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밤이 없는 세계 (5)
아네타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이야 뻔했다. 그녀의 걸음은 자신이 이 세계에 오기 직전에 있었던 장소이자, 동요의 원인이 있을 방으로 향했다.
내딛는 걸음은 느렸고, 보폭은 좁았다. 지나온 길마다 망설임이 뚝뚝 떨어져 형체 없는 자취가 남았다.
이적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레나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딜 봐도 함정일 게 뻔해 응하지 않으려 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아네타는 이적의 말이 거짓일 경우를 생각했다. 아무리 강제로 끌려온 세계라고 하더라도, 이 세계에 엘레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우습게도 그녀의 마음은 그랬다.
어느덧 아네타는 엘레나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차가운 문고리를 잡은 손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 같았다.
아네타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이게 뭐라고 이리도 겁을 먹는지 모를 일이었다.
천천히 숨을 고른 아네타는 감았던 눈을 떴다. 결연한 얼굴로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매끄럽게 열린 문 사이로 익숙한 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앞치마를 맨 채 이젤 앞에 앉아 있던 여인은 누군가의 출입에 반응해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따스한 온기를 품은 녹빛 눈동자가 휘었다.
“아가, 일어났니?”
걱정이 무색하게, 이적이 말했던 그대로의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
밤이 없는, 낮의 세계.
이적이 ‘이상 세계’라고 명명한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것이었다.
바깥세상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아네타는 이곳에서 며칠을 보냈다. 엘레나와 차를 마시고, 또 외출을 하고, 정원에서 산책을 하기도 했다.
지금껏 바라 온 모든 염원이 반영된 세계에서의 생활은 완벽했다.
그러나 아네타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본래의 세계와 그곳에 남겨 두고 온 존재를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잠자코 숨죽이고 있는 이유는 기회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돌아갈 수 있는 기회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적을 찾을 기회를.
‘그때까지, 아주 잠시만 어머니와 함께 있는 거야.’
아네타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보며 다짐했다.
등을 기댄 벽에서 올라오는 약간의 냉기는 이곳이 그저 그런 허상이 아님을 상기시켰다.
처음 엘레나와 마주했을 땐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처했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이 세계에 데릭은 없었고, 엘레나는 죽을 때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아네타를 부르는 호칭 역시 그대로였다. 엘레나는 간혹 아네타를 아가라고 불렀다.
‘이제는 모녀가 아닌, 자매에 가까운 모습이려나.’
아네타는 엘레나가 살아 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와 다르게 이곳에서 그리는 그림들은 한층 더 생기 있고 화려했으며, 아름다웠다.
그림을 그린 엘레나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히려 생전의 모습보다 더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사실 엘레나가 환영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이적이 장담했다고는 하지만,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여인이 진짜 엘레나가 맞다면 안심이었다. 어둠이 걷힌 얼굴을 보게 되었으니까.
아네타는 엘레나가 어디에서든 진심으로 웃길 바랐다.
지금 모습 그대로.
“우리 딸, 요 며칠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 같네.”
상념을 깬 것은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던 엘레나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말을 걸어오면서도 푸른빛이 가득한 정원의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불편하세요?”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숄의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네타는 그 별것 아닌 풍경마저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물었다.
“어머, 얘도 참. 그럴 리가 없잖니.”
엘레나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었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발티모어 공작 전하께서 오실 텐데 나와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하는 말이야.”
아네타는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어제 방문을 알려 온 칼로스의 존재를 다시금 떠올린 아네타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가 예고한 시간까지 십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어머니 말씀대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이제 슬슬 가 봐야겠어요.”
“좋은 시간 보내렴.”
아네타는 한창 좋을 때라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엘레나를 뒤로 하고 걸음을 떼었다.
엘레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 세계의 칼로스를 만나는 데에 설렘은 없었다.
아네타는 그가 자신이 아는 칼로스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본래의 칼로스라면 그 어떤 과정도 거치지 않고 곧장 자신을 만나러 왔을 테니까.
굳이 먼저 그를 찾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아네타는 응접실을 향해 걸어가며 이곳으로 오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경악과 절박함이 뒤섞여 있던 칼로스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기다려 줘, 칼로스. 반드시 당신 곁으로 돌아갈게.’
아네타는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 세계의 칼로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아네타가 상기한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적의 말이었다.
“이를 어쩌나. 나를 제어하기엔, 그쪽에 있는 나의 주인이 완벽하게 나와 이어져 있지 않은데.”
아네타는 이적이 칼로스에게 했던 말의 의미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머릿속에 불현듯 하나의 가정이 스쳤다.
‘만약, 아주 만약에 이적의 본체가 따로 있는 거라면?’
