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귀여운 방해꾼 (2)
“어서 오십시오, 아데나워 후작 각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오전. 아네타는 버논에게 미리 언질한 대로 케이너 백작가를 찾았다.
현 가주의 외가라고는 하나, 전 안주인이었던 릴리에트가 친정이라면 학을 뗐기에 이번이 겨우 두 번째 방문이었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일절 교류가 없던 두 가문이었으나, 가주들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친화적으로 변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진 진전이었기에 사용인들은 혼란을 느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크리스 님께서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알겠어요.”
케이너 백작가의 집사는 저택을 찾은 아네타를 정중한 태도로 안내했다.
아네타는 그 뒤를 따르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케이너 백작가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은 엘레나였다. 당시 엘레나는 릴리에트에게 무언가를 전해 주기 위해 몸소 찾아갔었는데, 아네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간 응접실 안에서 릴리에트를 처음 보았다.
불꽃은 온도가 높을수록 푸른색에 가까운 색을 띤다고 했던가.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푸른 불꽃같았다. 그 안에서 고요하게 타오르는 열망은 아네타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때의 기억이 강렬한 탓일까. 릴리에트만 떠올리면 절로 긴장이 되었다.
‘버논의 결혼식에서 다시 뵙게 되겠지?’
아네타의 상념을 깬 것은 도착을 알리는 집사의 목소리였다.
아네타는 열리는 문을 보며 지금도 선명한 릴리에트의 눈동자를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 있던 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납치 사건 이후, 다시 케이너 백작저로 들어와 생활하고 있는 크리스였다.
“오셨어요, 아네타 님.”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사라졌다.
크리스는 환한 미소로 아네타를 반겼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 같아, 아네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아네타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버논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말해 주자, 그에게 대략적인 설명만 들었던 크리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렇게 돼서, 오늘부터 내가 너희 두 사람 결혼 준비를 돕게 됐어.”
“버논 오라버니께서 그런 말씀까지 하셨다고요?”
“왜? 부끄러워?”
목을 축이던 아네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짓궂게 물었다. 크리스는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좋을 때네.”
“아네타 님도 마찬가지시잖아요.”
“그래. 우리도 좋을 때지. 돌고 돌아온 길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관계를 이룰 수 있었으리라. 아네타는 앞으로 함께할 날이 더 많을 테니 그에 대한 아쉬움은 접어 두기로 했다.
“듣자 하니 사용인들에게 알아서 준비하라고 맡길 건 아닌 것 같던데.”
크리스가 이것저것 알아보고 다닌다는 건 버논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네타는 크리스 역시 버논만큼이나 하루 빨리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결혼 준비는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 거야. 직접 몸으로 뛰는 건 사용인들이 하겠지만, 결국 모든 일에 있어서 최종적인 선택하는 건 너나 버논이 될 테니까 말이야.”
아네타는 차라리 자신과 같은 계약 결혼 준비가 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아무 감정도 없을 테니 상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준비하면 됐으니까.
아네타와 칼로스의 결혼식도 그런 식으로 치러졌다.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질 일이 없는, 일종의 비즈니스였기에 둘 중 누구도 필요 이상으로 공을 들이지 않았다.
정성보다는 돈을 쏟았다. 서로의 감정보다 가치가 더 중요한 때였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들은 아니었다.
“하물며 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거잖아. 조금이라도 더 신경 쓰고 싶을 것 같아서 버논의 부탁을 들어준 거야.”
“저야 도와주신다면 감사하지만 괜찮으시겠어요? 바쁘실 텐데 괜히 저희 때문에 무리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에요.”
“당분간은 한가할 예정이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아마 나보다는 버논이 더 바쁠걸.”
아네타는 이미 이번 연도에 처리해야 할 서류를 모두 올렸기 때문에 굳이 황궁으로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한가하지만, 러셀의 직속인 버논은 아니었다.
올라간 서류가 그쪽으로 다 갔을 테니까 아마 지금부터 본격적인 서류 지옥이 시작되지 않을까. 그런 상황에서 결혼 준비까지 강행하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만큼 서로가 좋다는데.
“아, 버논에게는 도와주는 조건으로 결혼 전날에 널 데리고 있겠다고 했지만, 내키지 않으면 거절해도 돼. 거절한다고 해서 도와주지 않을 생각은 없으니까.”
“아데나워 저택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저는 좋아요. 그런데 뭘 하시려고요?”
“특별한 건 아니고, 결혼 전에 마지막으로 함께 시간이나 보낼까 해서. 자, 그럼 이야기도 끝났겠다, 슬슬 나가자.”
말을 마친 아네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크리스의 시선이 따라오자, 아네타는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난 이곳 집사와 이야기하고 있을 테니까 외출할 준비하고 나와.”
“이렇게 갑자기요?”
“일정에 맞추려면 그나마 여유 있을 때 하나라도 더 해치워야지. 외출 준비는 천천히 해도 되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아,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던 크리스의 입에서 곧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고, 아네타는 자신을 이곳까지 안내해 주었던 이를 찾기 위해 뒤따라 나섰다.
