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90화 (90/122)

90화. 저무는 황혼 (3)

칼로스의 오랜 짝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가주들이 두 사람을 보며 각기 다른 감상을 느끼는 사이, 러셀은 아네타를 향해 시험하듯 물음을 건넸다.

“그럼 영광의 주인 자격이 박탈되어도 후회는 없겠군.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영광이 소멸한 것은 엄연한 사실. 이전과 같은 대우를 바랄 수는 없을 거다.”

“이미 각오했던 일입니다.”

영광이 없음에도 자리를 유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간 누려 오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도 후회는 없었다.

아네타는 자신이 다녀온 세계를 떠올렸다. 잡을 수 없는 빛이라고 명명한 그 세계는 더는 아네타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었다.

이제 모든 의미는 칼로스가 독점하게 되었으니까. 지금껏 그가 보여 준 맹목적인 감정을 그녀 역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뒤늦게라도 그 사실을 깨닫게 돼서 다행이야.’

아네타가 느끼는 것은 후회가 아닌 안도였다. 이적이 조금이라도 시기를 앞당겼다면 선택은 달라졌을 테니까. 그 끝에 남은 것이야말로 후회가 아니었을까.

“만약 그때로 돌아가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고 해도, 저는 몇 번이고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아네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적이 만든 이상 세계에 털끝만큼의 미련도 남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자, 러셀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녀를 투시할 듯 집요하게 바라보던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후작의 선택을 존중하지. 그러나 영광이 각 가문의 소유라고 해도 국보는 국보. 이적의 소멸은 이 자리가 파하는 즉시 공표될 거고,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 증인이 될 거다. 그리 알아 두도록.”

“예, 알겠습니다.”

러셀은 아네타의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단상을 내려오며 아네타와 칼로스를 번갈아 보았다. 특히 칼로스의 창백한 낯빛에 붉은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이만 물러가 봐도 좋다. 피곤해 보이니 돌아가서 쉬어라.”

러셀의 축객령이 떨어졌지만, 다른 가주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네타는 축객령이 자신과 칼로스, 둘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깨닫곤 그와 함께 회장을 벗어났다.

두 사람은 곧장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정문으로 향했다. 평소였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레녹스로 향했겠지만, 서로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아네타는 마부에게 발티모어 공작저로 갈 것을 요구했다. 집사인 린든이 오매불망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먼저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다.

“…….”

가볍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칼로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를 방해할 생각이 없는 아네타는 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제 정말 영광과 관련한 일들은 모두 끝이구나.’

이제 더는 영광의 주인으로서 다른 가주들과 동등하게 설 수 없을 것이며, 관망이 주도하는 의식에도 참석할 수 없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일들을 나열해 봐도 부정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아네타는 의연했고, 다른 감정이 있다면 주저 없이 믿음을 드러낸 테르사를 향한 감동 정도였다.

멀어지는 버논을 보며 싱숭생숭했던 마음도 어느덧 말끔히 사라졌다.

그녀 자신도 놀랄 만큼 속이 후련했다.

아네타가 상념에서 벗어난 것은 칼로스의 시선이 느껴질 때였다. 고개를 든 아네타는 기다렸다는 듯 마주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괜찮아?”

칼로스는 황궁으로 올 때 아네타가 건네었던 물음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괜찮냐는 물음에 서러워질 법도 하건만, 그녀는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말했잖아. 내가 후회할 일 같은 건 만들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여전히 칼로스의 표정엔 근심이 서려 있었다. 자신을 향한 걱정이 여실히 느껴지자, 아네타는 그가 했던 말을 언급했다.

“난 당신이 그 말을 지켜 줄 거라고 믿어. 그러니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지.”

본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아네타는 이제 세상 무엇도 칼로스보다 중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홀가분해. 이적은 내 뜻을 거스르고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존재였으니까. 불안감에 전전긍긍할 바에야, 차라리 소멸시키는 게 낫지.”

냉정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말이었지만, 그것이 최선인 건 사실이었다.

“안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아네타가 동의를 구하듯 묻자, 칼로스는 긍정했다.

아네타가 한 말이라서 무조건 동의하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만약 아네타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지금과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녀와 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그런데 당신, 내가 안 괜찮다고 말하면 어쩌려고 했어? 당신이 가진 창공이라도 줄 생각이었던 거야?”

“아니.”

아네타가 걱정을 덜어 주고자 웃음기 섞은 물음을 건네자, 돌아온 것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준다고 해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바로 부정할 줄은 몰랐다.

아네타는 흥미로운 얼굴로 칼로스를 바라보았다.

“의외네. 당신이라면 내가 뭘 달라고 하든 다 주겠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나 봐?”

“그 정도 맞아. 하지만 이런 거 말고 날 가져, 아네타.”

칼로스는 아네타의 손을 잡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손목 근처가 웅웅 울렸다.

