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91화 (91/122)

91화. 귀여운 방해꾼 (1)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지.”

정무 회의를 파한 러셀은 누구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회장을 떠나자,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던 귀족들은 하나둘 굽혔던 몸을 폈다.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지자, 누군가가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정치가라고 해도 매회마다 살얼음판을 기는 회의가 반가울 리 없었다.

귀족들은 서둘러 회장을 벗어나고자 했고, 입구는 그들로 하여금 혼잡해졌다.

아네타는 그 틈바구니에 낄 생각이 없었고, 칼로스 역시 그녀의 곁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리를 지키길 잠시. 익숙한 목소리가 알은체를 해 왔다.

“아네타, 칼로스.”

고개를 돌린 아네타와 칼로스는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버논을 발견했다.

회의라면 학을 떼는 사람 중 하나로 평소라면 죽상을 짓고 있었을 그의 표정은 어쩐 일인지 생기가 넘쳤다.

“오랜만이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백이면 백 크리스와 관련이 있었다.

아네타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밝게 웃고 있는 버논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황량한 풍경과는 다르게, 그의 주변만 봄인 양 꽃내음이 풍기는 것 같았다.

“네 주변만 꽃밭인 것 같은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네타만 느낀 감상이 아니었는지, 칼로스가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좋은 일이라면 있었지. 덕분에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니까.”

“무슨 일이길래?”

“이런 곳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으니까 먼저 자리부터 옮기자. 너희 집무실로 가도 되지?”

버논은 어느덧 인파가 사라진 입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벌써부터 입이 간질거리는지 칼로스보다 한 걸음 앞에 서 있던 아네타의 손을 잡아끌려고 했지만, 그것은 시도에 그쳤다.

칼로스는 버논의 손이 아네타에게 닿기 전에 단호히 쳐 냈다. 제법 매서운 소리가 났지만, 칼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네타의 손을 제 손으로 감쌌다.

“지금 누구 손을 잡으려는 거지?”

“그래. 내가 잘못했네. 손은 둘이 잡고, 어서 가기나 하자.”

평소였다면 꼴불견이라며 단박에 인상을 구겼을 버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두 사람을 재촉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앞장서는 버논의 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지금 당장 서 있는 자리에서 춤을 추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에 아네타와 칼로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맞춘 두 사람의 눈동자는 같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쟤가 갑자기 왜 저럴까, 칼로스.”

“글쎄. 요즘 일이 너무 많은가.”

“폐하께서 내리는 살인적인 업무가 기어코 사람 하나를 망친 모양이야.”

“겉으론 가벼워 보여도 나름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안타깝군.”

아네타와 칼로스는 소리 죽여 말을 주고받았다.

대화는 두 사람이 제 뒤를 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챈 버논에 의해 끝났다.

“두 사람 다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와.”

“가고 있어.”

아네타와 칼로스는 버논이 바라는 대로 그의 뒤를 따라가 주었다. 집무실 문을 열어 주자 잽싸게 자리를 잡고 앉은 버논은 먼저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아네타 너는 이적이 소멸해서 타격이 좀 있었을 것 같은데.”

이적을 언급하는 투는 식사 여부를 묻는 것처럼 담백했다.

이야기를 꺼낸 이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굳이 이적의 일을 언급하는 저의를 의심했겠지만, 상대는 버논이었다.

덜어내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말을 주고받는 건 그들 사이에서 익숙한 일이었다.

“내게 그렇게 대놓고 묻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알지?”

아네타는 낯빛을 달리하는 일 없이 여상스레 대꾸했다.

“당연하지. 나 아니면 누가 네게 겁도 없이 이런 걸 묻겠어? 그랬다간 지금 네 옆에 있는 녀석 손에 산 채로 묻히게 될 텐데.”

버논은 다른 자리를 두고 굳이 아네타의 옆자리를 차지한 칼로스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칼로스가 왜 쓸데없는 일을 언급하느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버논은 못 본 척 눈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때묻지 않은 나야 악의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걱정 어린 물음을 건넬 수 있다지만, 다른 녀석들은 아니잖아?”

“그래, 그렇다고 쳐줄게.”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입씨름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네타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비록 영광은 잃었지만, 광산 쪽 거래는 어느 때보다 호황을 이루고 있거든.”

영광의 가문에서 이름을 빼게 되었다는 소식이 제도 전체를 돌면서 아데나워 후작가는 세간의 시선과 관심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언론은 물론 민가와 귀족가에서까지 쉴 새 없이 언급되니 그 관심이 후작가 소유의 광산 쪽으로 옮겨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폐하와의 거래로 독점권을 얻은 덕분에 프리미엄이 붙어서 판매 수익 자체도 배로 뛰었고.”

“재산이 늘었다고? 거기서 더?”

버논은 대체 끝이 어디냐며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작은 걱정까지 한 번에 싹 씻겨 나간 까닭에 그는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타격이 적다니 다행이네.”