***
그로부터 십여 일이 지난 뒤, 아네타의 도움으로 결혼 준비를 하던 크리스가 느낀 것은 하나였다.
“결혼식은 두 번 할 게 못 되는 것 같아요.”
크리스는 아직 해야 할 일의 반도 끝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애써 잊고자 했다.
아네타를 향해 탄식하듯 중얼거린 그녀는 그대로 힘없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저택이었다면 곧장 침대로 향할 만큼 지쳐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최선이었다.
“크리스, 설마 날 두고 한 번 더 할 생각이었어?”
지칠 대로 지친 크리스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반응을 보인 건 아네타가 아니었다.
서류가 끝나는 대로 칼로스와 함께 두 여인이 있는 곳으로 찾아왔던 버논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오해하지 마세요.”
크리스가 양손을 내저으며 부정하는 사이, 버논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말에 반응한 칼로스는 조용히 아네타의 눈치를 살폈다.
아네타의 눈에는 칼로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얼굴에 불안감이 감도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아네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요즘 세상에 두 번 결혼하는 건 흠도 아니야.”
숍 테이블에 놓여 있던 카탈로그를 넘기며 무심한 듯 꺼낸 말에 칼로스의 표정이 희망으로 밝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버논은 그를 보며 혀를 끌끌 찼지만, 이어지는 아네타의 말은 그가 간신히 되찾은 여유를 앗아갔다.
“그러니까 살다가 영 아니다 싶으면 이혼 서류 던지고 나와. 너 하나쯤은 내가 충분히 건사할 수 있으니까.”
“아네타, 지금 우리 크리스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반응 보일 거 없어, 버논. 네가 그런 일이 안 일어나게끔 처신을 잘하면 되는 거니까. 혹시 자신이 없는 거야?”
아네타는 보고 있던 카탈로그를 잠시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버논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곤 놀리듯 묻는 말에 버논이 펄쩍 뛰었다.
“자신이 없긴 왜 없어? 크리스는 내가 반드시 행복하게 해 줄 거라니까!”
“그래, 알아. 믿고 있으니까 이제 크리스랑 저쪽으로 가서 예복이나 골라 봐.”
소리 죽여 외치는 버논에게 진정하라고 손짓한 아네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열을 맞춰 늘어놓은 행거였다. 그것을 가리키며 준비가 끝난 모양이라고 덧붙이자, 버논은 방금 전 자신의 발언으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익은 크리스를 이끌고 자리를 떴다.
언제 피로를 느꼈냐는 듯 행거에 걸린 예복을 살피는 두 사람은 제법 들뜬 낯을 하고 있었다.
본래 예복을 맞추려고 했던 곳은 세르세가 운영하는 에티엔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리스와 버논은 마음을 바꾸어 이곳을 선택했다.
아네타는 당연히 당사자들의 의견에 따랐는데, 만족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제 남은 건 한 사람이었다. 의도대로 능숙하게 버논의 주의를 돌린 아네타는 다시 보고 있던 카탈로그로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고 있어, 칼로스?”
“당신이랑 나도 이곳에서 한 벌씩 맞추면 좋을 것 같아서.”
“여기는 예복만 전문으로 만드는 곳이라 우리가 입을 옷을 맞추려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해.”
아네타는 칼로스가 바라는 바를 눈치챘지만, 짐짓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정 아쉬우면 조금 있다가 에티엔이라도 갈래?”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아네타. 우리는 다음에 맞추고, 오늘은 저 두 사람이나 도와주자. 그래야 당신도 덜 고생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안으로 에티엔을 언급하자, 칼로스는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친구인 세르세에게 질투를 하는 건 여전했다.
‘제대로 봐줄 생각도 없으면서. 귀엽다니까, 정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칼로스를 보며 아네타는 입가를 비집고 나오려드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래, 그럼. 우리 건 나중에 같이 맞추러 나오자.”
아네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칼로스는 애써 실망한 기색을 숨겼다.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연인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카탈로그를 넘기는 그녀의 손은 더욱 빨라졌다.
아네타의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한 곳에 멈추었다. 페이지를 넘기려던 손을 잠시 멈춘 아네타는 곁에 앉은 칼로스를 힐끗 곁눈질했다.
칼로스는 예복을 고르고 있는 크리스와 버논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눈빛만은 부러움을 담뿍 담아내고 있었다.
남들 눈에는 그 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겠지만, 아네타의 눈에는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드디어 내 눈에도 콩깍지가 씌인 모양이네.’
아네타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칼로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얌전히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을 잡아 쥐자, 예고 없이 행해진 행동에 놀란 칼로스가 고개를 돌렸다.
아네타는 칼로스의 놀란 눈이 제게로 향하거나 말거나, 잡은 손에 깍지를 꼈다.
‘조금만 기다려.’
마음속으로 그가 듣지 못할 말을 속삭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