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86화 (86/122)

86화. 밤이 없는 세계 (7)

긴 황혼의 시간이 끝나자, 붉게 물들었던 세상에 아침이 찾아왔다.

아네타는 하루 종일 이적을 기다렸지만, 그가 나타난 것은 늦은 오후였다.

“내가 말한 대로 생각은 잘 해 봤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낸 이적은 기다린 사람의 속도 모르고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하지만 여전히 내가 돌려줄 수 있는 답은 하나야. 난, 역시 돌아가야겠어. 그러니 당장 이 세계에서 나를 내보내 줘.”

이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세계에서는 네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어. 그런데 기어코 돌아가겠다고? 고작 칼로스 발티모어 하나가 없다는 이유로?”

“그 하나가 이제 내겐 세상 전부가 되어 버려서 말이지. 그걸 아니까 너도 내 앞에서 칼로스인 척 연기한 거잖아.”

“네가 없으면 그자는 새로운 사랑을 찾을 텐데. 인간은 본래 그런 존재니까.”

“네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까 더더욱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사람 곁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걸 상상해 봤는데, 그것만으로도 배알이 뒤틀려서 말이야.”

아네타는 평소 사용하지 않던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네가 아무리 날 설득하려고 해도 번복은 없어, 이적.”

“……그럼 어쩔 수 없지.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는 수밖에.”

아네타의 단언에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던 이적은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태도에 아네타는 불안감을 느꼈다.

“방법은 간단해. 내 본체를 찾아서 부수면 끝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와 네 가문은 영영 나를 잃게 될 거야. 그 말은 즉, 아데나워는 더 이상 영광의 가문이 아니게 된다는 뜻이지.”

아니나 다를까. 이적은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패를 꺼내 들었다.

“스스로를 인질로 삼겠다는 거야?”

아네타는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또다시 인간 따위에게 얽매일 바에야, 차라리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나아. 어떻게 보면 그것도 해방의 일종이니까.”

언제는 제 이름 아래 긴밀히 얽힌 관계라더니. 이적은 그녀를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목적을 이루자 본심을 감추지 않았다.

“부술 물건은 신중하게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하나만 선택할 수 있거든.”

여유를 되찾은 이적은 오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러곤 그녀를 굽어보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명성은 고결한 인물의 마지막 약점이 된다는 말이 있지. 너는 어때? 이전의 영광을 누릴 수 없는데, 이래도 돌아가는 걸 택할 건가?”

“못 할 건 없지. 어차피 넌 없다고 생각한 존재였으니까.”

“없던 걸 찾은 만큼, 있고 없고의 차이를 누구보다 명확하게 느꼈을 텐데. 이곳에 남으면 넌 영광은 물론, 원한다면 황위까지 가질 수 있어.”

이적이 협박 다음에 시도한 것은 회유였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지.”

“아니. 황위 역시 필요 없어. 말이 좋아서 황제지, 너는 이 가짜 세계에서 언제든 나를 가지고 놀려고 들 테니까. 너에게 휘둘릴 바에야 그런 자리, 안 받고 말지.”

가장 고귀하다 일컬어지는 자리마저도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내 동의를 얻으려 하는 걸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모양인데. 포기해.”

회유가 수포로 돌아가자 이적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영광의 가문이라는 명예? 물론 중요하지. 네 이름은 수백 년 동안이나 가문의 이름 앞을 지켜 왔으니까. 하지만 영광이 없다고 가문이 망하는 것도 아니잖아?”

자신을 대하는 다른 이들의 태도에 약간의 변화가 있을 거라는 건 아네타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태도를 달리 해 봤자, 손해를 보는 건 본인들이었다.

“지금껏 내 손으로 이루어 온 것들이 몇인데, 설마 네가 없다는 이유 하나로 다른 가문에 밀릴까.”

아네타는 가문의 위치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명성은 영광의 존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설령 황제라 해도 아데나워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영광이 없어도 그 사실은 변치 않았다.

존재는 증명되었지만, 실체는 보이지 않는 영광을 앞세워 얻은 것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아네타는 그런 것들보다, 그동안 자신이 일궈 온 것들을 믿었다. 그 믿음은 아네타가 이적의 협박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유였다.

“난 이제 그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 그 길을 가로막는다면, 나는 얼마든지 널 포기할 수 있어.”

아네타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적의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를 설득하려던 기색은 완전히 꺾인 듯했다.

고개를 돌린 이적은 힐끗 창밖을 보았다. 아네타의 시선도 같은 곳을 향했다. 바깥은 또다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좋아, 네 결정을 존중하지. 더 붙들고 있어 봤자 시간 낭비일 테니까.”

아네타는 그걸 이제야 깨달았냐는 말을 삼켰다. 이적의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순순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모습에 아네타는 미간을 좁혔다.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 줬으니 이제 그만 내 본체를 찾으러 가 봐도 좋아. 단, 시간제한이 있어.”

“시간제한?”

