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95화 (95/122)

95화. 귀여운 방해꾼 (5)

세 사람이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이틀 뒤였다.

버논의 결혼식 준비로 녹초가 된 몸을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아네타는 응접실이 아닌 침실에서 칼로스를 맞았다.

로디온은 늘 그랬듯 귀신같이 알고 따라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사이 칼로스는 잠옷 위에 얇은 가운을 걸친 채 다가오는 아네타의 상태를 살폈다. 오후 늦도록 쉬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당신,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듣자 하니 남은 일까지 어제 모두 끝내 버렸다던데.”

그가 어디서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는 뻔했다. 아네타는 어제 제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이를 떠올렸다. 그는 그녀가 당장이라도 쓰러지기라도 할 듯이 굴었다.

“버논에게 들었구나?”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더라고. 당신이 너무 피곤해 보였다던걸.”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를 내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니 확실히 책상 앞에서 서류를 처리할 때보다 체력 고갈이 빨랐다.

“굳이 다음 날까지 질질 끄는 것보다는 끝낼 수 있을 때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조금 무리했어. 야외에서 하는 거라 신경 쓸 게 더 많기도 했고.”

그나마 다행인 건 초대된 하객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급하게 올리는 결혼식이라는 점을 고려한 결과였다.

“그래도 어제 다 마무리 지은 덕분에 오늘부터는 편하게 쉴 수 있잖아. 두 사람도 결혼식 전에는 좀 쉬어야 하고.”

“어쩐지 우리 결혼할 때보다 더 정성을 들이는 것 같네.”

“부정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서운해하지는 마. 그때랑 지금은 경우가 다르잖아.”

아네타는 그 역시 자신만큼이나 결혼 준비에 무심했던 과거를 언급했다. 그 일에 대한 유감은 당연히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잘 해 가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화려해도 너무 화려했어. 국혼도 그렇게까지 화려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네타는 그때의 지출 서류를 떠올렸다.

가져오는 족족 별다른 말없이 인가하긴 했지만, 일반적인 결혼식 비용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것은 그녀는 물론 동일한 서류에 서명했던 칼로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네타는 지난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그녀조차 기가 질릴 정도로 압도적인 화려함을 자랑하는 크리스털 샹들리에부터, 식기나 장식에 달린 크고 작은 보석까지. 무엇 하나 평범한 게 없었다.

그뿐이던가. 피로연 때는 수 분간 폭죽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도망가지 않은 게 용했다.

‘하긴. 그때는 도망은 꿈도 못 꿀만큼 필사적이긴 했지.’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온하고, 또 행복했다.

아버지와 에레즈의 죽음과 이적의 소멸, 원작의 틀어짐으로 이룬 결과였지만, 그녀는 몇 번이고 이와 같은 선택지를 골랐으리라.

애석함이나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들이 없어서 행복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그녀를 괴롭혔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상념에 빠진 아네타의 표정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자 칼로스는 그녀의 주의를 돌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폐하께서 관여하셨더라고.”

“폐하께서?”

“황제가 주선한 결혼인데 부족한 게 있거나, 평범하면 쓰겠냐고 하시면서 몇 가지 지시를 내리셨다더군. 폭죽도 그중 하나고.”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 폭죽, 정말 남부끄러웠어.”

그때 당시, 피로연은 곳곳에 등을 설치해 어둠을 밝힌 정원에서 이루어졌었다. 그 말은 즉, 참석한 이들 모두가 빠짐없이 그 장면을 눈에 담았다는 뜻이었다.

아네타는 그때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동감이야. 아무 말씀도 못 드리고 그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만 했지만.”

그런 와중에 들려오는 칼로스의 동의는 그녀의 웃음을 자아냈다. 피로해 보이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번지자, 칼로스는 그제야 조금 안도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차를 준비해 왔습니다.”

“들어와도 좋아.”

아네타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녀는 다구가 올라간 트레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열리는 문을 확인한 아네타는 다시 칼로스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그때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줄 알았어.”

“설마. 당황한 걸 티내지 않았을 뿐이야.”

마주 보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그와 비례하여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로디온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로디온이 평소처럼 두 사람의 대화에 훼방을 놓지 않은 건 형의 결혼식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화의 흐름은 곧 두 사람의 결혼식 이야기로 흘러갔다. 로디온은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을 꾹 쥐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과거를 회상하는 두 사람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아네타와 칼로스는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참다못한 로디온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불행히도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아!”

한쪽에서 차를 따른 뒤, 각자의 앞에 찻잔을 놓아주던 시녀는 불시에 몸을 일으키는 로디온의 행동에 놀라 들고 있던 잔을 놓치고 말았다.

지척에 있었기에, 그 찻잔은 바로 로디온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 했다.

칼로스는 그 모습을 보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뻗은 손은 아이가 뜨거운 찻물을 뒤집어쓰기 직전에 찻잔을 쳐냈다.

사람이 없는 반대편으로 쳐내진 찻잔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로디온은 파열음이 들려도 멍하니 서 있었다.

“괜찮아?”

아이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칼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였다.

로디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깜짝 놀라서 덩달아 몸을 일으켰던 아네타는 칼로스가 뒤로 감춘 손을 잡았다.

