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94화 (94/122)

94화. 귀여운 방해꾼 (4)

동행을 거절당한 칼로스는 조용히 아이의 의사를 따라 주었다.

다시 입술을 달싹이는 아네타에게 또 한 번 고개를 저어 보인 그는 아네타의 마차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그러나 칼로스가 그리도 순순히 물러나는 것은 첫날 단 한 번뿐이었다. 계속 로디온에게 맞춰 주었다간, 아이가 돌아갈 때까지 아네타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그는 하루라도 아네타를 보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칠 것 같은 사람이었기에, 아이를 위해 물러난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 두었다.

칼로스는 아데나워 저택에서 머무르는 로디온이 자신의 방문을 못마땅해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택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로디온은 하던 일도 미루고 달려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만의 시간을 기대하며 찾아왔던 칼로스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가시 같은 눈초리가 날아와 박혀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주, 그리고 오래 자리를 지키다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가 로디온의 눈에 고와 보일 리 없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로디온에게 칼로스는 못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를 보면 언제나 다른 이들이 아네타를 향해 떠들어 대던 말들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탓에 날이 갈수록 그를 대하는 태도는 날이 섰다.

“오늘도 오셨네요.”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매일같이 이곳에 출석 도장을 찍느냐는 뜻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는 말이 날아들어도 칼로스는 아무렇지 않았다.

칼로스는 온갖 악의와 살의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런 그에게 아이의 감정은 아무런 변화도 줄 수 없었다.

만약 로디온이 버논과 아네타의 동생만 아니었다면 귀엽다는 생각을 하는 것까지는 가능했어도, 그 이후로는 완전히 관심을 끊어 버렸으리라.

칼로스가 자신을 상대해 주는 것이 이례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로디온은 착실히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었다. 그때마다 칼로스는 싫은 내색은커녕 살뜰하게 두 사람을 챙겼다.

그러다 하루는 칼로스의 방문 소식만 들리면 부리나케 달려오던 로디온이 보이지 않았다.

칼로스는 의아해하며 아이의 소식을 물었다.

“아네타. 오늘은 로디온이 보이지 않는데.”

“로디온은 버논이 데리고 갔어. 크리스랑 셋이서 시간을 보내다 오겠다고 하던걸.”

“그럼 우리도 나가서 식사나 하고 올까? 당신만 괜찮다면 말이야.”

칼로스는 에스코트를 청하듯 아네타의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나 혼자 당신을 독점하는 시간도 필요한 것 같아. 요즘은 통 그럴 시간이 없었고.”

어서 제가 내민 손을 잡아 달라며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아네타는 외면할 수 없었다.

“좋아. 로디온도 저녁 늦게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오래 나가 있지는 못하는 거 알지?”

“식사할 시간만 충분하다면 괜찮아.”

아네타가 그 위로 제 손을 얹자, 칼로스는 행여나 그녀가 말을 바꿀세라 그 손을 감싸 쥐었다.

엄지로 손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아네타와 칼로스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래로 내려갔다.

아네타는 그와 계단을 내려오면서 줄곧 궁금했지만, 로디온이 있어 묻지 못했던 질문을 꺼냈다.

“당신 말이야. 혹시 나 없는 사이에 로디온이랑 무슨 일 있었어?”

그녀가 말하는 시기는 원작의 힘 때문에 여행이라는 변명을 대고 억지로 제도를 벗어났을 때였다.

그때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입 안이 껄끄러웠지만, 아네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로디온을 만난 건 걸음마 시작할 때랑 한창 말 배울 때뿐이야. 당신이 없을 땐 얼굴도 못 봤으니 실수할 새도 없었지.”

칼로스 역시도 그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영 달갑지만은 않은지,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답했다.

“그럼 로디온이 왜 그러는 거지? 당신에게 지나치게 날이 서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야.”

“내게 생각이 있으니 일단은 나를 믿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혼내는 것보다는 내게 세운 벽을 허무는 게 우선인 것 같거든.”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아네타는 칼로스라면 알아서 잘 해결할 거라고 생각하며 물러났다. 그에게도 생각이 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사과는 하게 해 줘. 미안해. 지금은 내가 대신 말하지만, 다음엔 로디온이 직접 사과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좋겠네.”

“괜찮아. 불쾌하지 않고, 그저 귀엽게 느껴질 뿐이니까. 무엇보다 묘하게 당신을 닮아서 무슨 말을 해도 기분 나쁘지 않아.”

로디온은 어머니 릴리에트를 통해 외가인 아데나워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것인지, 아네타와 닮은 얼굴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버논이 아닌 아네타의 동생이라고 해도 믿을 터였다.

“날 싫어하는 게 아쉬울 뿐이지. 당신 닮은 아이한테 미움 받는 거, 참 가슴 아픈 일이야.”

장난만큼이나 진심을 담은 말을 하며 칼로스는 제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아네타는 웃으며 그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얽힌 손가락 사이로 서로의 온기가 느껴졌다.

“각하, 외출하십니까?”

이사벨을 마주친 것은 계단을 모두 내려와서였다.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곧 입매와 함께 흐뭇하게 휘었다.

“식사만 하고 돌아올 거야. 나보다 로디온이 먼저 돌아오면 말 좀 전해 줘.”

“예. 걱정 마시고 즐거운 시간 보내다 오시길.”

