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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79화 (79/122)

79화. 진전 (6)

“결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해.”

과거가 언급되자 아네타는 이마를 짚었다. 그때와는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꺼낸 버논 역시 알고 있을 테니까.

“너는 그 신중해야 할 결혼을 계약혼으로 했잖아.”

“너,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한다 이거지.”

가만히 있다 아픈 곳을 찔린 칼로스가 세상 살벌하게 눈을 번뜩였지만, 버논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네타는 칼로스를 피해 자신에게 눈을 맞춘 버논에게 말했다.

“비록 계약혼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신중한 선택이었어.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인 데다,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칼로스였으니까. 저 남자가 어디 허튼짓하고 다닐 사람이야?”

사실 칼로스와 혼인하는 것은 원작이 정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대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당시에는 주인공인 에레즈가 나타날 테니 이혼은 확실하게 보장된다고 생각했고, 그가 결혼 생활 중에 바람을 피울 것 같지도 않았다.

또, 그는 도박에 손대거나 손찌검 따위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남부럽지 않은 명예와 부를 지녔기에 아네타의 재산을 노리기는커녕, 그녀가 공작가의 재산을 한 푼도 사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하긴. 저 녀석이 어디서 헛짓을 하고 다닐 녀석은 아니지. 그런데 너, 그런 것까지 다 따져 본 뒤에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인 거였어?”

“당연하지. 아버지 누르자고 인성이 파탄 난 자와 같은 지붕 아래서 지낼 수는 없잖아. 그거야말로 최악에 필적하는 차악이지.”

“너도 참 대단하다.”

하나하나 나열해 보면 아네타는 합리적이면서도 안전한 선택을 했던 것이었다.

버논은 힐끗 칼로스의 반응을 살폈다.

목석보다 더 목석같던 그의 친우는 전처가 드러내는 신뢰에 아닌 척 기뻐하고 있었다.

버논은 좋냐는 물음을 건네려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나도 충분히 신중했다는 걸 입증했으니까 다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하고, 너도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 크리스를 위해서.”

버논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건 크리스가 제게 생각보다 큰 의미를 지닌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정략혼이나 계약혼 같은 것보다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때가 오히려 고려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아.”

아네타는 그 사실을 유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겐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할 자격이 없으니까 주제 넘는 말은 여기까지만 할게. 자격이 있다고 해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사랑에 빠진 남녀를 누가 말리겠어.”

아네타는 그리 말하며 허리를 숙여 떨어뜨린 찻잔을 주워 들었다.

탁.

작은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인 그것을 잠자코 응시하던 버논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나도 나보다 좋은 놈, 잘난 놈들이 세상에 널렸다는 건 알아.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그 애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그래서 결혼을 결심한 거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건 불안해서 더는 못 하겠어.”

버논은 말했다. 이제는 직접 곁에서 지키겠다고. 아네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네가 했던 말대로 새장 안의 새로 만들지는 않을 거야.”

그 눈빛의 의미를 눈치챈 버논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크리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길 바란다면 그 역시 적극 지지해 줄 거고.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네 입으로 한 말들이니 반드시 지키길 바라. 울리기라도 했다간 내가 너 가만히 안 둬.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을 거니까 잘해.”

아네타가 제 눈가를 손끝으로 톡톡 치자, 버논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네타의 모습이 살아생전 하나뿐인 딸을 싸고돌던 크리스의 아버지와 겹쳐 보인 까닭이었다.

“누가 보면 크리스가 네 딸인 줄 알겠어.”

“아서. 난 너 같은 사위는 두고 싶지 않아. 상상만 해도 심란해져.”

“어째서 거기에 중점을 두는 건데?”

“크리스 같은 딸이라면 환영이지만, 너는 아니니까.”

아네타는 부러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버논은 크리스가 예쁨 받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을 향한 사촌의 반응에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고민은 잠시였다. 말은 저렇게 해도 자신 역시 그녀의 울타리 안에 있음을 알았다.

***

복지부에 속한 이들이 모여 있는 집무실로 향하자, 넓은 공간에 전보다 여유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이들이 보였다. 몇몇은 자리를 비운 모양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네타의 입장에서는 크리스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지만, 아랫사람 입장에선 아니었다.

상사가 예고 없이 기습 방문을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딱히 사고를 치거나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니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상사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면서 지나가는 경비대를 보고 괜스레 긴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오셨습니까, 각하.”

아네타는 굳은 낯으로 깍듯이 인사를 해 오는 이들을 훑었다. 라디아 후작부터 시이센 남작, 코올 후작가의 삼남, 이프콧 백작가의 장녀, 디겐 백작, 그리고 크리스까지.

군기를 잡은 적도, 위세를 부린 적도 없건만 빳빳이 군기가 잡혀 있는 모습에 아네타는 한숨을 삼켰다. 물론 그것이 별수 없는 일이라는 건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신분에 의한 위계질서가 잡혀 있는 것이 당연한 세계였으니까.

“누가 보면 이곳이 기사단인 줄 알겠어요. 긴장 풀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라디아 후작은 디겐 백작의 대답에 이어 물었다.

