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저무는 황혼 (1)
칼로스는 한참이나 아네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지자, 아네타는 줄곧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내가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어?”
아네타의 물음에 칼로스는 미간을 좁혔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날짜를 헤아리던 그는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사흘쯤 지났을 거야.”
“그것밖에 안 됐어?”
“내 기억으로는 그런데, 왜 그래? 그곳과 이곳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기라도 한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내가 그곳에 머물렀던 건 여드레쯤 되거든.”
아네타는 그곳에서 맞이했던 아침을 기준으로 날을 셌다. 밤이 없는 대신 낮과 황혼이 길었기에 하루를 이루는 시간의 차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하루가 그곳에서는 이틀이라는 건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도 이적의 수작에 놀아났더니 그 정도는 놀랍지도 않네.”
아네타가 이적을 언급하기 무섭게 칼로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이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지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화를 내는 것도 체력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칼로스는 찌르는 듯한 두통을 느끼며 작게 신음했다.
“아.”
칼로스는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죽였지만, 한 몸처럼 붙어 있던 이의 귀에 닿지 않을 리 없었다.
아네타는 급히 칼로스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안색을 살폈다.
“칼로스, 어디 아파?”
“아니, 괜찮아.”
칼로스는 부정했지만 아네타는 믿지 않았다.
“괜찮기는. 말은 안 했지만 당신,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야.”
거칠어진 얼굴은 그나마 약과였다. 잠을 못 잤는지 붉게 핏발이 선 눈이나 핏기 없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지금 그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네타는 칼로스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난 그것보다는 당신이랑 떨어져서 아쉬운데.”
“이런 상황에서 농담하지 말고.”
“농담 같아? 난 늘 진심이라니까, 당신한테.”
칼로스는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선 잘도 웃었다. 그 모습에 아네타의 속은 타들어 갔다.
늦고 싶어서 늦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왔어야 했다는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래, 알아. 내가 어떻게 그걸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은 당신 몸부터 챙기는 게 우선이야.”
아네타는 깊은 한숨을 삼키며 칼로스의 손을 잡았다.
“당신, 대체 얼마나 잠을 안 잔 거야?”
“……대답 안 하면 안 돼?”
칼로스는 부러 눈매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거짓말을 하기 싫으니 침묵으로 대답을 피해 보려는 심산이겠지만, 어림도 없었다.
“응, 안 돼.”
“사실, 당신이 사라진 이후부터 한숨도 못 잤어.”
칼로스는 오늘도 아네타의 단호함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언제 대답을 피했냐는 듯 순순히 실토하는 그를 보던 아네타의 입술이 벌어졌다.
“식사는?”
잠도 이루지 못한 이가 끼니를 제대로 챙겼을 리 없었다.
아네타의 예상대로 칼로스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네타는 유구무언인 그를 보며 삼켰던 한숨을 도로 토해 냈다.
그리 강인하던 이가 몸도 못 가누는 이유가 있었다. 그와 정상적으로 말을 주고받고 있는 것조차 놀라울 지경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쓰러졌으리라.
“아무것도 안 먹은 건 아니야. 당신이 올 때까지 버텨야 했으니까.”
“뭘 먹었는데?”
“……물이랑, 사과.”
칼로스는 다른 건 넘어가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억지로 씹어 넘겼다며 자기변호를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아네타의 한숨은 더욱 깊어졌다.
“안 되겠어. 힘들겠지만 내 침실로 가자. 거기서 눈 좀 붙여. 식사는 일단 자고 일어난 뒤에 하고.”
거울 파편이 이리저리 널려 있는 데다, 몸 뉘일 곳 하나 없는 엘레나의 방에서 칼로스를 쉬게 할 수는 없었다.
아네타는 싸늘히 식은 바닥 위에서 그를 일으키기 위해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다 제 어깨에 둘렀다. 그러자 칼로스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가누었다.
아네타 혼자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네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칼로스를 부축하며 엘레나의 방을 나섰다.
저택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불이 켜져 있던 엘레나의 방과는 다르게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벌써 잠자리에 든 건 아닐 텐데.’
아네타는 칼로스를 보며 저택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잠들었어야 했다고 말하던 이적을 떠올렸다.
‘그 말은 저택의 사용인들을 모두 잠들게 했다는 말인데, 아직도 그 힘이 거두어지지 않은 걸까?’
아네타가 걱정하기 무섭게, 칼로스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사용인들은 모두 잠들어 있을 거야. 당신이 없는 동안 저택은 작은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고, 움직일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이었어. 또,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지.”
“조금 이상하네. 사흘씩이나 우리 두 사람을 찾으러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니. 특히 당신은 하루 이상 자리를 비우면 폐하께서 바로 찾으셨을 텐데. 그게 아니면 공작저에서 사람을 보내오거나.”
“이 일 역시 이적이 수를 쓴 게 아닐까 싶은데. 우리를 찾을 수 없게 말이야.”
이젠 비열한 짓을 일삼던 이적이 정말 영광이 맞는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곳에서 나온 거야? 이적이 순순히 내보내 주었을 리는 없을 텐데.”
“도박을 했어.”
