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저무는 황혼 (2)
갑작스럽게 전해진 소식은 소집 명령뿐만이 아니었다. 칼로스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러셀이 보낸 이와 함께 저택을 찾았던 린든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 저택은 공작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날부터 오늘 아침까지 사라졌었습니다. 폐하께서 두 분을 부르신 건 분명 그 일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저택이 사라졌었다는 말에 아네타와 칼로스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누구도 저택을 찾지 않았던 이유가 밝혀졌다. 정확히는 찾지 못한 것이었다.
잠들었던 사용인들이 깨어난 시간은 저택이 다시 나타났다는 시간과 거의 같았다. 아무래도 이적의 힘이 잔존했던 것은 그때까지였던 모양이었다.
아네타와 칼로스는 러셀이 내린 소집 명령에 응하기 위해 서둘러 후작저를 나설 채비를 했다.
린든은 칼로스의 야윈 모습을 보고 자초지종을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마님, 저희 전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어.”
아네타는 마차에 오르기 전, 린든이 건네 온 절절한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정은 그녀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아네타는 꾸준히 칼로스의 상태를 살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난 그였지만, 겨우 하루 숙면을 취했다고 해서 사흘 밤낮을 뜬 눈으로 지새운 것이 없던 일이 될 리가 없었다.
축난 몸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여전히 희게 질려 있는 낯빛이 그를 증명했다.
‘하긴. 겨우 그것만 먹고 버텼으니 몸에 무리가 갈 만도 하지…….’
주방의 사용인에게 넌지시 물어본 바로는 사라진 식재료는 약간의 물과 사과 한 알이 전부였다.
주방장이 식재료 관리에 까다로워 하나하나 기록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였으니 확실할 터였다.
‘수프라도 다 먹이고 왔어야 했는데.’
아네타는 걱정되는 마음에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의 권유로 눈을 감고 있던 칼로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봐, 아네타?”
“당신 괜찮나 싶어서.”
안 괜찮다고 해도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를 멈춰 세울 수는 없지만, 아네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때 보이는데?”
돌아오는 건 반문이었다.
“어때 보이긴. 당장 침대로 데려가서 눕히고 싶은 모습이지.”
“방금 그 말, 지금껏 당신이 내게 했던 말들 중에 두 번째로 설레는 말이었어.”
느낀 그대로를 말했던 아네타는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이는 칼로스를 보며 아차 싶었지만, 때는 늦었다.
“이런 말하기 부끄럽지만, 난 당신이라면 언제든 이 한 몸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
입으로는 부끄럽다고 말하면서도, 어투는 은근했다.
칼로스는 수줍은 척 눈을 아래로 깔았지만, 그가 순수해 보이는 일은 없었다. 특유의 분위기와 피로가 가시지 않은 얼굴 탓에 묘하게 야릇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거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
하여간 조금만 방심하면 이런 식으로 훅 치고 들어온다. 어찌 보면 재주는 재주라는 생각과 함께 아네타는 그의 말을 정정했다.
“칼로스, 듣고 있어?”
“아니. 좀 어지러워서 당신 말이 잘 안 들리는 것 같아. 잠깐 이러고 있어야겠어.”
하지만 칼로스는 못 들은 척하며 슬그머니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어쩐지 맞은편의 넓은 자리를 두고 굳이 옆자리를 차지하더라니 이런 속셈이었구나 싶었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사람은 아네타였다. 아픈 사람을 밀어낼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체념하며 말했다.
“속이 시커매, 당신.”
“알아. 그래도 사랑해 줘. 내가 흑심을 품는 건 오직 당신 하나뿐이니까.”
“걱정 마. 내가 당신 아니면 누굴 사랑하겠어.”
아네타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칼로스를 훑었다.
마차 내부는 아데나워 후작가의 재력을 과시하듯 넓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 탓에 칼로스는 길게 뻗은 다리를 문이 나 있는 쪽으로 구겨 넣어야 했다.
불편하겠지만, 본인이 이렇게 있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아네타는 별다른 말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도착할 때까지 눈 좀 붙여, 칼로스.”
“나는 입술을 붙이고 싶은데. 당신이랑.”
“자꾸 그러면 맞은편 자리로 쫓아낼 거야.”
“얌전히 있을게.”
아네타가 엄포를 놓자, 칼로스는 언제 수작을 부렸냐는 듯 얌전히 눈을 감았다. 막상 눈을 감으니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에 수마가 밀려왔다.
아네타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칼로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돌아온 세계는 여전했다. 익숙한 풍경에 익숙한 공기와 익숙한 감각들이 녹아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도 이곳은 그대로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원래 나 하나 없어도 잘만 돌아가는 게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 하나만큼은 아니었겠지.’
아네타는 안으로 새어드는 빛을 가리기 위해 조심스레 그의 눈가에 손 그늘을 드리웠다. 그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잠을 청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애정을 담은 배려 덕분인지, 칼로스는 아네타의 바람대로 황궁에 다다를 때까지 짧게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마부가 도착을 알려 오자, 아네타는 칼로스의 뺨에 손을 얹었다.
