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83화 (83/122)

83화. 밤이 없는 세계 (4)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닌 엘레나 아데나워가 그린 그림이지. 네가 어릴 때 보았던 그 그림 말이야.”

“헛소리. 비록 몇십 년이 지난 일이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때 황혼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즉시 불태워졌고, 완성조차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게 같은 그림이라는 거지?”

데릭은 엘레나가 죽자마자 저택에 있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끌어내 불태웠다. 그중 가장 마지막에 처리된 것이 그림이었다.

아네타에게 들어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칼로스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아네타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불신과 불쾌함으로 얼룩진 얼굴로 이적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네타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을 저리도 강하게 주장할 리 없었다. 칼로스는 이적의 반응을 기다렸다.

“저 그림을 비롯해서 내가 네게 보여 주었던 그림들은 모두 네 어미가 살아 있었다면 그렸을 것들이지. 나는 그저 죽음으로 인해 세상에 나오지 못한 것들을 실체화했을 뿐이고.”

아네타의 반론에도 이적의 태도는 당당했다.

“황혼을 보면 알 텐데.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아무리 그림을 그린 본인이라고 해도 저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그림을 그려 낼 수 있을까? 대고 그린다고 해도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그건 네 말대로 오래 전에 불타서 사라지기까지 했잖아?”

이적은 이것이 자신이 보일 증거라고 말했다.

아네타는 황혼을 노려보듯 살폈다. 엘레나가 투병 중 통증에 못 이겨 붓을 잘못 움직인 탓에 그어진 선까지 그림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도무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와 어머니를 만나게 해 준다는 거지? 웃기지도 않는 연기까지 해 가면서 정성을 들인 이유가 뭐야.”

“목적이라니. 나는 단지 널 위하는 마음에서 나선 것뿐이야, 아네타. 우리 둘은 내 이름 아래 긴밀히 엮인 관계니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걸 해 주려던 것뿐이라고.”

아네타는 순수한 목적이었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 눈치였으나, 이적은 상관없다는 듯 제 할 말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시간과 힘을 많이 들이긴 했지만 의심이 많은 주인을 설득하려면 이 정도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어? 덕분에 넌 내가 불가능한 일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됐잖아.”

이적은 칼로스를 힐끗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누구 때문에 점점 잊혀져 가던 불쌍한 네 어미의 존재를 다시 상기시켜 줄 필요도 있었고.”

칼로스는 명백히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임을 눈치챘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불안한 눈으로 아네타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네타를 현혹하려드는 낌새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엘레나 아데나워를 이 세계에서 되살릴 수는 없어. 하지만 원한다면 널 이상이 실현된 세계로 데려가 줄 수 있지. 난 그곳에서 엘레나 아데나워는 물론 네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이루어 줄 거야.”

이적은 자신이라면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네타의 눈에 불신이 남아 있는 것에, 이적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어떻게 하면 네가 날 믿을 수 있을까. 아, 그래. 내 이름과 존재를 걸고 맹세하지. 너를 반드시 진짜 엘레나 아데나워와 만나게 해 주겠다고.”

이 세계에서 이름을 거는 행위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적은 이름뿐만 아니라 제 존재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걸었다. 아네타의 눈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자, 이제 결정해야 할 때야. 미리 말해 두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적은 발치에서 너울대는 붉은빛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가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은 딱 황혼이 저물 때까지야. 기회는 단 한 번, 지금 이 순간뿐이고.”

칼로스의 시선이 이적의 뒤로 보이는 창밖으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이적의 말대로, 검붉은 하늘은 곧 어둠으로 물들 터였다.

“한 번 상상해 봐. 엘레나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더불어 무엇도 엘레나와 네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을 갈라놓을 수 없고, 위협할 수도 없지. 철저히 너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니까.”

“…….”

아네타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거절하지 못하는 모습은 그녀가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아네타.”

칼로스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는 심정을 드러냈다. 팔을 붙잡자 아네타는 고개를 돌렸다.

“혹하면 안 돼. 알지?”

다행히 아네타는 느리지만 명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히 가라앉았다.

아네타는 이적의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눈을 돌렸다. 그러나 아네타의 거절보다 이적의 말이 더 빨랐다.

“대답은 됐어. 너는 이미 동요했고, 나는 그것을 들여다봤으니 조건은 성립됐거든. 다시 말하면, 이제 네 의사는 필요 없다는 뜻이지.”

이적은 처음부터 필요했던 건 약간의 동요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럴 리가. 영광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 할 텐데?”

칼로스는 다른 영광들의 경우를 들며 반박했지만 이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를 어쩌나. 나를 제어하기엔, 그쪽에 있는 나의 주인이 완벽하게 나와 이어져 있지 않은데.”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거기까지 알려 줄 이유는 없지. 안 그래?”

이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뒤에 서 있던 엘레나의 환영이 움직였다.

“어딜!”

