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밤이 없는 세계 (1)
“그런데 어쩌다 결혼을 결심하게 된 거야?”
아네타는 크리스가 버논과의 관계 진전보다 빚을 변제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차용증을 찢어 버렸다는 걸 크리스는 모르고 있었고, 그 문제로 버논에게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진 않았으니까.
“처음엔 빚을 모두 갚고 난 뒤에 당당하게 오라버니 앞에 서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껏 마음을 전하지 않았고요.”
아네타의 예상은 맞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다 이번 일을 겪고서 깨달았어요.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는 걸.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를 기약하기보다는 현재의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크리스는 그러던 때에 마침 버논이 고백과 함께 청혼을 해 왔다고 말했다.
버논이 먼저 청혼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던 아네타는 속으로 허허롭게 웃었다.
버논이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게 잡았구나 싶었다.
“결국 욕심을 주체하지 못해서 받아들인 거죠. 말씀드렸다시피 후회는 없지만요.”
“아니. 그거 욕심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아네타가 멋쩍은 듯 말하는 크리스에게 한 말은 그녀 역시 최근에서야 얻은 깨달음이었다.
“욕심은 네게 전혀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거고.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통했잖아. 자조할 이유는 없다고 봐. 그러니까 뭐든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아네타는 크리스에게 자신이 차용증을 찢어 버렸다는 사실을 밝힐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후일로 미루는 것을 택한 그녀였다.
***
아네타는 납치 사건 때 폐를 끼치거나 도움을 받은 이들에게 작게나마 보답을 하고자 선물을 전했다. 군의관에게 희귀한 약초와 그와 관련된 서적들을 주었다면, 애주가인 테르사에게 구해 준 것은 물량이 없어 제조국의 왕가에나 서너 병씩 납품된다는 술이었다.
선물을 받은 두 사람은 하나같이 이런 걸 받으려고 도운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부하와 상사가 똑같은 반응을 보이자, 아네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크리스에게는 혼수를 해 주기로 했기에, 남은 사람은 세르세뿐이었지만 그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아네타는 납치 이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세르세를 만나기 위해 그의 의상실과 저택을 찾았지만, 어딜 가든 부재중이라는 답만 돌아왔다.
세르세의 부재는 그 다음 날까지도 이어졌다. 미리 방문 시간을 알리고 왔음에도 아네타는 세르세의 털끝 하나 볼 수 없었다.
그것이 고의임을 아네타는 눈치챘다. 여러 차례 보냈던 안부 편지에도 세르세는 답장을 하지 않았으니까.
아네타는 하는 수 없이 가지고 왔던 여러 개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집사에게 건네주었다. 전문 세공사를 따로 두고 있을 테니 마음 가는대로 세공해 사용하라는 의미였다.
저택을 나선 아네타는 이번엔 마담 리페의 갤러리로 향했다. 감사 인사도 할 겸, 나온 김에 한 번 들렀다 가기 위함이었다.
‘엘렌을 찾은 뒤로는 처음 오는 거였던가?’
아네타는 머릿속으로 갤러리에 걸음하지 않은 날을 세며 갤러리 문을 열었다. 그러자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방금까지 그녀가 찾아다닌 인물이었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아네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네타는 언젠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칼로스처럼 입구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던 세르세의 이름을 불렀다.
“세르세?”
넋을 놓은 듯 멍하니 앉아 있느라 그녀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던 세르세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아네타를 보고 놀라 굳어졌다.
“……아네타.”
“오랜만이야.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엉뚱한 곳에 발품만 팔았네.”
“날 찾아다녔어?”
“어.”
“무슨 일로?”
“전해 줄 게 있어서. 에티엔에도 없고, 저택에도 없어서 결국 집사에게 맡기고 왔으니까 돌아가는 대로 확인해 봐.”
“알았어.”
세르세의 말은 자꾸만 짧게 툭툭 끊겼다. 그럼에도 아네타는 자신을 피하는 듯한 그의 행동에 대해 직접전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름을 부를 때까지 사람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넋을 놓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아네타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알아야 하는 일이라면 세르세가 먼저 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전에 있었던 일은 정말 고맙고 미안했어.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 볼게.”
“그래.”
대화는 그 뒤로 이어지지 않았다. 아네타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또 하나의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뒤에서 세르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네타.”
아네타는 길쭉한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무언가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세르세는 끝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좋은 시간 보내길 바라.”
세르세는 그 말을 남기고 아네타가 들어왔던 문으로 나갔다.
그가 잡을 새도 없이 가 버리자, 아네타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평소의 세르세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네타는 세르세에 대한 생각을 털어 내며 잡고 있던 문고리를 당겼다.
홀에 들어서자 그녀를 발견한 마담 리페의 낯빛이 환해졌다. 그동안 서신을 통해 꾸준히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직접 만나는 것과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말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각하.”
