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밤이 없는 세계 (8)
엘렌이 화가 행세를 하며 보여 왔던 그림들은 벽의 중간에 나 있는 문을 기준으로 오른쪽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늘어진 그림들을 따라 흐르듯 시선을 옮기던 아네타는 유일하게 못 보던 그림을 하나 발견했다.
별이 총총히 박혀 있는 밤하늘 그림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리 이 세계에 밤이 없다고는 하나, 그와 관련된 그림도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럼에도 아네타는 그림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어쩌면 저게.’
이 세계에서 잃어버린 시간이라면 밤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네타는 홀린 듯 그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섬세하게 표현된 그림 위로 그녀의 손이 닿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작은 점처럼 찍혀 있던 별이, 쏘아진 화살처럼 긴 꼬리와도 같은 잔상을 남기며 일제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네타는 놀라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손이 떨어진 이후에도 그림은 생동감 있게 움직였다.
마치 그림이 아닌, 사라진 밤을 액자 안에 가두어 둔 것 같았다.
혹시나 하고 바로 옆에 걸린 다른 그림에 손을 대 봤지만, 그것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을 눈에 담은 아네타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본체보다 잃어버린 시간을 먼저 찾은 것 같으니, 일단은 엘레나가 시킨 대로 해 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이으라는 추상적인 힌트만 주었지,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아네타는 초조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혼은 곧 절정에 달할 터였다.
이적이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며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아네타는 도로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늘어진 그림들과 밤을 담은 액자. 그것들의 연관성을 생각하던 그녀의 눈이 일순간 홉뜨였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눈앞에 있는 그림들은 모두 시간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그림이 걸려 있는 순서는 엉망진창이었다.
아네타는 엘레나가 했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이으라는 건, 이 그림들을 순서에 맞춰 배열하라는 뜻이었을 거야.’
리페의 갤러리에서 가장 처음 발견했던 ‘여명’부터 엘렌이 선물이라며 주었던 ‘조조’와 ‘한낮’, 이곳에 오기 직전에 이적이 보여 주었던 ‘황혼’, 마지막으로 이 세계가 잃어버린 시간이 담긴 ‘밤’까지.
그림이 나타난 순서와 시간의 흐름은 정확하게 일치했다. 아네타는 그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아네타는 즉시 몸을 움직였다.
그림의 위치를 바꾸어 차례대로 나열하자, 각각의 그림에서 뻗어져 나온 빛줄기들이 일제히 한곳으로 모였다.
빛줄기가 모인 지점은 밤의 그림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적의 분하다는 듯 씩씩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제길!]
아네타는 갑자기 큰 소리가 머릿속을 울리자 이마를 짚었다. 찡그리듯 눈을 감고 있는 사이, 빛줄기는 폭발하듯 사위를 뒤덮었다.
빛은 곧 검게 변질되었다.
액자는 담고 있던 밤을 토해 내듯 까만 어둠을 쏟아 냈고, 그것은 곧 해를 집어삼켰다. 붉은 하늘이 삽시간에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이 세계의 밤을 되찾은 것이었다.
아네타는 이적의 본체를 찾을 시간을 벌었음을 깨달았다. 그를 증명하듯 밤은 갇혀 있던 만큼 더욱 강한 힘을 쏟아 냈다. 응축되어 있다 한 번에 터져 나온 어둠은 이적의 기운을 압도했다.
달빛은 오직 그녀가 있는 곳만을 비추었다.
‘이제 남은 건 이적을 찾는 것뿐이야.’
아네타는 뛰는 심장에 손을 올렸다. 가슴께를 지그시 누르며 심호흡하자, 복잡하게 엉켜 있던 머릿속이 그나마 말끔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네타는 먼저 ‘여명’을 발견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직전에 있었던 일은 데릭의 장례식과 엘레나의 방을 손수 복원한 것이 전부였다.
‘그래, 복원. 내가 이적과 접촉했던 건 분명 그때였을 거야.’
직접 만질 일 없었던 물건과 가장 많은 접촉이 있었던 것은 그날뿐이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그때 만졌던 물건들이 들어온 방도 이곳이었고, 그림 여명을 발견한 날도 같았다.
그때 아네타가 만지지 않은 건 무겁고 큰 가구들뿐이었다. 그것들까지 직접 옮길 수 없어 사용인들에게 부탁을 했었다.
아네타는 당시 자신이 옮겼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소파 위의 쿠션부터 엘레나가 사용했었던 이젤까지.
새로운 게 떠오르는 족족 그 앞에 섰던 아네타는 엘레나의 초상화 앞에 섰다. 그러곤 눈앞에 있는 그림 속 엘레나의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마침내 무언가의 형태가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아네타는 예고 없이 떨어진 벼락과도 같은 깨달음에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벌어진 입술을 자각할 새도 없이, 아네타는 그것이 도망이라도 갈세라 서둘러 등을 돌렸다.