이사벨은 걸음을 뒤로 물리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보다 먼저 문턱을 밟은 이가 있었으니,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버논과 로디온이었다.

“아네타, 칼로스.”

“버논. 저녁 늦게 온다더니 일찍 왔네?”

“이 녀석이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성화를 부려서 어쩔 수 없었어. 자기 집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서두르는지.”

버논이 눈짓으로 제 손을 잡고 있는 로디온을 가리키자, 두 사람의 시선도 그리로 옮겨갔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음에도, 정작 아이는 칼로스에게 잡힌 아네타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손까지 잡고 어디 가는 거야?”

로디온도 발견한 걸 버논이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이 저택을 나서려 했다는 걸 알고 목적지를 묻는 목소리는 짓궂었다.

“저녁 먹으러 잠깐 나갔다 오려고 했지.”

“그럼 갔다 와. 이 녀석이랑은 내가 함께 있어 줄 테니까.”

버논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봉투를 꺼내 흔들었다. 그것은 그가 하루 종일 손에서 놓지 않고 틈날 때마다 보았던 서류였다.

“너 올 때까지 여기서 서류나 봐야겠다. 가뜩이나 아네타 너한테 진 빚도 많은데 형제가 나란히 데이트까지 방해할 수는 없잖아?”

버논은 자신들의 등장에 난처한 기색을 보이는 두 사람을 배려하며 로디온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버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디온의 입술이 열렸다.

“싫어.”

“로디온.”

“나도 갈래. 나 배고파.”

“너 아까 저녁 식사했잖아. 배부르다고 할 때는 언제고 또 배가 고프다고?”

버논은 제 동생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혀를 찼다. 그러나 버논의 어이없다는 말에도 로디온은 재차 말했다.

“배고프니까 나도 누님 따라갈 거야.”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누님은 데이트를 하고 싶으시댄다. 우리가 협조해야지. 고이 물러나자. 정 배가 고프면 형이 간식거리라도 부탁할 테니까. 응?”

버논은 동생을 잘 타일러 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로디온은 버논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형은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 바쁘다며.”

고집을 꺾지 않을 기세인 로디온을 보며 버논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난감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네타는 꼬여 버린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이미 칼로스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는데, 아이가 따라가면 지금까지와 다를 게 없었다.

자신들 때문에 발이 붙들린 두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낀 버논은 미간을 찌푸렸다.

생전 부리지도 않던 고집을 부리는 동생을 보며 쓴소리를 하려던 찰나, 칼로스가 나섰다.

“가고 싶으면 가야지.”

“너, 정말 괜찮겠어?”

버논이 놀라 물었다. 아네타도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버논과 같은 걸 묻고 싶은 얼굴로 칼로스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그러니까 새신랑은 돌아가서 편하게 일해. 결혼식도 닷새 남아서 발등에 불 떨어졌을 거 아니야.”

칼로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디온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쪼르르 달려와 그가 잡고 있던 아네타의 손을 가로채 갔다.

버논이 엄한 표정으로 로디온을 바라봤지만, 아이는 아네타의 뒤로 숨었다.

아네타는 미안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의 버논에게 칼로스의 말을 따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네 사람은 함께 저택을 나섰다. 황궁으로 다시 돌아가 봐야 하는 버논은 마차에 오르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로디온. 무례하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거 명심해.”

버논의 당부에 로디온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곧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형에게 핀잔을 들은 것이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저 녀석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잘 부탁해.”

“걱정하지 마.”

한숨을 삼킨 버논은 그 길로 마차를 타고 떠났다.

아네타와 칼로스는 로디온을 데리고 마차에 올랐고,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세 사람이 들어가자 일전에는 보지 못한 조합에 시선이 모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흩어졌다.

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방은 남아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직원이 로디온의 키에 맞는 의자를 가져다주는 동안 오가는 말은 없었다.

“먹고 싶은 게 있니, 로디온?”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튼 사람은 아네타였다.

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몰아내고자 아이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배가 고프다는 로디온의 말을 믿어 주는 척하기 위해서였다.

“여기는 안심 스테이크가 맛이 좋던데.”

칼로스는 그녀의 노력에 편승하여 메뉴를 추천했다. 그나마 가장 양이 적고 부드럽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로디온은 지금껏 그래 왔듯 칼로스의 선의를 거부하기 위해 고개를 저으려는 기색을 보였고, 그를 눈치챈 아네타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맞아. 지난번에 와서 먹었을 때 맛있더라. 나도 그걸로 주문해야겠어.”

로디온이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제 앞으로 나온 음식을 모두 먹을 아이였다. 꾸역꾸역 먹다가 체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에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저도 누님과 같은 걸로 할게요.”

아네타가 나선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로디온은 언제 거절하려고 했냐는 듯 그녀의 결정을 따랐다.

절대 당신이 추천해서 먹는 것이 아닌, 아네타와 같은 것을 먹기 위해서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각자 메인을 정하자, 로디온은 아네타에게 붙어 음료와 후식 고르는 걸 도와달라고 졸랐다.

고민하는 척하며 의도적으로 칼로스를 대화에서 배제했지만,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단번에 눈치챘다.

칼로스는 아네타의 시선이 제게 닿자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안도한 아네타가 로디온의 요구에 응해 주자, 칼로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턱을 괴었다.

여전히 아이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다만, 얼마 남지 않은 기한 내에 저 아이가 가진 적의를 어떻게 누그러뜨릴지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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