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밤이 없는 세계 (6)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인간은 내뱉는 한 마디, 별거 아닌 움직임 하나에도 순간의 감정을 반영해. 그러니 아무리 같은 일을 겪어도 때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거고.”
이적은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더 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그런데 너는 아니었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배려하고 물러서는 태도를 보였지. 그건 분명 평소에 칼로스가 보이던 행동이었지만, 세르세가 언급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지더라고.”
만약 진짜 칼로스였다면 서운함을 가감 없이 표현했을 터였다.
그는 언제든 제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했고, 질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질투의 대상은 대부분 이전보다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진 세르세였다.
이적이 이런 식으로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아네타는 이적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다른 이들처럼 단순히 가짜라고 생각하고 넘어갔겠지.’
아네타는 굳이 그 사실을 이적에게 말하지 않았다. 언급해 봤자 자신에게 이로울 것 하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보다, 네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얼마든지 물어 봐. 그간 멍청하거나 시시한 녀석들만 보다가 모처럼 너 같이 똑똑한 주인을 만나서 기분이 좋으니까.”
이적은 참고로 네 아비인 데릭 아데나워의 경우는 전자이며, 어떻게 이 집안에서 그런 녀석이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지만, 아네타는 깔끔히 무시하며 물었다.
“이제 와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뭐고, 네 진짜 본체는 뭐지? 이 목걸이는 본체의 대용품에 불과한 것 같던데.”
“벌써 그 목걸이가 내 본체가 아니라는 것까지 눈치챈 거야? 기대 이상이네.”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이적은 과장되게 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모습이 곱게 보이진 않아, 아네타는 미간을 좁히며 대답을 종용했다.
“본체가 무엇인지 밝힐 생각은 없어. 다만, 본체와 그 목걸이의 팬던트에 박힌 보석 안을 넘나들었다는 것만 알아 둬. 그리고 그건 너와 네가 그리워하는 대상, 그리고 그 대상의 물건의 합을 통해 이룰 수 있었던 일이지.”
이적은 아네타에게 선을 그었다. 그에 아네타가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이적은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시작했다.
“모습을 드러낸 건 이방인인 네가 내 주인 자리를 차지해서야. 네가 가진 낯선 기운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나를 깨웠거든. 그 이후로 너를 지켜보며 힘을 모았고, 네가 내 본체와 접촉하길 기다렸지.”
이방인. 이적이 자신을 그리 칭하는 이유가 환생자이기 때문임을 모를 수 없었다.
아네타는 자신이 이미 이적의 본체와 접촉했음을 예감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적은 엘레나와 닮은 얼굴로 비죽 웃어 보였다. 곧 이어 그의 입을 통해서 아네타를 동요하게 만드는 말이 나왔다.
“아마 거기서부터 네가 아는 이야기가 깨진 거겠지.”
“내가 아는 이야기라니? 설마…….”
아네타는 이적의 입에서 원작이 언급되자 놀라 물었다. 이적을 응시하는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설마가 맞을 거야. 네가 ‘원작’이라고 부르던 이야기 말이야.”
“네가 원작을 어떻게 알고 있지? 그보다, 원작은 에레즈 바우터가 깨 버린 거 아니었어? 나는 줄곧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원작은 네가 이 세계로 넘어오는 순간의 기억을 읽어서 알고 있었어. 그게 깨진 건 이방인인 네가 ‘아네타 아데나워’로 환생함으로써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고.”
이적은 설명했다. 그녀의 환생이 원작에 나오지 않았던 이적을 깨운 것처럼 변수가 또 다른 변수를 불러왔다고. 나중에 태어난 에레즈 바우터의 성별이 바뀐 것도 그중 하나였다.
“본격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에레즈 바우터의 몸에 누군가가 들어갔을 때부터야. 그 녀석은 제 조부마저 죽였으니까. 진짜 ‘에레즈 바우터’였다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지.”
“에레즈 바우터가 그런 최후를 맞이한 건 변수 같은 게 아니라는 뜻이네.”
“뿌린 대로 거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이적은 제법 신랄하게 에레즈를 평했다.
“악행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네게 빠진 칼로스 발티모어의 마음을 돌리진 못했어도 목숨만은 부지했을 테니까.”
“그럼 나를 이 세계로 끌어들인 진짜 이유는 뭐지?”
“말했을 텐데. 널 위해서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날 위해서 이런 일을 벌였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을 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으면서, 그 말을 믿어 주길 바라는 거야?”
아네타는 이적의 주장을 불신하며 코웃음을 쳤다.
이적은 그제야 아네타를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는지, 두 손을 올리며 항복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인간에게 소유된 채로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다른 영광 녀석들과는 달라. 그래서 자유를 되찾으려 했지. 아데나워가의 마지막 핏줄인 너를 그 세계에서 빼내면 나는 해방될 수 있으니까.”