“칼로스, 황궁에 도착했어.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해.”
약하게 뺨을 두드리며 깨우자, 칼로스가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도로 눈을 감았다. 어리광을 부리듯 제 품으로 더욱 파고드는 모습에 아네타는 다시 한 번 그를 깨우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마차 문이 열리는 게 더 빨랐다.
“안에서 뭘 하느라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예고 없이 안으로 들이닥친 이는 버논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불청객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칼로스는 인상을 팍 구긴 채로 몸을 일으켰다.
잠기운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누가 멋대로 들어오랬지?”
칼로스가 건넨 말은 그것이 전부였지만, 버논은 눈으로 욕하는 게 어떤 것인지 몸소 깨달았다. 그러나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그는 뻔뻔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칼로스. 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연애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버논은 어느 순간 진지하게 변한 얼굴로 아네타를 응시했다.
“아네타. 이적의 영광이 소멸했다는 게 사실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아직 저택의 사용인들밖에 모르는 일인데.”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일단 두 사람 다 마차에서 내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자세한 건 가면서 설명할게.”
아네타와 칼로스는 버논의 말대로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서둘러 정문을 지나 황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데?”
앞서 걷는 버논에게 먼저 상황 설명을 요구한 사람은 아네타였다.
“오늘 관망의 영광이 깨어나서 이적의 영광이 소멸했다는 사실을 기록했어. 나는 그 소식이 폐하께 보고됐을 때 곁에 있었고.”
“잠깐. 폐하께서 이적의 소멸을 알게 되신 게 보고를 통해서라고?”
칼로스는 의문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네타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관망은 시동어가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고, 주인은 그 시동어를 오직 자비의 소유자이자, 당대의 황제가 보는 앞에서만 읊을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직접 기록을 확인했어야 할 러셀이 보고를 통해 내용을 알게 되었다니. 순서가 엉망이었다.
“그래. 클로린 공작 전하의 증언에 따르면, 일말의 전조도 없이 깨어난 관망이 시동어 없이 기록을 했다더라. 폐하께서 바로 이적의 소멸을 확정짓지 않은 건 그 때문이야. 3년이라는 주기를 깬 것에 이어 전례 없는 일의 연속이었으니 주인에게 직접 확인하시려는 거지.”
버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회장 앞에 도착했다. 버논은 한 걸음 물러서며 눈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 봐.”
“넌?”
“난 이만 가 봐야지. 내 역할은 여기까지거든.”
영광의 주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자격이 없는 자는 참여할 수 없다. 납치 사건 때가 특수한 경우였지, 선은 분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칼로스가 노크 후 문을 여는 사이, 아네타는 멀어지는 버논의 모습에서 훗날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지금 이 순간이 그녀가 영광의 주인으로서 설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 될 테니까.
아네타가 버논에게서 시선을 뗀 것은 칼로스가 안으로 한 걸음 걸어 들어갈 때였다. 곧장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간 아네타는 기다리고 있던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만 했다.
아네타는 인사를 마치고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회장 내부에는 이미 죽고 없는 에레즈를 제외한 모든 영광의 주인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 같이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기에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내부의 분위기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아데나워 후작.”
“예, 폐하.”
정적을 깨고 아네타를 호명한 이는 러셀이었다. 아네타는 고개를 들어 낮은 단상 위에 앉아 있는 황제와 시선을 맞추었다.
“오늘 관망의 영광이 무얼 기록했는지 알고 있겠지?”
“예. 케이너 백작에게 들었습니다.”
“이적이 소멸했다는 게 사실인가?”
설명할 수고를 덜었다는 듯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러셀에게 돌려줄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곁에 선 칼로스가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내 왔지만, 아네타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사실이에요. 제가 제 손으로 부쉈습니다.”
아네타의 충격적인 발언에 영광에 대한 자부심이 가장 높은 클로린 공작이 헛숨을 들이켰다.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헤첸 백작과 세르세 역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아네타가 직접 부순 거라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때 침묵을 가르고 입을 연 사람은 묵묵한 시선을 보내오던 테르사였다.
언제나 이런 순간에 누구보다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그녀는 아네타를 향한 신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내 생각도 로펠락 후작과 같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런 일을 벌였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데, 무슨 연유로 이적을 부순 건지 말해 줄 수 있겠나?”
테르사의 말을 거든 것은 줄곧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던 러셀이었다.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기에 아네타는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 시작은 이적이 연기했던 화가 ‘엘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었다.
리페의 갤러리에서 처음 그의 그림을 발견했던 일부터 이 세계로 돌아온 것까지 설명을 끝내자, 그녀를 내려다보는 러셀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택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이적 때문이었던 건가. 그런 조건을 뿌리치고 용케도 돌아왔군.”
“저도 이제 욕심이 생겨서요.”
러셀은 그녀가 말하는 욕심이 누굴 향한 것인지 모를 수 없었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눈빛을 하고 칼로스를 바라보는 아네타의 모습에 러셀은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