졸지에 ‘이런 거’가 되어 버린 창공이 불만을 표출했지만, 칼로스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쉴 새 없이 공기를 울려 대는 창공을 달랜 것은 아네타였다.

이적이 소멸했다고 해서 영광 특유의 기운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잡히지 않은 손으로 팔찌 형태의 창공을 쓰다듬던 찰나, 칼로스가 그 손마저 잡아채 제 손 안에 감추었다.

“만지려면 날 만지고.”

“당신, 지금 창공에게 질투하는 거야?”

그의 모습은 꼭 제 것을 감추는 어린아이 같았다.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 질투하는 거야. 난 당신이 다른 무엇보다 나를 더 원해 주길 바라거든. 그게 어떤 상황이든 말이야.”

칼로스는 반쯤 몸을 일으켜 아네타와의 간격을 좁혔다. 들이쉬고 내뱉는 숨이 맞부딪히는 거리에서 그는 말을 이었다.

“난 당신 생각보다 질투가 많은 사람이야. 매일 아침 당신을 깨울 이사벨은 물론이고, 당신 몸을 감고 있는 이 드레스에게까지 질투가 나.”

칼로스는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제 뺨으로 가져갔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린 그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부볐다.

“그러니까 이런 날 책임져 줘.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야.”

유혹하듯 속삭이던 칼로스는 그녀의 손을 제 입술 앞으로 부드럽게 이끌었다.

쪽.

들려온 것은 제법 귀여운 소리였지만, 이어지는 행동은 전혀 아니었다.

칼로스는 아네타의 손바닥을 입술 사이로 가볍게 물었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아네타의 몸이 움찔 떨렸다.

맞닿아 있는 칼로스가 그 떨림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만두기는커녕 부족하다는 듯 진하게 입술을 묻어 왔다.

“키스해도 돼?”

입술의 움직임은 물론 내쉬는 숨마저도 손바닥 아래로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입술에서 옮겨 붙은 습기와 열기 탓에 여전히 닿아 있는 손이 홧홧했다.

마주친 시선은 진득했다. 그는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보이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드러냈다.

“당신, 지금 작정했지.”

“싫어?”

“……싫다고는 안 했어.”

칼로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네타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녀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 긴 의자 위에 눕혀졌다. 이윽고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벌어진 입술을 비집고 드는 건 말캉한 혀였다.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조급한 모습이었다. 아네타는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정확하게는 그가 자신에게 안달하는 모습이.

상념은 잠시였다. 혀끝이 입천장을 훑는 순간 마음에 드니 어쩌니 하는 생각들은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아네타는 저도 모르게 허공을 더듬었다. 무언가 붙들 만한 것을 찾아 떠돌던 손끝은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에 칼로스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말끔히 걷혔다.

칼로스는 혀끝으로 입 안의 점막을 훑었다. 입 안을 헤집는 혀의 움직임은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아네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저도 모르게 혀를 물렸지만, 칼로스는 그를 집요하게 쫓았다.

혀와 혀가 얽히자 물기 어린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앗아 가는 숨결 하나하나에 폐부가 정신없이 내달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아네타의 호흡이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지고 나서야 칼로스는 입술을 떼었다. 빈틈없이 맞물려 있던 두 입술이 떨어지자 그 사이로 긴 은사가 늘어졌다.

“아네타.”

아네타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잠시의 시간을 준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덕분에 간신히 고른 숨은 또다시 거칠어졌다.

격한 입맞춤에 눈앞에선 빛이 어지러이 번뜩였고, 전율처럼 타고 오른 충동은 시시각각 마른 목을 죄었다.

“칼로스, 이제 그만.”

어느 때보다 짙게 아네타의 입술을 탐한 칼로스는 아네타가 가까스로 내뱉은 말에 아쉬운 얼굴을 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흔치 않은 기회를 잡은 이상 곱게 물러날 그가 아니었다. 칼로스는 이번엔 입술이 아닌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칼로스의 입술은 아네타의 목선을 따라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옷자락을 밀어 쇄골이 드러나게 만든 그는 그 위에 뜨거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아네타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지만, 칼로스는 입술에 입을 주어 살갗을 빨아들였다.

이를 세울 법도 하건만 손대기도 아까운 존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칼로스는 오직 입심만으로 키스 마크를 새겼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위치에 새겨진 얼룩은 그의 욕망을 상징하듯 붉고 짙었다.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아네타의 손은 밀려드는 감각에 못 이겨 힘없이 풀렸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손이 아랫배에 스치자, 칼로스의 거짓말처럼 움직임이 뚝 멎었다.

“여기까지만 할게. 이 이상은 정말 못 참을 것 같거든.”

주체할 수 없는 애정과 정욕이 담뿍 묻어나는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칼로스는 제 흔적을 남긴 쇄골을 배부른 맹수처럼 어루만지며 말했다.

“날이 추워. 이제 조금 더 높게 올라오는 옷을 입어야 할 것 같아, 아네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