이적은 언제 거짓을 말했냐는 듯 순순히 본래의 목적을 털어놓았다. 다른 영광들을 언급할 때는 그들을 업신여기는 사실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래서 엘레나 아데나워를 미끼로 이 세계에 네 발을 묶어 두려고 했지. 아, 그 갤러리의 주인이 뜬금없이 남성 화가의 그림을 들였던 것도 내가 벌인 짓이야.”
“이 세계에 밤이 없는 이유는?”
“내 능력이 약해지는 시간 따위, 굳이 만들 필요는 없지. 밤에는 힘의 근원인 빛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너도 이미 나를 통해 그 불쾌한 기분을 느껴 본 적 있잖아?”
아네타는 밤이 되면 능력이 약해진다는 이적의 말을 듣고 급히 저택으로 돌아가던 엘렌의 모습을 떠올렸다.
“황혼을 그려야 한다느니,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느니. 잘도 그런 말을 했네.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목걸이 안에 들어가 있는 게 힘을 깨나 소비하게 만들어서 말이야. 해가 지면 목걸이와 화가 엘렌, 두 가지를 모두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니 자리를 뜬 거였지. 반대로 해가 지기 직전인 황혼 때에는 걷잡을 수 없이 힘이 증폭하고. 뭐, 에레즈 바우터의 능력쯤이야 언제든 튕겨 낼 수 있지만.”
이적은 거드름을 피우듯 힘이 들어간 어깨를 으쓱였다. 이윽고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를 따라 아네타의 시선이 움직였다.
“질문에 답도 해 주었겠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어.”
“다시 앉아 줘. 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
“그건 내일로 미루는 걸로 하지. 기분 탓에 나도 모르게 너무 많은 걸 알려 줬거든.”
“이적.”
아네타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차피 돌아가는 방법을 물으려는 거 아닌가? 칼로스 발티모어에게 말해 둔 게 있으니 단 한 번 기회를 주긴 하겠지만, 쉽게 보내 줄 수는 없지. 네가 가면 내 계획이 모두 어그러지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고는 기분 탓이랍시고 너무 많은 걸 알려 준 것 같은데.”
“상관없어. 어차피 넌 내가 방법을 일러 주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이적은 서 있는 자리에서 아네타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다시 자리에 앉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천천히 잘 생각해 봐. 네 어미를 이곳에 두고 혼자 갈 수 있을지. 고작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남자 때문에 어머니를 두고 돌아갔다간, 훗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칼로스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내 눈에는 그저 사랑에 눈 먼 인간 남자일 뿐이야. 따지고 보면 네 마음을 흔들어 내 계획을 다 망친 것도 그 녀석이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지. 게다가 인간 주제에 쓸데없이 감이 좋아서 내 기운을 감추고 다니는 수고까지 해야 했고.”
이적은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지는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길드장의 비서라며 나타났던 때를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동안 네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다른 영광을 사용하는 데에 협조해 주었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어.”
이적은 알아 두라는 식으로 통보했다.
“이제 정말 가 봐야겠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하길 바라지.”
아네타는 이전과 다름없는 일관된 태도로 거절하려 했지만, 이적은 생각보다 더 안하무인이었다.
이적이 더는 능력을 감출 필요가 없다는 듯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자, 아네타는 타는 목을 달래기 위해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찻물이 메마른 입 안을 적셨다.
아네타는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키는 것을 느끼며 응접실을 나섰다. 이적을 상대하느라 기운이 빠진 탓일까. 침실까지 와서 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던지는 별거 아닌 과정마저 힘겹게 느껴졌다.
이적을 통해 많은 걸 알아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처음부터 나가는 방법을 물으면 가 버릴 것 같아 먼저 궁금증부터 풀었더니 그런 식으로 피할 줄이야.’
아네타는 피로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소란한 마음 탓일까. 시간이 갈수록 정신은 또렷해졌다.
아네타는 이적이 왜 그런 계획을 세웠지는 알 것 같았다. 만약 칼로스에게 마음을 주기 전이었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 세계를 택했을 터였다.
‘다른 이들이 다 가짜여도 어머니 한 분만 진짜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사실이 문제였다. 가짜인 이들 사이에 칼로스가 있었으니까.
아네타는 이적의 말대로 칼로스와 이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데릭의 장례식 이후 감기 몸살에 걸렸을 때 꾸었던 꿈이었다.
꿈에서 그는 아네타가 아닌 다른 여인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가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 미소 짓는 순간, 아네타는 자신이 그 꿈과 관련하여 칼로스에게 충동적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당신의 미래에는 내가 없는 것 같아.”
감정에 목이 메인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가슴 아니면 그 언저리. 아니, 어디라고 딱 짚어 낼 수 없는 곳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툭하니 얹어진 것처럼 내뱉는 숨마저 벅찼다.
아네타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실현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칼로스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적은 아네타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언제 헤어질지 모른다는 말 따위를 한 것이었겠지만, 아네타는 그가 의도한 바와 다르게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더 단단히 굳혔다.
칼로스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아픈데, 자발적으로 이 세계에 갇혀 그를 버리는 선택을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