아네타는 부하 관료들의 편의를 위해 웬만하면 사무실까지 찾아오지 않았고, 주로 볼일이 있는 이를 집무실로 불렀다.

때문에 그들은 사무실까지 찾아온 그녀를 보며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늘 집무실에서만 보던 상사가 자신들이 사용하는 사무실에 서 있는 것을 보니 퍽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데번 남작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다고요? 집무실로 부르시지.”

“아뇨. 지금은 데번 남작이 더 바쁠 테니 한가한 내가 와야죠.”

아네타는 화들짝 놀라는 크리스에게 존대로 대답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한 까닭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퇴근 후에 개인적으로 시간 좀 내달라는 말을 하려고 왔어요. 시간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그럼 끝나는 대로 내 집무실로 와요. 난 이만 가 볼게요.”

아네타는 크리스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용건이 끝났다는 듯 집무실을 나섰다. 배웅하려고 나서는 이들은 부담스럽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아네타가 나가자, 남은 이들의 시선이 닫힌 문에서 크리스에게로 옮겨 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네타와 자연스럽게 대화했던 크리스를 그들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후작 각하께서 개인적인 약속 잡으시는 거 처음 봤어요.”

먼저 운을 뗀 사람은 아프콧 백작가의 라엘이었다.

“저도요.”

“사적으로 누구 만나는 거, 잘 안 하시는 분이잖아요.”

라엘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아네타는 타인과 억지로 친분을 맺지 않아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었기에, 좀처럼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네타가 변해 가는 이유 중 하나가 크리스임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하지만 상사의 총애를 받는 듯한 크리스에게 질투가 솟지는 않았다.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게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크리스 데번이라는 사람을 겪다 보면 아네타가 왜 그리 그녀를 아끼는지 절로 깨닫게 되는 까닭이었다.

“자, 이제 다시 하던 일들 마저 합시다.”

상황을 정리한 사람은 복지부에서 아네타 다음 가는 위치에 있는 라디아 후작이었다.

그는 지시에 따라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이들을 보다 크리스에게 말했다.

“장관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데번 남작은 서둘러 일을 마치도록 하세요.”

“네.”

크리스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사무실은 침묵에 잠겼다. 그 장관에 그 부서라고, 언제 대화가 오갔냐는 듯 업무에 몰두하는 모습은 서로 퍽 닮아 있었다.

***

라디아 후작의 배려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하게 된 크리스는 약속대로 아네타를 찾아왔다.

집무실에 혼자 있던 아네타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크리스에게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답하며 겉옷을 집어 들었다.

“가고 싶으신 곳이요?”

“레스토랑이야. 오랜만에 함께 식사나 할까 하고 부른 거였어. 얼마 전에 좋은 곳을 알게 됐거든.”

아네타는 말하던 도중 버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와 한창 좋을 시기일 테니 선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덧붙였다.

“선약이 있으면, 간단히 차만 한 잔 하는 걸로 하고.”

“괜찮아요. 선약 없어요.”

“다행이네. 그럼 갈까?”

지금쯤 러셀과 함께 있을 칼로스에게는 오늘의 일정에 대해 미리 귀띔해 두었다. 아네타는 걱정 없이 크리스를 데리고 집무실을 나섰다.

마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얼마 전 칼로스와 함께 왔던 레스토랑이었다. 이전과 같은 룸으로 예약한 아네타는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은 크리스는 아네타가 미리 부탁한 대로 가격이 적혀 있지 않은 메뉴판을 받게 되었다.

크리스는 그걸 보고 의아한 기색을 보였으나, 곧 제 취향에 맞는 음식을 골랐다. 아네타는 거기에 몇 가지 음식을 추가로 주문하곤 직원을 내보냈다.

“몸은 어때. 괜찮아?”

“아네타 님도 참. 그 질문만 벌써 다섯 번째예요.”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아네타는 크리스를 볼 때마다 건넸던 물음을 또 한 번 반복했다. 그럼에도 크리스는 귀찮은 기색 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정말 아픈 곳 하나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 때문에 그런 위험한 일에 휘말렸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정 그러시면 오늘 식사는 아네타 님이 사 주세요. 그 뒤엔 없던 일로 하는 거예요.”

“식사는 처음부터 사려고 했어. 내가 여기로 데리고 온 거니까. 그거 말고 네 쪽 혼수품은 내가 해 주는 걸로 하고 싶은데.”

“혼수품이요?”

크리스는 아네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란 기색을 보였다.

“저 결혼한다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며칠 전에 버논이 집무실로 와서 말해 줬어.”

아네타는 이런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제게 말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서 서운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크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당연히 아네타 님께 가장 먼저 말씀드리려고 했죠. 청첩장이 나온 이후에요. 그런데 버논 오라버니께서 먼저 말씀을 드릴 줄은 몰랐어요. 깜짝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크리스는 다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며 난처하게 웃었다.

“미리 말을 맞춰 둘 걸 그랬네요.”

“잘 생각하고 결정한 거지?”

“네. 그럼요. 다른 것도 아닌 결혼 문제잖아요.”

“네가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면 됐어.”

아네타는 망설임 없이 긍정하는 크리스의 모습에 안도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논에게 많은 말을 늘어놓았던 것과 다르게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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