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밤이 없는 세계 (3)
무슨 정신으로 돌아왔는지 모를 아네타는 혼란스러운 낯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등 뒤를 따르는 것은 길게 늘어진 그림자였다.
어느덧 사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네타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걸린 어스름은 때가 되자 자비 없이 해를 내몰았다. 밀물이 차오르듯 고요하게 영역을 넓혀 가는 황혼의 위세는 어쩐지 불길한 감상을 심어 주었다.
아네타는 흐려진 감각을 의식해 또 한 번 손을 쥐었다 폈다. 오늘 하루 몇 번이고 반복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기묘한 감각은 쉬이 떨쳐지지 않았다.
“아네타.”
그러던 때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면을 응시하자 보이는 것은 서둘러 다가오고 있는 칼로스였다.
걸음을 멈춘 아네타는 그 자리에 서서 칼로스를 기다렸다. 본관이 있는 방향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그는 걱정스러운 낯을 하고 있었다.
“칼로스. 여긴 어쩐 일이야?”
“하루 종일 당신 얼굴을 못 봤더니 애가 달아서 왔어. 보고 싶었어, 아네타. 아침 일찍 나갔다고 들었는데 어디를 다녀온 거야?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애정 어린 말들을 쏟아내던 칼로스는 안색이 안 좋다며 아네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네타는 뺨을 어루만지는 손에서 익숙한 온기를 느꼈다. 이제야 비로소 불안정하게 뛰던 심장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일이, 있긴 했지. 이상한 일을 겪었어.”
“무슨 일?”
“그게…….”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그에게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말문을 여는 순간, 오늘 있었던 그 어떤 일보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칼로스의 뒤로 보이는 누군가의 인영에 무심코 시선을 흘렸던 아네타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급하게 숨을 들이켠 그녀의 눈에 들어온 이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여인이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네타가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하자, 칼로스는 그녀의 시선을 좇아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반응 역시 아네타와 다를 바 없었다. 초상화 속에 있던 인물의 얼굴이 보이자, 칼로스는 놀라 표정을 굳혔다.
오직 아네타만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의 입술은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고운 호선을 그렸다. 타오를 듯 붉은 황혼 아래에 서 있는 이의 존재는 강렬했다. 연갈빛 머리카락은 마치 그 일부인 듯 낙조가 드리운 음영에 물들어 있었다.
“어머니.”
아네타는 앓듯이 중얼거렸다. 내려앉은 땅거미가 지평선의 경계를 흐렸다.
황혼.
그것은 세상의 질서가 어그러지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
엘레나 아데나워는 칼로스에게도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아네타의 삶을 지탱하고, 또 때로는 무너지게 하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한때는 그런 엘레나를 부러워했었다. 자신도 아네타에게 그리도 깊고 짙은 의미의 존재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엘레나는 이미 이승을 떠난 이였다. 칼로스는 어느 순간부터 엘레나를 부러워하기보다는 아네타가 하루빨리 어머니를 가슴에 묻을 수 있기를 염원했다.
망자는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넘을 수 없고, 아네타의 미련은 덧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죽은 자는 산 자의 땅을 밟지 못한다는 불변의 법칙이 깨졌다.
칼로스는 아네타를 혼란에 빠뜨린 엘레나를 살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한 모습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아네타의 어머니는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엘레나의 발치에 그림자 하나 없는 것이 그 증거였다.
칼로스가 그 사실을 눈치채기 무섭게, 여전히 웃는 낯의 엘레나가 뒤를 돌았다. 등을 보인 채 어딘가를 향해 달리는 모습은 명백히 유인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거기 서, 아네타. 가면 안 돼!”
석상처럼 굳은 듯 서 있던 아네타는 그 뒤를 쫓으려 했다.
불안을 느낀 칼로스가 아네타를 부르며 곧장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시도에 그쳤다. 이상하게도 그의 발이 땅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걱정 마. 저게 가짜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가짜인 걸 알면서 왜 가려는 건데!”
“확인해 볼 게 있어.”
아네타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빠르게 멀어지자, 칼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네타가 엘레나를 보고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누가 이따위 짓을……!”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이 벌어졌을 리 없다. 칼로스는 일그러진 얼굴로 분노를 터트렸다. 이런 비현실적인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은 영광이나, 그 영광을 소유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가진 영광은 없어.’
영광의 능력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칼로스는 어느 순간 번뜩 떠오른 사실을 상기했다. 바로 아직까지 능력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두 영광의 존재였다.
그중 하나를 떠올리는 순간, 그의 손목에 있던 창공이 박동했다.
공명과는 달랐다. 그는 이 익숙한 듯 낯선 감각을 어디선가 느낀 적이 있었다.
칼로스는 조급함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애써 이성을 다잡으며 기억을 더듬자,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땅과 하나가 된 듯 움직이지 않던 발이 떨어졌다. 깨달음과 함께 창공이 그를 붙잡던 알 수 없는 힘을 몰아낸 것이다.
