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귀여운 방해꾼 (3)
아네타는 크리스의 결혼 준비를 돕는 동안 반가운 이의 서신을 받게 되었다.
버논의 결혼 소식을 듣고 연락을 취해 온 이는 제도에 머무르는 동안 아데나워 저택에서 머물게 해 줄 것을 청했다.
서신이 오가기에는 남은 시일이 얼마 되지 않으니, 허락한다면 제도 입구에 사람을 보내 달라는 부탁을 아네타는 받아 줄 생각이었다.
“그 녀석, 네 저택에서 지내겠다고 했다며?”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려고.”
“염치없지만 잘 부탁해. 자꾸 부탁만 해서 미안하네.”
“너 예뻐서 받아 주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가서 눈이라도 좀 붙여. 그러다 쓰러져서 일정 물거품 돼도 난 모른다. 신혼여행, 무슨 일이 있어도 갈 거라며.”
아네타는 자신 역시 서신을 받았다며 찾아온 버논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버논은 서류 처리와 결혼 준비를 동시에 하느라 제대로 휴식을 취할 시간조차 없어 보였다.
이곳에 온 것도 없는 시간을 쪼개어 온 것이리라. 아네타는 그가 저택에서 머물 손님과 관련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길 바랐다.
“그래. 그래야겠다. 힘들어 죽겠어, 요즘.”
“그러게 내가 뭐랬어. 날짜 미루자는 걸 거부한 사람은 너야.”
자업자득이다. 버논에겐 그리 타박했지만, 척 봐도 거칠어진 피부나 거뭇한 눈가를 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
서신에 적힌 날짜가 되자 아네타는 서둘러 얼마 안 되는 서류를 처리했다.
사용인들에게 저택에서 머물 손님에 대한 언질을 해 두긴 했지만, 마중을 명하지는 않았다. 아네타는 몸소 손님을 마중하러 갈 예정이었다.
도착 시간보다 늦으면 길이 엇갈릴 수도 있기에 아네타는 수시로 시계를 확인하며 바쁘게 손을 놀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네타는 마지막 서류에 서명을 할 수 있었다.
“아네타. 오늘은 데번 남작과의 약속이 없다고 들었는데, 당신만 괜찮다면 오랜만에 데이트나 할까?”
그녀의 손이 깃펜을 놓기 무섭게 입을 연 것은 칼로스였다.
일찌감치 할 일을 끝내고 앉아 있던 그는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눈으로 좇다 기다렸다는 듯 물었지만, 아네타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미안해, 칼로스.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그건 안 되겠어.”
그녀는 책상 위를 정리하기 위해 뻗었던 손을 잠시 멈추고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 봐야 할 곳이라니?”
“저택에서 지낼 손님을 마중하러 가야 하거든.”
“당신이 직접?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까지 해?”
칼로스는 아네타의 지인들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누군가를 특별히 가까이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생각나는 건 모두 제도에 있는 이들이었다.
“있어. 멋진 신사 한 분.”
“나보다?”
의문에 차 있던 칼로스의 눈에 불이 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손님이라는 자가 저택에서 머무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네타가 호감까지 표하자 칼로스는 질투를 감추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엔 당신보다 더 근사해질지도 모르지.”
힐끗 칼로스의 표정을 살핀 아네타는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그 짓궂음에 칼로스가 넘어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누구인지 궁금해지네. 실례가 안 된다면 나도 함께 가도 될까?”
기필코 그자의 얼굴을 보고 말리라는 다짐이 묻어나는 표정에 아네타는 잠시 고민했다.
‘뭐, 서로 아는 사이니까 상관없나.’
서로 얼굴은 몇 번 못 봤겠지만 괜찮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아네타는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당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칼로스는 긍정이 돌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가겠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누가 오는 건지 말해 줄 수는 없는 거야?”
“궁금해?”
아네타는 칼로스가 뒤따라오며 묻는 말에 반문했다.
“당연히 궁금하지. 당신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질투 나.”
하물며 아네타는 칼로스에게도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칼로스는 자신의 질투가 정당하다고 여겼다.
“내가 크리스 못지않게 아끼는 사람이야. 누구인지는 가서 직접 확인해 봐.”
아네타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칼로스는 손님이라는 자가 자신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사실과 일치하는 추측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칼로스는 끝내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마차는 몇 시 도착 예정이야?”
“예정대로라면 15분쯤 뒤에.”
회중시계를 꺼내어 확인한 시간은 11시 30분.
아네타는 마차가 설 자리로 향했고, 칼로스는 그녀의 곁을 지키고 섰다.
멀리서 마차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예정 시간에서 수 분이 지난 뒤였다.
특유의 뛰어난 시력으로 아네타보다 먼저 마차를 발견한 칼로스는 손을 들어 가까워지는 몸체를 가리켰다.