“좀 더 기쁜 표정을 지어 보는 게 어때. 미우나 고우나 아데나워는 네 외가잖아?”

“글쎄. 난 내 것이 아닌 것에는 흥미가 없어서.”

자고로 가질 수 없는 것에는 관심도 가지지 말아야 하는 법이라며, 버논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 무슨 일이길래 자리까지 옮긴 거야?”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버논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겉옷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아네타는 그 모습을 보고 그가 청첩장 시안을 보여 주었을 때를 떠올렸다. 자리부터 행동까지 그때와 같은 까닭이었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넘기고 싶었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게 없었다.

“자, 이걸 보라고.”

아니나 다를까. 그의 품에서 나온 것은 청첩장이었다. 지난번에 보여 주었던 시안보다 더 화려해진 봉투를 들고 있는 버논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요 며칠 일 때문에 안 보이는 줄 알았는데. 결혼 준비 때문이었던 건가?”

“맞아. 날짜까지 확정 지었지.”

“추진력 하나는 대단하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 때문이라면 그렇게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히죽거리던 것도 이해가 된다.

칼로스가 진심으로 감탄하는 가운데, 아네타는 버논이 건넨 청첩장을 받아 들었다.

날짜가 정해졌다는 말에 곧장 내용을 확인한 아네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쓰여진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한 달 뒤? 이렇게 빨리 데려가겠다고?”

영락없이 딸 시집보내는 부모가 할 법한 말에도 버논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일정을 여유 없이 잡은 거야?”

아니, 이 경우에는 여유가 없다 못해 촉박하기까지 했다. 아네타는 혀를 찼다.

“왜겠어. 한시라도 빨리 같은 지붕 아래서 살고 싶어서지.”

“그 마음, 알 것 같아.”

칼로스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버논의 말에 동의하자, 아네타는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빨라. 준비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계약 결혼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한 번 결혼식을 올린 적이 있는 아네타의 머릿속에는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버논의 선택은 퍽 무모했다.

귀족가, 특히 고위 귀족가 가주의 결혼식은 대부분 경험이 있는 집안의 어른들이 주도하여 준비한다.

하지만 크리스의 양친은 마차 사고, 버논의 부친은 병으로 작고했다. 외가인 아데나워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모친이자 아네타의 고모인 릴리에트가 있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죽음 이후 가문을 아들에게 맡긴 뒤 타국으로 나가 제법 번듯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아네타는 5년 동안이나 제국에 돌아오지 않은 릴리에트를 떠올렸다. 그녀는 개인 중심의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고모님께서 도와주러 와 주실까? ……아니. 참석만 해 주셔도 다행이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집안 어른이 없으니, 결국 남은 방법은 당사자들이 직접 사용인들을 이끌고 준비하는 것인데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각자 맡은 일이 있으니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조금 미루는 게 어때?”

결국 아네타는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

버논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흡사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 설마 급하다고 대충 치르고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아네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버논을 흘겨봤다. 긍정이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리 벼르는 사이, 돌아온 것은 다행히 부정이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럼 무슨 수로 그 짧은 기간 내에 모든 준비를 끝낼 건데.”

“안 그래도 그게 걱정돼서 네게 부탁 하나만 하려고.”

버논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허리를 넙죽 숙여 보였다. 그에 아네타는 그가 하려는 부탁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도와줘, 아네타.”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네타는 눈앞에 보이는 머리꼭지를 바라보며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네 어디가 예뻐서 내가 그런 수고를 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버논은 분위기가 싸늘히 식자, 칼로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그마저도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버논은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크리스 이야기였어. 나는 몰라도 크리스는 예뻐하잖아, 너.”

“……좋아. 하지만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조건이 있어.”

크리스가 언급되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아네타는 태도를 바꾸었다.

어차피 제 성격상 크리스가 고생하는 걸 손 놓고 지켜볼 리 없으니, 조건을 걸어 원하는 걸 얻으면 되겠다 싶었다.

“그래. 네 뜻대로 해.”

대답은 의외로 순순히 들려왔다. 속에 능구렁이를 감추고 있는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듣지도 않고 받아들이는 거야?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적어도 상대가 너나 칼로스면 걱정 없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사람이 아니니까.”

“한다면?”

“크리스에게 일러야지, 뭐.”

“참 못났다.”

씩 웃으며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아네타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그래서, 대체 조건이 뭔데?”

“결혼식 전날, 내가 크리스를 데리고 있고 싶어. 물론 본인의 동의를 받아야겠지만.”

“크리스라면 아마 좋다고 할 걸. 그런데 둘이 뭐 하려고?”

“네 험담.”

“……살살해 줘.”

“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해?”

“안 해. 크리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권리가 있는 사람이니까. 숨김없이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고.”

“제법 괜찮은 말도 할 줄 하네. 펄쩍 뛰면서 말릴 줄 알았는데.”

“남은 인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말, 가벼운 마음으로 한 게 아니니까. 반드시 행복하게 해 줄게.”

버논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네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곧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거야. 결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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