칼로스는 자유를 되찾는 순간 지체 없이 땅을 박찼다. 모습을 바꾼 그가 서 있던 자리엔 검은 깃털만이 휘날리다 떨어졌다. 날아오른 칼로스는 빠르게 비행했다. 아네타를 찾기 위함이었다.
저택의 본관으로 날아간 칼로스는 창밖에서 서둘러 내부를 훑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저택의 사용인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덕분에 아네타를 찾는 건 빨랐다.
쉼 없이 달리던 아네타가 멈추어 선 곳은 엘레나가 들어간 방문 앞이었다.
칼로스는 복도에 난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문턱을 짚고 가쁜 숨을 고르던 아네타는 어느새 서늘해진 눈으로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처음 발을 들이는 공간이었지만, 칼로스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후작령에 있던 엘레나의 방과 구도는 물론 가구까지 같은 까닭이었다.
‘그때 가지고 왔던 물건들을 여기에 놓아 두었구나.’
생각을 하기 무섭게, 구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와. 혹시 몰라 충동질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열심히 뛰어올 줄은 몰랐네. 거기다 믿음직한 혹까지 달고 오고.”
여상하게 인사를 건네 온 이는 다름 아닌 엘렌이었다. 그는 말투부터 분위기까지 무엇 하나 평소와 같은 게 없었다.
다른 사람처럼 돌변한 태도에 칼로스는 아네타가 뛰어가며 남긴 말이 엘렌과 관련 있는 일이 아닐까 짐작했다.
“저쪽은…… 안으로 들어오는 즉시 잠들었어야 했는데. 착실하게 제 주인을 지키고 있는 건가?”
엘렌은 느닷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창공의 영광과 칼로스를 번갈아 보았다.
창공은 제게 시선이 닿기 무섭게 진동했다. 엘렌은 그것만으로 대답을 들었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아주 지극정성이시네.”
엘렌이 창공과 대화하고 있음을 눈치챈 것은 창공이 표출하는 불쾌함을 느낀 칼로스뿐만이 아니었다. 아네타 역시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의 눈은 방 안의 풍경을 살피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아네타를 유인했던 엘레나는 엘렌의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녀의 초상화가 담긴 액자가 이질적인 빛에 휩싸여 빛나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현상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길드장의 비서라면서 찾아왔던 자, 너 맞지? 내가 오늘 확인했던 일들도 모두 네가 꾸몄던 짓일 테고.”
“후자는 모르겠지만, 전자는 맞을 거야. 그자와 스칠 때 지금과 같은 기운을 느꼈거든.”
아네타의 물음에 답한 이는 엘렌이 아닌 칼로스였다. 이제 감출 필요 없다는 듯 풀어 놓은 기운을 느끼며 그는 혀를 찼다. 그때 그냥 넘겨선 안 됐다고 후회하기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까 확신이 서네. 아무래도 네 소개를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엘렌. 아니, 이젠 이적이라고 불러야 하나?”
칼로스가 정체를 밝히기 전에 먼저 엘렌의 정체를 밝힌 사람은 아네타였다. 아네타는 고요한 분노를 드러냈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영광밖에 없지. 날 완전히 가지고 논 것 같던데. 하필 마테몬 왕국의 우체국에서 서신을 보낸 걸 보면.”
완전히 들통이 나거나, 아니면 완벽히 속이거나. 극과 극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한 이적의 의도는 악질적이었다.
이적은 전례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존재를 증명했지만 오랜 기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주인에게 비협조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모두 이적이 처음이었다.
영광은 맹목적으로 주인을 따르니까.
‘하긴. 애초에 그런 성격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지.’
가장 놀라운 사실은 주인의 제어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영광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칼로스는 어쩌면 에레즈 바우터의 통제보다 더 골치 아픈 영광이 나타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들킨 김에 하나 더 말해 줄게. 지금 네 눈앞에 보이는 엘레나 아데나워는 내가 만들어 낸 환영이야.”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짜가 아니라는 것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아네타는 부러 환영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얼굴인 데다, 그림보다 더 현실감이 있었지만 겉만 흉내 낸 눈속임과 다를 바 없음을 아네타가 모를 리 없었다.
“가짜는 가짜야.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뭐지?”
“뭐겠어. 내 주인이자, 소유물인 너를 위해 진짜 엘레나 아데나워와 만나게 해 주려는 거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라고나 할까.”
이적은 마치 자선이라도 베푸는 양 말했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지만, 그를 드러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너를 잘 알아. 그래서 믿게 만들어 주려고.”
이적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손짓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띄웠다. 그의 손짓에 따라 나타난 것은 눈에 익은 그림이었다.
아네타는 그림을 눈에 담는 순간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마, 네가 그린다던 황혼이 이거였어?”
추억 속에 존재하는 미완의 그림. 그것이 완벽히 완성된 채로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