잡은 소매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손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리에, 로디온을 부탁해. 그리고 당신은 어서 이리 와.”

아네타는 급히 칼로스의 반대편 손을 잡아끌었다.

“난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네타.”

“난 안 괜찮아. 그러니까 어서.”

아네타의 말에는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는 칼로스는 결국 그녀의 재촉에 못 이겨 몸을 움직였다.

아네타 못지않게 놀란 얼굴로 붉어진 손을 보던 로디온과 시선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괜찮아.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린 그는 곧 아네타의 손에 이끌려 욕실로 들어갔다.

아네타는 곧장 차가운 물을 틀어 그 아래로 칼로스의 손을 이끌었다. 차디찬 물이 달아오른 손을 식혀도, 굳어진 그녀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저 아이가 다치면 당신이 걱정할까 봐 그랬어.”

칼로스는 묻지도 않은 말에 변명하듯 말했다.

“그런 걸 걱정할 거였으면 당신도 조심했어야지. 당신, 일부러 능력을 사용하지 않은 거지?”

“들켰어?”

“어. 당신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창공의 능력을 사용했을 테니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어 주지 않을까 싶어서. 더불어 당신 걱정도 받고.”

아네타의 예상은 적중했다. 칼로스는 순순히 제가 의도한 바를 실토했다.

아네타는 한숨을 쉬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탄했다. 자신은 놀라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밖에 하지 못하던 때에 그는 순간의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물론 잔을 쳐내기까지 했으니까.

입지 않아도 될 상처를 부러 입었다는 말에 속이 타는 것과 별개로 그의 능력이 특출하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로디온의 마음을 얻고 싶은 것도 알겠고, 내 걱정을 받고 싶은 것도 알겠어. 그 마음 이해하는데, 제발 당신 몸 상하게 하는 짓은 하지 마.”

“왜?”

“왜긴. 몰라서 묻는 거야?”

“아는데,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묻는 거야.”

“……당신 다치는 게 걱정되고 싫어. 내게 있어서 당신은 이제 목숨만큼 소중한 사람이니까.”

아네타는 속상한 얼굴로 찻물에 젖은 그의 소매를 조심스레 걷어 올렸다. 붉게 달아오른 것은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네타는 칼로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다친 와중에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다쳐 놓고 웃긴 왜 웃어?”

“좋아서. 당신 걱정 받으니까 행복하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로스는 허리를 굽혀 아네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화는 그만 내달라는 듯한 행동에 아네타는 결국 그를 따라 웃고 말았다.

이쯤이면 되겠다 싶을 때 아네타는 물줄기 아래에 있던 칼로스의 손을 제 앞으로 끌고 와 꼼꼼히 살폈다. 수포가 잡히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의원을 부를 테니까 진찰 받아 봐. 겉으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여도 화상은 관리를 잘 해야 해. 알겠지?”

“알겠어.”

아네타는 그의 손에 대고 후, 하고 숨을 불었다. 물에 젖은 손등 위를 스치는 숨결에 칼로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아네타. 그건 조금 위험한데.”

“……칼로스. 당신 일상생활 가능하지?”

“가능하긴 하지만, 간혹 당신 때문에 아주 곤란할 때가 많지. 지금은 그중 하나고.”

아네타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칼로스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렸다.

제 손을 잡고 있느라 그녀의 손에도 묻은 물방울이 흘러 손목으로 향하자, 그것을 입으로 훔치는 그였다.

도드라진 뼈 위의 움푹 패인 곳에 말랑한 입술이 닿자 묘한 감각이 허리께를 타고 올랐다.

“그만. 당신 지금 환자야.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아네타는 칼로스가 살갗 위로 은근히 입술을 미끄러뜨리자 그에게 잡힌 제 손을 거두었다. 이윽고 수건을 가지고 와 물기를 닦아 주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욕실 밖으로 나오자, 리에가 불러온 것인지 다른 시녀들과 의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네타는 의원에게 칼로스를 맡긴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디온은 어디 갔어?”

“많이 놀라신 것 같아서 침실로 모셔다 드렸습니다.”

“잘했어.”

로디온을 찾아가 보는 건 칼로스가 돌아간 이후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그리 생각하던 찰나, 리에가 무릎을 꿇어 왔다.

“다 제 불찰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니 일어나도록.”

아네타가 바라는 대로 의원에게 손을 보이던 칼로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시녀를 보며 말했다.

아네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엔 리에에겐 잘못이 없었다.

“어떤 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네게 내릴 벌은 없어. 나도 칼로스와 같은 생각이거든.”

아네타는 스스럼없이 칼로스의 말에 동의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엔 그저 타이밍이 나빴을 뿐이었다.

주인이 나서자, 리에는 그제야 조금 진정된 모습을 보였다.

아네타는 시녀 몇 명과 함께 리에를 내보냈다. 잘 달래 달라는 말과 함께였다.

닫힌 문 너머로 시녀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아네타는 의원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그는 칼로스의 손등에 차가운 수건을 올려 주고 있었다.

“상태는 어때?”

“붉어진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이상이 없습니다.”

“다행이네.”

검을 다루는 칼로스에게는 이 정도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네타에겐 아니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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