낌새를 눈치챈 칼로스가 서둘러 환영을 향해 창공의 힘을 발현하며 아네타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소용없었다.

환영은 창공의 힘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아네타를 지키듯 서 있던 칼로스 역시 환영에게 아무런 해를 입힐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환영은 그대로 칼로스를 통과했고, 바로 뒤에 있던 아네타를 끌어안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에 아네타는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아네타는 칼로스와 다르게 자신을 통과하지 않는 환영의 팔을 뒤늦게 움켜쥐었다.

환영을 밀어내려 했던 그녀는 어째서인지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네타!”

칼로스는 급히 몸을 돌렸다. 아네타를 빼내기 위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환영에게서 터져 나온 빛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눈이 멀듯 환한 빛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을 뒤덮었다.

한 순간에 증폭되듯 사위를 물들였던 빛이 꺼지는 순간, 아네타의 신형도 함께 사라졌다.

칼로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가 사라진 빈자리에 허망한 시선을 던졌다.

“걱정 마라. 내 주인은 이 세계에서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그곳에서 누리게 될 테니까.”

“그걸 말이라고!”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위로랍시고 꺼낸 말에 칼로스는 희번덕 뜬 눈으로 이적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주먹이 이적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이적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치며 미동도 없이 서 있었고, 칼로스는 그대로 그를 통과했다.

“젠장!”

실재하지 않는 존재에 타격을 입힐 방법은 없었다.

칼로스는 자신이 이적의 몸에 손도 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적의 머리가 있는 높이의 벽을 강하게 친 그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번에도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만약 주인이 그 세계에서 나를 찾아낸다면, 단 한 번 선택지를 주도록 하지. 돌아올지 말지는 그녀의 선택에 달렸지만 괜한 기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그곳은 주인이 그토록 소원하던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계라고. 그런 곳에서 어느 누가 나오고 싶겠어?”

이적은 코앞에 서 있는 칼로스 보란 듯이 두 팔을 교차해 팔짱을 꼈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것을 넘어서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이 세계에 남은 거라곤 고작 칼로스 발티모어, 너 하나뿐인데.”

이적은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될 거라며 칼로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발언을 서슴없이 뱉었다.

창공이 분노하듯 웅웅거리며 공기를 울려 댔지만, 그마저도 가볍게 무시했다.

“아네타 아데나워는 이제 잊어. 어차피 너희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으니까. 그럼 난 이만. 이런 곳에서 허비할 시간도, 이유도 더는 없거든.”

칼로스가 뜻 모를 말에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이적은 비웃음을 띤 얼굴로 흩어지듯 사라졌다.

홀로 남은 칼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매끈했던 턱 근육이 일순간 사납게 꿈틀거렸다.

그는 차마 이적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있잖아, 칼로스.”

“아무래도 당신의 미래에는 내가 없는 것 같아.”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어.”

아네타가 과거에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그 말이 이런 식으로 실현되는 걸까. 사라진 아네타를 떠올리는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없는 세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고 생각하니 발을 딛고 서 있는 것마저 힘겨웠다.

‘이제야 겨우 마음이 닿았는데.’

절망에 사로잡힌 칼로스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바닥과 거칠게 맞닿은 무릎으로 올라오는 통증보다, 부정할 수 없는 말들에 난도질당한 마음이 더 아팠다.

아네타가 이적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했다. 아예 그 세계로 가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곳에서 이적이 말한 대로 진짜 엘레나를 만난다면 아네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칼로스는 장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였다. 그렇다 보니 아직은 자신과 그녀의 어머니 중 누가 우위인지 알 수 없었고, 그녀의 사정을 알기에 함부로 자신에게 무게를 더 둬 주길 바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가 돌아오길 바랐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라도 반드시.

***

정신을 차려 보니, 아네타는 산란하는 빛의 세계에 서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부서지는 햇살 덕에 황홀하리만치 반짝였고, 무언가에 분산된 빛이 허공에 색색의 띠를 그려 냈다.

후작저를 본 땄지만, 어딘가 범상치 않은 풍경은 아네타로 하여금 이곳이 이적이 말한 세계임을 깨닫게 했다.

아네타는 환상과도 같은 풍경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과정을 떠올렸다.

엘레나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혹했다는 이유로 끌려 들어온 세계는 어쩐지 그리우면서도 포근한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을 붙들었던 환영의 몸에서 느꼈던 온기처럼.

환영에게서 온기를 느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아네타는 분명히 느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도 같았던 감촉을.

그렇기에 아네타는 차마 엘레나의 모습을 한 환영을 밀어낼 수 없었다. 굳은 듯 서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밀어낸다고 밀릴 것 같지도 않았지만.’

아네타는 긴장감에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곳에 떨어진 이상, 그녀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적의 술수에서 벗어나야 했다.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은 이 세계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었다.

아네타는 애써 긴장을 감추며 방을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