서 있던 자리에서 몸을 돌리자, 보이는 것은 거울이었다. 크기가 조금 크긴 하지만, 그것 역시 아네타가 직접 가져다 놓은 것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거울 안에는 믿을 수 없게도 이적이 말한 것들이 담겨 있었다.
“너와 네가 그리워하는 대상, 그리고 그리워하는 대상의 물건의 합을 통해 이룰 수 있었던 일이지.”
목걸이에 들어갈 수 있었던 방법에 대해 말하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아네타는 멍하니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 거울을 걸고 뒤로 물러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목에는 엘레나의 목걸이가, 뒤로는 초상화가 있었다.
‘그럼 피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그 뒤로 자연히 떠오른 것은 이적이 준 힌트였다.
아네타는 크리스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그녀는 분명 그때 크리스의 집에서 본 적 없는 거울을 깨트린 뒤, 그 파편을 손에 쥐었다. 독주를 마시고 각혈을 했던 것을 제외하면, 그녀가 피를 흘린 건 그때가 전부였다.
‘그때의 일을 힌트랍시고 말해 주는 걸 보면, 이적의 본체는 역시 거울인가?’
설마 이렇게 간단히 풀릴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상대는 이적이었다.
그는 아네타가 의심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한 성격을 이용하기 위해 답을 쉽게 내어 준 뒤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아네타는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상대를 두고 철저히 자신이 가진 성격과 감정을 배제했다. 그리고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 사실을 추격하듯 바짝 쫓았다.
본체에 대해 감을 잡자, 그간 이적이 보였던 능력과 특징들이 떠올랐다. 그중 타인으로 모습을 바꾸고, 그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낼 수 있으며, 빛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가 명확하다는 사실은 모두 거울의 특성과 닮아 있었다.
또 거울은 때때로 이야기 속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네타는 어쩌면 자신이 이 세계로 온 것 역시 그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추측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다만, 엘레나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 중 하나를 제 손으로 부숴야 한다는 현실이 조금 슬플 뿐이었다.
하지만 아네타가 그것을 깰 수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작별이야, 이적.”
거울을 손에 든 아네타는 지금쯤 밤의 기운에 억눌려 있을 이적을 향해 중얼거렸다. 아무런 방해도 없는 것으로 보아, 힘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모양이었다.
아네타는 지금껏 당해 온 일에 대한 분노를 담아 거울을 바닥에 내던졌다.
가차 없이 패대기쳐진 거울에서 나는 요란한 소음은 마치 이적이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거칠게 튀어 오른 파편과 빛줄기는 불똥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녀를 삼켰던 세계 역시 조각나듯 갈라졌다. 그리고 그 조각난 파편은 주변의 풍경을 빠르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네타는 허물어지듯 사라져 가는 눈앞의 풍경을 보며, 자신의 추측과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승기를 거머쥔 이는 이적이 아닌 아네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을 휘감은 것은 검은 연기와도 같은 무언가였다.
아네타는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어딘가에서 홀연히 나타난 그것은 되찾은 밤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연기는 검은 연막처럼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존재였지만,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고요하고, 어딘지 모르게 정적이며, 아주 오래 전부터 겪어 온 것처럼 익숙했다.
아네타는 자신이 느낀 감상을 되짚다,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를 마중 나온 것은 이적이 만들어 낸 세계 따위가 아닌, 본래의 세계였다.
‘이제 정말 돌아갈 수 있겠구나.’
선택은 진즉에 끝나 있었다. 이적이나 이 세계에 남은 미련은 없었다.
아네타는 눈앞의 존재에게 주저 없이 제 몸을 내맡겼다.
어느덧 어둠은 눈가에까지 드리워졌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짧은 순간에 아네타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급하게 이적이 있을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쪽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거울이 보였다.
엉망으로 망가진 이적을 삼키는 건 주홍빛 불꽃이었다.
마치 황혼에 불타는 것 같았다. 그리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주의는 자신을 가두듯 안아 오는 존재에게로 옮겨갔다.
“칼로스.”
“아네타. 정말, 정말 당신인 거지?”
절박한 물음과 함께, 칼로스는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듯 연신 얼굴을 더듬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칼로스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과 온기가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아네타가 또다시 제 곁을 떠날세라, 그녀의 치맛단을 강하게 붙들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입으로는 연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놀란 아네타는 서둘러 그를 따라 몸을 낮추었다. 눈높이를 맞추기 무섭게, 젖어 있던 금안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안도의 눈물이었다.
“다시는 못 만나는 줄 알았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당신이 결국 그 세계를 택해 버린 줄 알았어.”
“내가 당신을 두고 그런 곳에서 행복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돼도, 난 반드시 당신 곁으로 돌아올 거야. 그러니 걱정 마, 칼로스.”
아네타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적신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의 얼굴은 못 본 사이에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마음이 찌르듯 아파 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아네타는 거칠어진 뺨을 쓸어 주었다. 그러곤 여전히 젖어 있는 눈가에 차례로 입을 맞추다, 그가 어느 정도 이성을 찾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다녀왔어, 칼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