“없으면 내게 너무 불리하잖아. 황혼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주지. 그때까지 널 방해하지 않을게. 단, 아침이 밝아오면 네게 주어진 기회는 끝이야. 영영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

역시나 이적은 그녀를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어딜 봐도 무엇인지 모를 물건을 찾아야 하는 내 쪽이 더 불리하지 않나?”

“싫으면 말아. 강요는 안 해.”

“하.”

아네타의 반박에 이적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뻔뻔한 응수에 아네타는 말문이 막힌 듯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온 한숨을 토해 냈다.

“내가 거절하면 어쩔 거지?”

“어쩌긴. 네가 내 본체를 찾을 수 없도록 방해해야지. 난 널 이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할 자신이 있거든.”

이적이 만든 세계에서 방해까지 받으며 본체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네타는 이적을 노려보았다. 제 영광이라는 존재가 이토록 치졸한 성정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적의 등장에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방적이긴 하지만, 꽤 오랫동안 지켜봐 온 정이 있으니 작은 힌트 하나 정도는 주지. 나는 사실 감정의 동조만으로 너를 데리고 올 수 있는 강제적인 힘 따위는 없어. 그럼에도 강행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네 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

이적은 제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놀렸다. 마치 적선이라도 베푸는 투였다.

아네타는 이적에게 맞서 대거리하는 걸 포기하고 창밖을 확인했다. 검붉은 하늘은 슬슬 밝아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았다. 더는 그와 실랑이를 벌일 시간조차 없었다.

“네 제안을 받아들일게. 대신,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해.”

“너야말로.”

아네타의 선택은 명백한 도박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아무것도 못할 바에야 차라리 뭐라도 시도해 보는 게 나았다.

결론을 내린 아네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히 방을 나서려는 그녀의 등 뒤로 이적의 얄미운 목소리가 꽂혔다.

“잘해 봐. 행운을 빌어 줄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도 한다. 아네타는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무시하며 방을 나왔다.

‘먼저 어머니의 방부터 확인해야 해.’

목적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거기만큼 의심이 가는 곳은 없었으니까. 환영까지 동원해 가며 그곳으로 유인한 까닭이 분명 있을 것이다. 아네타는 뜀박질을 시작했다.

“아가.”

그러다 마주친 것은 엘레나였다.

아네타는 자신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흠칫 굳었다. 엘레나는 그녀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복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적이 약속을 어기고 수를 쓰는 걸까.’

그리 의심하며 걱정하던 찰나였다.

“가는 거니? 이제 정말 이별이구나.”

엘레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한 투로 물었다. 감추지 못한 아쉬움이 표정을 통해 드러났지만, 아네타를 잡을 기미는 없어 보였다.

엘레나는 아네타의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네타는 이곳으로 오게 된 과정이 떠올라 화들짝 놀랐지만, 따스한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치 안심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자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그때였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이으렴. 그게 잠시나마 그를 막아 줄 거야.”

엘레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아네타의 어깨가 다시 경직됐다. 복도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지만, 엘레나는 꼭 누군가가 듣기라도 할 것처럼 행동했다.

그 누군가는 필시 이적일 터였다.

아네타는 수수께끼 같은 말의 진의를 묻고자 입술을 달싹였지만, 도로 입을 닫았다.

그사이 엘레나는 아네타 쪽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네타. 짧은 시간이었지만, 널 다시 만나게 돼서 진심으로 행복했단다.”

엘레나는 아네타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인사는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구나. 어서 가 보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니.”

엘레나는 아네타가 처한 상황을 상기시켜 주며 그녀의 뒤로 가서 섰다. 여린 두 손으로 등을 떠밀자, 아네타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뒤를 돌아보았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어요. ……사랑해요, 엄마.”

다시 만날 수 없을 엘레나의 모습을 두 눈에 새기며, 아네타는 과거에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전했다.

일순간 엘레나의 입술이 놀라 벌어졌지만, 그녀는 곧 여느 때보다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네타는 그 웃음을 마지막으로 다시 엘레나의 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아네타의 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같은 자리에 서서 마지막이 될 딸의 모습을 지켜보던 엘레나는 중얼거렸다.

“아가, 내 아가. 진심으로 네가 행복해지길 빌게.”

간절한 염원이 텅 빈 복도를 울렸다.

***

아네타는 부러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지만, 머릿속은 엘레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엘레나는 이적의 말대로 진짜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어머니를 두고 돌아서는 과정은 생각보다 그리 힘겹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어머니가 없는 현실에 익숙해져 가고 있던 게 아닐까.’

이제 남은 미련마저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레나의 방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문은 쉽게 열렸다.

엘레나와 대화를 한 까닭에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아네타는 긴장으로 인해 입안이 메마르는 것을 느끼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적의 본체와 엘레나가 말했던 ‘잃어버린 시간’. 아네타는 둘 중 무엇도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하나라도 찾아낼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스리며 아네타는 차분하게 엘레나의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살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눈에 익은 그림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