영광과 관련해서 ‘이어져 있지 않다’라는 말이 나올 일은 그뿐이었다.
아네타는 손을 올려 제 가슴께를 더듬었다. 어렵지 않게 잡힌 목걸이의 펜던트를 매만지며, 그녀는 그간 답도 구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 두어야 했던 일을 떠올렸다.
단 한 번도 이적과 감정을 공유하거나, 교감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영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지.’
따로 본체가 있는 거라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이미 칼로스와 함께 목걸이가 영광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지만 의심해 볼 가치는 있었다.
영광이 본체를 두고 대체품을 통해 능력을 발현할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지만, 이제 이적이라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아네타는 이곳에 온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적을 생각하며 미간을 좁혔다. 제멋대로 나타나 제멋대로 이 세상에 끌고 와 버린 이적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나 왔어, 아네타.”
“……어서 와.”
그러는 사이 기다리고 있던 이가 열린 문 사이로 들어왔다.
아네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로스를 맞이했다. 그는 지난 일은 모르는 것처럼 태연해 보였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네타는 그가 진짜가 아니라는 데에 확신을 실었다.
아네타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그러고 보면 이적은 진짜 엘레나와 만나게 해 주겠다고 장담했지만, 다른 이들과 관련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어머님께선?”
칼로스는 엘레나의 존재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셔.”
“오늘도? 완성이 되면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나중에 한 번 여쭤 볼게.”
아네타는 능숙하게 그의 말을 받아넘기며 행동 하나하나를 살폈다. 특별할 것 하나 없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자꾸만 이질감이 들었다.
그 이질감의 원인 중 하나는 시녀가 차를 내오는 순간 눈앞에 드러났다.
칼로스는 왼쪽으로 놓인 찻잔의 손잡이를 보고 오른쪽으로 돌려 쥐었다. 다른 이가 본다면 오른손잡이인 그가 그리 행동하는 것에 아무런 의문도 느끼지 않았을 테지만, 아네타는 아니었다.
칼로스는 손잡이가 달린 잔을 사용할 때만큼은 왼손을 사용했다. 서류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까닭에 제대로 차를 마실 시간조차 없어 굳어진 습관이었다.
아네타가 왼쪽으로 놓인 찻잔 손잡이를 보고도 시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언젠가부터 오른손으로 찻잔을 드는 것이 어색해졌다고 말해 왔고, 그녀는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네타? 왜 그래?”
아네타가 제 손에 들린 찻잔을 응시하자, 칼로스는 물었다. 릴리 역시 무슨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건지, 나가지 않고 의아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수고했어, 릴리. 이제 그만 나가 봐도 좋아.”
아네타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릴리가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응접실을 나선 이후에도 아네타는 칼로스를 티 나지 않게 관찰했다.
그는 잔을 놓았다가 다시 드는 때에도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사용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네타가 칼로스와의 대화를 통해 느낀 것은 하나였다.
그는 지나치게 ‘칼로스 발티모어’라는 틀에 박힌 모습을 보였다.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있어? 연주회 티켓을 하나 얻었는데, 당신이랑 함께 가고 싶어서.”
아네타가 자신을 두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칼로스는 아네타의 앞으로 티켓 두 장을 내밀었다.
아네타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것을 힐끗 보다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르세 라폴리. 그는 칼로스의 반응을 떠보기에 좋은 상대였다.
“미안. 주말엔 세르세와 시간을 보내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 따라 조금 이상해서 말이야. 기분을 좀 풀어 줘야 할 것 같아. 당신도 알다시피 내게 어린 시절 친구라고는 그 애 하나뿐이니까.”
“그래? 그런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 다음 주는 어때?”
칼로스는 세르세가 언급되면 어김없이 미간을 찌푸리곤 했지만, 눈앞에 있는 그는 전과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뭐든 뜻대로 하라는 듯 순순한 얼굴이었지만, 아네타는 거기에서 감을 잡았다. 칼로스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거절할게. 내가 너랑 함께 외출 같은 걸 할 일은 없을 것 같거든.”
아네타는 그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말했다.
“장난은 그만 치는 게 좋을 거야. 연기를 하려면 처음처럼 내가 모르는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썼어야지, 이적.”
아네타가 이적을 언급하는 순간 칼로스의 몸이 밝게 빛났다. 그 빛이 사그라드는 것과 동시에 칼로스의 모습이 사라지고, 엘렌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떻게 알았지? 연기는 완벽하게 했던 것 같은데.”
익숙한 모습을 한 이적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불만을 보였다.
“너무 완벽해서 탈이었어. 마치 인형처럼 주입된 무언가에만 최선을 다하려 했지. 보나마나 칼로스가 오른손잡이이니 무조건 오른손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고.”
아네타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이적의 반응을 살피니 그는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