼 상대였던 칼로스가 이혼 후 입을 싹 닦은 것처럼 보였으리라.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로디온이 칼로스를 원망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사랑해서 결혼한 거라면, 당연히 관계가 끝난 이후에도 지켜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땐 침묵했으면서 지금에서야 위하는 척 누님 곁에 있는 게 싫어요.”
사랑해서 결혼했다. 중점은 그게 아니었지만, 아네타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똑똑한 아이이니 별거 아닌 걸 보고 그리 생각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로디온은 어째서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네타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물었다.
“어째서 우리가 사랑해서 결혼한 거라고 생각한 거니?”
“그분이 늘 눈으로 누님을 좇고, 주변을 맴도는 걸 봤어요. 그래서 누님은 몰라도 그분은 누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로디온은 두 사람이 계약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마 누구도 아이에게 어른들의 사정을 설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그때는 집안끼리의 관계도 나빴다. 자세한 사정을 말해 줄 리 만무했다.
“우리는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야. 서로 조건을 걸고 진행한 계약 결혼이었거든.”
일곱 살 된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나 싶었지만, 애초에 그와 같은 생각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이만큼이나 꼬인 것이었다. 그것을 풀려면 진실과 거짓은 확실히 구분 지어야 했다.
아네타는 놀란 얼굴로 자신을 보는 로디온과 눈을 맞추었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아이라고 해도 결국 아이는 아이였다. 눈앞에 있는 아이를 보며 벌써 두 번째 실감하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칼로스가 소문에 대해 묵과했던 건 아무래도 사실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공작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는걸요.”
“테르사에게 듣기로는 내가 떠난 직후에 칼로스가 열병으로 며칠을 앓았다고 했어. 그래서 그랬던 게 아닐까?”
네가 없는 사이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며 해 주었던 말에는 로디온이 말한 소문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칼로스에 대한 것들은 있었다.
아네타는 그때 들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칼로스를 변호했다.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해도 사용인이 있는 이상 소문에 대해 몰랐을 리는 없었을 거예요.”
“사정이 있었을 거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귀족 몇 명의 관직을 박탈했다고 들었거든.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그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시기를 생각하면 딱딱 맞아 떨어졌다. 로디온은 아네타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학했고, 칼로스가 갑자기 관리들의 감사를 진행한 것은 그 이후였으니까.
아네타가 지금껏 몰랐다는 건 누군가가 뒤처리를 했다는 건데,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칼로스뿐이었다.
로디온은 입학 때문에 자신이 제도를 떠난 이후에 있었던 일은 몰랐을 터였다.
아네타는 입술을 오므린 채 눈을 굴리는 로디온을 지켜보았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 모양인지, 아이의 눈빛이 결심으로 굳었다.
“그럼 직접 가서 솔직하게 여쭈어 볼래요. 만약 누님 말씀대로 사정이 있었고, 모두 제 오해였다면 공작 전하께 사과드릴게요.”
다행히 로디온은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아네타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내일 누님과 공작 전하 두 분 다 황궁으로 출근하시는 건가요?”
“맞아. 함께 가겠니?”
“네. 그러고 싶어요.”
아네타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긍정하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일단 오늘 밤은 푹 쉬렴. 날이 밝으면 데려가 줄게.”
***
아침이 되자, 아네타는 늘 그랬듯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단장을 하는 동안 지난밤의 약속을 떠올리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했다.
로디온을 황궁에 데려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는 버논의 동생이었기에 신분만 증명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과연 로디온이 칼로스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을까.’
시선은 거울에 두고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아네타의 얼굴에 근심이 서리자 곁에 있던 시녀가 반응했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각하?”
“로디온이랑 칼로스 일 때문에.”
“아.”
두 사람의 이름을 동시에 언급한 것만으로도 곁에 있던 시녀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눈치챘다. 그도 그럴 것이, 로디온이 칼로스를 대하는 태도는 누가 보아도 가시가 삐죽 서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나마 칼로스가 로디온의 행동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아네타는 칼로스를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양 아이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한없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공작 전하께서는 오히려 도련님을 귀엽게 보시는 것 같았어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마 도련님이 각하와 케이너 백작님의 동생분이라 좋게 봐주시는 걸 거야. 제 말이 맞죠, 각하?”
아네타는 코코의 말을 정정하며 물어오는 릴리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로디온이 일국의 공작에게 그러한 태도를 보인 건 어느 정도 자신의 배경과 위치를 파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터였다.
준비는 밀려드는 걱정 속에서 끝이 났다. 아네타는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하다 누군가와 서 있는 로디온을 발견했다.
아네타는 계단을 내려오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이는 어제 잔을 놓쳤던 시녀 리에였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도련님.”
여전히 어제의 사고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리에는 로디온 앞에서 허리를 숙여 보였다. 어찌나 깊게 숙였는지, 머리가 땅에 닿을 것 같았다.
아네타는 인기척도 내지 않고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로디온의 반응이 궁금했다.
“나 때문에 놀라서 그랬던 거잖아.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나야.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서 미안해.”
다행히 로디온은 리에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과를 돌려주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
남몰래 그 모습을 보던 아네타는 근심을 거두었다.
로디온은 자신의 잘못을 외면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오해가 풀리면 본인이 했던 말처럼 칼로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건네리라.
“아니에요. 저도 더 조심했어야 했는걸요. 죄송해요, 도련님.”
리에는 로디온의 사과에 놀라 더 깊게 허리를 숙였다.
서로 자신이 더 잘못했다며 사과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했지만, 저대로라면 끝이 나지 않을 터였다.
아네타는 멈추었던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왔다.
구두굽과 바닥이 마찰되어 나는 소리에, 사과하느라 정신이 없던 두 사람은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누님.”
아네타를 발견한 로디온은 그녀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네타는 모르는 척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 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아네타의 물음에 리에가 무어라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로디온이 더 빨랐다.
“제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사과하고 있었어요.”
“잘했어. 이야기 끝났으면 이제 식사하러 갈까?”
아네타는 칭찬하듯 로디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리에에게 물러가도 좋다고 눈짓했다. 그러자 리에는 울멍울멍해진 눈으로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났다. 아무래도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누님, 식당까지 누님 손잡고 가도 돼요?”
“당연하지.”
아네타는 기꺼이 손을 내어 주었다.
밝은 얼굴로 그 손을 잡은 로디온은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