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밤이 없는 세계 (2)
아데나워 후작가의 문양이 양각된 마차에서 내린 금발의 여성 귀족.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길드 앞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잽싸게 허리를 숙이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제국의 영광을 뵙습니다!”
아네타는 필요 이상으로 큰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앞에 있는 장정들을 살폈다. 방금까지 나태한 얼굴로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던 이들치고는 퍽 긴장감이 감도는 모습이었다.
연신 문을 힐끔거리는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네타는 그들이 자신의 방문을 길드 내부에 알리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를 증명하듯 닫힌 문 너머로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조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후작 각하!”
헐레벌떡 뛰어나온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길드장이었다. 대리인이 아닌 그녀가 직접 걸음한 것에 놀라는 것은 잠시였다. 넙죽 고개를 숙인 그는 서둘러 아네타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아네타는 안으로 들어서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비서라던 자는 보이지 않았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어서 차라도 내와! 그래, 지난번에 접객용으로 사 둔 것으로!”
아네타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길드장은 부산을 떨며 부하를 닦달했다. 하지만 그녀는 타인이 건넨 것에 함부로 입을 댈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아니, 차는 됐어.”
“새로 들인 차 맛이 아주 일품인데, 아쉽네요. 그런데 어쩐 일로 각하처럼 귀한 분께서 친히 이런 누추한 곳까지 방문해 주셨습니까?”
파리처럼 두 손을 비비며 묻는 모습은 퍽 비굴하기까지 했다.
아네타는 살살 눈치를 살피는 길드장에게서 불안감을 엿봤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굴려 대는 모습이 영락없이 켕기는 것이 있는 자의 모습이었다.
아네타는 티 나지 않게 혀를 쯧 찼다. 길드장이라는 자가 저리도 감정을 숨기지 못할 줄이야. 절로 새려는 탄식을 억누르며 아네타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는데 대답해 줄 수 있겠지?”
“예, 예. 얼마든지 하문하십시오. 제가 아는 것이라면 성심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길드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네타가 여기까지 찾아와 물어볼 일은 의뢰에 관한 것밖에 없음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길드장을 보는 아네타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어려운 걸 물으려는 게 아니야. 너는 그저 엘렌을 어디서, 어떻게 찾았는지 빠짐없이 이야기 하면 돼. 참고로 허튼 수작을 부릴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 거짓을 고할 경우, 그 끝이 어떨지는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분명 숨기는 게 있다. 그리 확신한 아네타는 일부러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다행히 찔리는 게 있는 길드장은 쉽게 속아 넘어왔다.
아네타가 착각을 심어주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퍽.
바닥과 부딪힌 무릎에서 제법 큰 소리가 났지만, 길드장은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리기 바빴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실 화가는 저희가 찾은 게 아닙니다!”
아네타는 애써 동요를 감추고 평정을 가장했다. 길드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길드 사람을 만나 아네타의 제의를 알게 되었다는 엘렌의 말은 거짓이 된다. 그녀가 고용한 길드는 이곳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럼 엘렌을 찾은 자는 누구지?”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 정말 몰랐다면, 너희들이 비서를 통해 의뢰를 완수했다는 확인서를 받아가지는 않았겠지.”
심지어 비서라는 자가 찾아온 것은 엘렌이 제도에 도착한 다음 날이었다. 아네타가 그 사실을 지적하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엎드려 있던 길드장이 고개를 들었다.
“예? 비서라니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길드장은 아네타의 말에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저희 길드에는 비서가 없습니다. 또, 확인서는 각하께서 사용인을 통해 보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사용인을 통해 확인서를 보냈다고?”
“예. 추가금은 확인서를 보낸 다음 날 따로 보내 주셨고요.”
길드장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아네타는 마담 리페가 엘렌의 이름에 대해 언급할 때 느꼈던 감각을 고스란히 느꼈다. 온몸에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럼 저택으로 왔던 자는 누구지? 분명 이 길드의 마크로 만들어진 증표를 확인했는데.”
“증표라면 이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네타가 쉬이 의심을 떨치지 않자, 길드장은 안주머니에서 길드의 증표를 꺼내 보였다. 줄 달린 은빛 메달을 들고 있는 그는 이제 두려움 대신 억울함에 몸을 떨고 있었다.
“맞아. 그거였어.”
“이건 제가 가지고 있는 게 유일하고, 누군가에게 내어 준 적도 없습니다! 제 목숨을 걸 수도 있습니다!”