“도박?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이적이 제시한 시간 내에 그의 본체를 찾아야 했어.”
아네타의 말에 느리지만 천천히 걸음을 내딛던 칼로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적의 본체가 따로 있었어?”
경악한 그의 시선이 아네타의 목에 걸린 목걸이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아직도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보던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목걸이는 단지 이적이 나와 지속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만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군.”
아네타는 이해했다는 듯 말하는 칼로스에게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이어서 궁금해하던 도박에도 대해서 말해 주자, 그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벙긋거리다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무모했어, 아네타.”
“하지만 그 덕분에 돌아올 수 있었지.”
“부정은 못 하겠네.”
아네타가 그런 선택을 한 것에는 필시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칼로스는 불필요한 말을 얹는 대신 몇 번이고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고마워, 아네타. 내게 다시 돌아와 줘서.”
“……이적이 그러더라. 고작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남자 하나 때문에 돌아갔다간 훗날 후회하게 될 거라고.”
“…….”
“하지만 내게 있어서 당신은 결코 그런 말로 표현될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후회하게 될 일도 없지. 내가 당신을 놓을 수 없어서 돌아온 거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
아네타는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칼로스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러곤 민망함에서 벗어나고자 멈추어 선 칼로스를 재촉했다.
“자, 이제 가던 길 마저 가자. 난 한시라도 빨리 당신을 재우고 싶거든.”
칼로스는 자신을 이끄는 아네타의 손길에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당신이 후회할 일, 절대 없을 거야.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여기서 얼마나 더 잘하려고?”
“내가 당신에게 보이는 모습들은 결코 꾸며 낸 것들이 아니야. 진심의 깊이는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법이지. 그러니 끝은 없을 거야. 약속할게.”
“믿어.”
두 사람은 대화를 끝낸 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아네타는 자신의 침실에 도착하자, 칼로스를 안으로 이끌었다. 침대에 앉혀진 칼로스는 곧장 아네타의 손목을 잡았다.
“같이 자. 그래야 잘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아네타는 칼로스가 해 달라는 대로 그의 곁에 누웠다. 침대는 넓었지만, 그는 아네타를 제 품에 꽁꽁 옭아매듯 끌어안았다.
아네타는 불만을 내비치기는커녕 그의 가슴을 다독여 주었다.
불안이 사라지자, 칼로스는 언제 불면의 밤을 지냈냐는 듯 잠에 빠져 들었다.
그는 잠든 와중에도 아네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아네타는 머리맡에 켜 둔 작은 조명 하나에 의지하여 밤이 새도록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명이 밝아오고,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는 시시각각 바뀌었다. 커튼을 쳐 주고 싶었지만, 품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그의 단잠을 방해하는 것은 없으리라.
아침이 되자 그 빛은 기어코 침대에까지 닿았다. 창가를 등지고 누운 칼로스는 열린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빛에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네타는 빛에 휩싸인 칼로스를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러다 여행을 끝낸 직후, 그가 지금처럼 빛을 뿜어내듯 창문을 등지고 서 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아네타는 칼로스를 보며 생각했었다. 그는 자신이 잡을 수 없는 빛이라고. 그러나 아네타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빛이 아닌, 자신의 숨이었음을.
눈앞에 보이는 빛이 아무리 찬란하다 한들, 숨을 놓아 버릴 수는 없었다.
“사랑해, 칼로스.”
아네타는 작은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했다. 잠든 그는 듣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어 왔지만, 아네타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사랑해.”
진실된 언어는 단순한 법이라는 속담처럼, 그 말만큼 그녀의 진심을 깊고 짙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또 없었다.
***
이사벨이 침실로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쯤 지나서였다. 자신이 이상한 장소에서 기절하듯 잠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이사벨은 눈을 뜨자 닷새나 지나 있다는 사실에 혼란을 보였다.
그러나 아네타는 칼로스 때문에 그녀를 돌려보냈고, 그가 깨어나고 나서야 사용인들을 불러 모아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있었다.
속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네타는 덤덤하게 이적으로 인해 겪은 일들과 영광의 소실을 알렸다.
이사벨과 사용인들은 후작가가 더는 영광의 가문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아네타가 겪은 일에 안절부절못했다.
아네타의 입에서 엘레나가 언급된 까닭이었다.
아네타가 품은 그리움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는 그들은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그러나 안타까움보다는 그녀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와 주었다는 기쁨이 더 컸다.
아네타는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은 사용인들을 위해 하루 휴가를 주었다. 끼니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들을 양일로 나뉘어 쉬게 한 까닭이었다.
아네타는 무리 없이 칼로스를 위한 수프를 요청할 수 있었다. 기름진 것을 먹이면 속이 뒤집어질 수도 있으니 최대한 깔끔한 것을 내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칼로스는 아네타와 후작가 주방장의 정성이 무색하게, 반도 채 먹지 못하고 스푼을 내려놓아야 했다.
발티모어 공작가의 집사 린든과 러셀의 명을 받은 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급하게 들이닥친 탓이었다.
“발티모어 공작 전하, 그리고 아데나워 후작 각하. 폐하께서 영광의 가문 가주분들의 소집을 명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