서둘러 다가와 인사를 건넨 리페는 아네타를 갤러리에 있는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마침 갤러리 내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림을 보러 오신 건가요?”
리페가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차와 함께 건넨 물음에 아네타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리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왔어요.”
“제게요?”
“엘렌을 찾는 걸 도와준 데다, 추문에 대해서도 힘써 주었잖아요.”
아네타는 덕분에 엘렌도 잘 찾았고, 소송 역시 승소하여 잘 마무리되었다고 말했다.
“덕분에 일이 잘 풀렸어요. 고마워요, 리페.”
아네타는 리페에게 보답을 해 주고 싶으니 가지고 싶은 물건을 말해 달라고 했다. 본래 갤러리에 올 예정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줄 선물을 따로 준비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보답이라니요. 괜찮아요. 추문에 대한 건 각하께서 주신 도움을 생각하면 당연히 나서야 하는 일이고, 화가 역시 제가 찾은 게 아닌걸요.”
이미 아네타에게 받은 도움이 많은 리페는 손사래 치며 거부했다. 괜히 한 번 거절하는 것이 아닌, 진심 어린 사양이었다.
아네타는 극구 사양하는 리페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런데 각하께선 그 화가분을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 부르시네요? 혹시 각하께도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은 건가요?”
곧이어 들려온 말만 아니었더라면 아네타는 리페의 손에 기어코 무언가를 하나 쥐여 주었을 터였다.
“가명이라니요? 엘렌의 본명이, 따로 있다는 말이에요?”
“네. 저도 각하의 부탁을 받고 수소문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에요. 지인에게 부탁해서 화가분이 그림을 팔고 간 날부터 각하께서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시기 전까지의 제도 출입 기록을 살폈거든요.”
리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그 기간 동안 ‘엘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출입자는 없었어요. 그걸 보고 가명을 사용했으니 찾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아네타의 낯빛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것을 발견한 리페가 걱정 어린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술계에서 가명을 쓰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 때문에 리페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평소였다면 아네타도 후원하게 된 화가가 사용하는 이름이 본명이든 가명이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네타에게는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같은 이름이 없었다는 말, 확실해요?”
“확실해요. 제가 혹시 몰라서 몇 번이고 확인했었거든요. 각하, 왜 그러세요?”
“……엘렌이 제도로 돌아오기 전에 마테몬 왕국의 우체국을 통해 내게 서신을 보내왔던 적이 있어요. 그때 분명히 발신자 이름이 ‘엘렌’이었고요.”
마테몬 왕국의 우체국에서 무언가를 보내려면 반드시 본인의 이름을 사용해야 하며, 그와 관련하여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러한 규율은 인접한 나라인 제국으로 가는 우편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말은 즉, 엘렌이라는 이름이 가명이 아닌 본명이어야 한다는 건데 출입 기록이 없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아네타는 서신을 떠올렸다. 봉투에 찍혀 있던 것은 분명 마테몬 왕국 우체국의 인장이 맞았고, 그것은 도용이 불가능한 잉크로 찍혀 있었다.
마테몬 왕국에서 본명이 ‘엘렌’인 사람에게 대신 편지를 보내게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렇게까지 해서 서신을 보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네타는 수상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요.”
왠지 이 일을 그냥 넘겨선 안 된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아네타는 벗어 놓았던 겉옷을 챙겼다. 팔을 꿰어 넣을 시간도 없다는 듯 대충 집어 든 아네타는 가 보겠다는 말만 남긴 채 서둘러 갤러리를 벗어났다.
아네타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제도의 출입을 관리하는 입구였다.
제국의 위상을 나타내듯 거대하면서도 화려한 입구 앞에는 무장한 경비대가 지키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아네타는 책임자를 찾았고, 신분을 밝힌 뒤 수월하게 출입 기록을 뒤졌다.
그 과정에서 아네타는 리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아네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엘렌이 제도에 도착한 날까지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결과는 같았다.
‘엘렌’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확인을 마치는 순간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네타는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각에 휩싸였다. 손끝이 차게 식어 가는 것 같았다.
출입자 명부를 손에 든 채로 멍하니 서 있던 아네타는 퍼뜩 길드의 존재를 떠올렸다.
엘렌을 찾아 준 것이 그들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그녀의 다음 목적지가 그곳으로 정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다시 마차에 오른 아네타는 빠르게 스치는 풍경이나, 안으로 밀려드는 바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입술을 사리물었다.
진심으로 그의 성공을 빌었던 아네타는 더 이상 엘렌이라는 인물을 신뢰할 수 없었다.
아네타는 반드시 그의 정체를 밝혀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녀는 몰랐다.
상상도 하지 못한, 허상보다 더 허상 같은 진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