“저기 오는 것 같네.”
아네타는 칼로스의 손끝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자, 그제야 작은 점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아네타는 그것이 칼로스가 말한 마차임을 깨달았다.
“저걸 용케도 발견했네.”
보통 사람보다 시력이 좋은 건 알았지만, 그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새삼 감탄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동색으로 칠해진 마차는 부드럽게 그들 앞에 멈추어 섰다. 마차 하나를 통째로 빌렸는지, 위에 실린 짐은 한 사람 것밖에 없었다.
칼로스는 마부가 내리는 짐을 면밀히 살폈다. 가방의 크기가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래 머무를 것 같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누가 아네타를 찾아왔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칼로스는 노려보듯 문을 바라보았고, 때마침 짐을 내려 둔 마부가 목소리를 내어 도착을 알렸다.
“손님, 제도에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알림을 기다렸다는 듯 문은 바로 열렸다.
칼로스는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조금씩 벌어지는 문틈을 응시했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은 어린아이였다.
예상치 못한 상대에 칼로스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당황하는 와중에도 그의 눈은 빠르게 아이의 외양을 훑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다 싶던 찰나, 그의 머릿속에 친우의 얼굴이 스쳤다.
“로디온 케이너?”
칼로스는 아주 어릴 때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였던 아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가 친우의 동생을 알아보는 것과 동시에 아네타의 입이 열렸다.
“이쪽이야, 로디온.”
아네타가 로디온이라고 부른 아이는 일곱 살의 나이로 수재들만 간다는 알버릭 학원에 조기 입학한 영민한 아이였다.
짐 가방 옆에 서서 자신을 데리러 왔을지도 모르는 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로디온은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렸다.
“누님?”
놀란 표정은 곧 환한 미소로 바뀌었다. 가방도 챙기지 않은 채 서둘러 앞으로 다가온 아이는 상기된 얼굴로 아네타를 올려다보았다.
“절 위해서 직접 마중까지 나와 주신 거예요?”
“그래. 입학할 때 배웅도 못 해 줬는데 마중 정도는 당연히 나와야지.”
“그럼 저, 아데나워 저택에서 지내도 되는 건가요?”
“얼마든지. 부담 가지지 말고 머물고 싶을 때까지 머물러도 돼.”
“감사합니다!”
로디온은 아네타의 허락이 떨어지자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그를 보던 칼로스는 아네타가 했던 말을 되짚었다. 아네타가 알버릭 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제도를 떠난 아이의 배웅을 하지 못했던 것은 이혼 직후 여행을 떠난 까닭이었다.
그 일의 일정 부분에는 제 탓도 있는 것 같아, 칼로스는 두 사람의 재회를 방해하는 대신 아이가 두고 온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아네타가 애정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에게서 점수를 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저분은…….”
로디온은 잊고 있던 가방을 가지고 온 칼로스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방긋방긋 잘도 웃던 얼굴은 칼로스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굳었다.
“아. 인사하렴, 로디온. 칼로스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네타가 지켜보는 가운데, 로디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를 지켜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영광을 뵙습니다. 케이너 백작가의 로디온 케이너입니다.”
영특하다는 소문답게 로디온의 인사는 흠잡을 곳 없었다. 고위 귀족의 정점에 선 이를 마주하는 모습은 이미 관직에 오른 귀족들 못지않았다.
아이가 작은 몸을 숙이자,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칼로스는 인사를 받아 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도 호의적이지 못하다는 걸 눈치챈 그였다.
“그런데 두 분은 무슨 이유로 함께 계시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당돌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로디온을 보며 아네타는 고민했다. 요즘 통 붙어 있을 시간이 없어 자투리 시간에라도 함께 있는 거라는 말을 아이에게 해서 무엇 할까.
“정식으로 다시 만나 보기로 했단다.”
결국 아네타는 뭉뚱그려 말하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알려, 로디온의 얼굴에 불만이 서렸다.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뚱해진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로디온은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하며 칼로스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로디온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은 고스란히 상대에게 전해졌다.
‘늘 의젓한 모습만 보이더니. 아직 애는 애인 모양이네.’
하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칼로스가 문제는 아니었다. 그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아이를 상대로 덩달아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리 없을 테니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네타는 칼로스의 감정과는 별개로, 아이가 무례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아네타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눈이 마주친 칼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
가만히 두라고 말하는 것 같은 모습에 아네타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로디온을 바라보는 칼로스의 얼굴엔 귀여운 재롱이라도 본 것처럼 가벼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아네타. 여기 서서 이러지 말고 후작저로 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 영식도 제도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칼로스는 무턱대고 로디온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미운털이 박힌 상황에서 허락 없이 이름을 불러 부정적인 감정을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아니요. 공작 전하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누님이랑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그러나 칼로스의 노력이 무색하게, 로디온은 여전히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