화제는 추가금으로 옮겨갔다. 그들이 아네타를 보고 긴장했던 이유는 그녀가 의뢰를 완수한 이를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길드장은 자신이 먼저 부당하게 취한 추가금을 돌려주겠다고 나섰다. 목숨을 건지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아네타가 느끼기에도 길드장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아네타는 누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은 것 같다고 느꼈다. 이젠 정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아네타는 고개를 들었다.
“돈을 돌려주는 건 됐어. 대신, 지금 당장 마테몬 왕국 우체국으로 가서 ‘엘렌’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서신을 보낸 기록이 있는지 확인하고 돌아와.”
“새로운 의뢰를 맡기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모든 걸 만회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거나, 내가 준 후작가의 증표로 허튼짓을 한다면 다음 기회는 없어. 그러니 가장 빠르고, 믿을 만한 이를 데리고 와.”
“예, 예! 알겠습니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길드장은 서둘러 문을 나섰다. 아네타가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이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아네타는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종이와 깃펜을 빌려 우체국에 보일 서신을 작성했다.
서명과 함께 명확한 증표를 보낸다면, 무언가를 보내는 건 불가능해도 본인의 기록을 열람할 자격 정도는 주어졌다. 10년간의 기록은 빠짐없이 보관되니 벌써 폐기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길드장이 데리고 온 사람은 체구가 작은 남자 한 명이었다.
점심 식사 메뉴를 궁리하던 그는 자신을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길드장의 손에 이끌려 아네타의 앞에 섰다.
설명을 끝낸 아네타가 남자에게 준 시간은 여섯 시간이었다. 아무리 마테몬 왕국이 접경국이라고 해도, 조금은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그가 타고 갈 것은 마차가 아닌 말이었다. 충분히 해 볼 만한 일이었다.
남자가 출발하자, 아네타는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길드에 그대로 남았다. 마테몬으로 향한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꼿꼿한 자세를 보며 길드장이 혀를 내둘렀지만, 아네타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각하, 오셀이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네타는 남자가 돌아왔다는 길드장의 말에 접객실을 나섰다.
장시간 움직이지 않아 다리에 감각이 무뎠지만, 그쯤이야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아네타가 모습을 드러내자 길드에 있던 이들은 슬며시 몸을 사렸다.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아네타는 자신이 정해 준 시간 내에 돌아온 남자를 찾았다.
물 없이 사막을 횡단한 사람처럼 급하게 마실 것을 찾아 넘기던 그는 그제야 받아온 기록과 후작가의 증표를 아네타에게 건넸다.
“여기, 말씀하신 기록입니다.”
건네받은 봉투의 입구는 녹색 밀랍으로 봉해져 있었다. 그 위로 찍힌 인장은 마테몬 왕국 우체국의 것이 맞았다.
아네타는 서둘러 봉투를 찢었다.
내용물을 꺼내 펼치자,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눈에 들어왔다.
“……이럴 수가.”
몇 번을 확인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네타는 종이가 구겨진 줄도 모르고 결과를 눈에 담았다.
마테몬 왕국 우체국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물론 저택으로 발신된 서신은 단 한 통도 없었다.
아네타는 자신이 받아 보았던 서신과, 분명히 확인했던 우체국 인장을 떠올렸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싶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아네타는 곧바로 길드를 나섰다. 정신이 없어 고맙다는 말도 잊은 채였다.
아네타가 급히 뛰어나오자, 말과 마차를 지키고 있던 마부 클롭은 눈치 빠르게 물었다.
“이번엔 어디로 모실까요, 각하?”
“엘렌의 집으로 가 줘.”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심각한 일이 생겼다고 이해한 마부는 능숙하게 마차를 몰아 아네타를 엘렌의 집 앞에 데려다 주었다.
아네타는 자신이 엘렌에게 구해 주었던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불시에 찾아온 것에 대한 미안함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불러도 안쪽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네타는 혹시 몰라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러자 잠겨 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쉽게 문이 열렸다.
마른침을 삼킨 아네타는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발을 들였다.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아 내부의 풍경은 무리 없이 눈에 담겼다.
‘더는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큰 착각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네타는 주먹을 쥐었다. 깔끔하게 다듬었던 손톱이 손바닥에 반달 모양의 자국을 남겼다.
주먹 쥔 손이 희게 질려도 아네타는 힘을 풀지는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지독히도 현실 감각이 없었다.
아네타는 이전에 이사벨과 잠깐 들렀던 엘렌의 집을 떠올렸다.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생활감 가득했던 공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한 기운만을 머금고 있었다.
사람이 지낸 흔적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처음 그대로의 상태.
아네타는 고개를 돌려 엘렌이 액자를 걸어 놓았던 위치를 응시했다. 못을 박은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귀신에게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이젠 신뢰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