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진전 (5)
외곽으로 난 길을 걸어 마차가 있는 곳까지 간 아네타와 칼로스는 파필 거리를 벗어났다. 목적지는 칼로스가 미리 예약해 두었다는 레스토랑이었다.
이전 같았다면 암행을 마치는 즉시 저택으로 돌아갔을 아네타는 칼로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주었다.
레스토랑이 위치한 곳은 황궁에 인접하여 귀족들이 주로 찾는 거리 중 하나였다.
색색의 가을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마차가 들어서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흩어졌다.
“공작 전하, 후작 각하. 말씀하신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알림이 들려오자, 칼로스와 아네타는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에게도 식사를 해결할 돈을 건넨 뒤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리던 직원들의 표정이 당황으로 굳어졌다.
레스토랑 급에 맞지 않는 차림을 한 이들이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의 사장은 손님이 무슨 옷을 입고 있든 음식값만 제대로 치르면 상관없다는 주의였다. 입고 있는 옷으로 음식값을 치를 것도 아닌데 뭣하러 차별을 두냐는 것이 그의 관념이었다.
직원들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아볼 정도로 지체 높은 두 귀족이 평민들과 같은 차림으로 나타난 까닭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다고 해서 나오는 답은 없었다. 직원들은 이유를 유추하는 걸 포기하고 두 사람을 안내하기 위해 나섰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티모어 공작 전하, 아데나워 후작 각하.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굳이 예약을 하셨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직원은 칼로스가 예약해 둔 방으로 안내하기 위해 한 차례 허리를 숙인 뒤 정중하게 앞을 가리켰다.
두 사람의 성이 언급되자 누가 들어오든 주변에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귀족들도 반응을 보였다.
놀라기는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직원들과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두 사람이 때때로 암행을 다닌다는 사실은 경비대 개편으로 인해 귀족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다.
아네타와 칼로스도 그 사실을 알기에 옷차림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들어선 것이기도 했다.
한껏 멋을 낸 귀족들 사이에서 아네타와 칼로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안내를 받았다. 몰리는 시선에 주눅들 이유는 없었고, 그럴 성격도 아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방 안은 화려한 듯하면서도 절제된 분위기였다.
예약 시간에 맞추어 미리 세팅된 식기가 조명을 받아 테이블 위에서 반짝였다.
“일단은 내가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주문해 놨어.”
칼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명의 직원이 카트를 끌고 들어와 아네타와 칼로스의 앞에 음식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본래의 방식대로라면 형식대로 짜인 코스 요리가 순서대로 나와야 했지만, 칼로스는 가장 첫 순서인 식전 음료부터 메인 요리까지 한 번에 내오게 했다. 타인의 방해 없이 온전히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혹시 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줘.”
아네타가 좋아하는 요리부터 좋아할 것 같은 요리까지 심사숙고하여 골랐지만, 칼로스는 자신이 마음대로 주문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아네타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내가 주문하고 싶었던 요리들이 여기 다 있거든.”
“다행이네.”
칼로스는 안도하며 직원에게 눈짓했다. 와인을 따라 주려던 직원은 이만 자리를 떠달라는 사인을 받자, 얼음과 와인이 담긴 버킷 쿨러를 칼로스의 곁에 놓아 주곤 허리를 숙였다.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인사와 함께 직원이 방을 나서자, 방 안에는 온전히 둘만 남았다. 식사는 칼로스의 권유로 시작되었다.
칼로스는 식사하는 아네타를 살피다 얼음에 파묻혀 있던 와인 병을 들었다. 그녀가 슬슬 목이 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칼로스는 오프너로 코르크 마개를 뽑아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예고 없는 행동에 아네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는 그대로 아네타의 뒤로 걸어갔다.
의아해하던 아네타는 그때부터 칼로스가 무얼 하려 하는지 눈치챘다. 작게 웃음을 흘렸지만, 칼로스는 꿋꿋하게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였다.
칼로스는 의자에 앉은 아네타의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듯 몸을 기울였다. 와인 병을 든 손을 앞으로 뻗어 그녀의 잔을 채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와인을 굳이 이렇게 따라 줄 필요가 있을까?”
“있지.”
아네타는 칼로스가 따라 주는 적색 와인이 투명한 잔을 타고 차오르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칼로스는 병을 내려 두고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품에 완전히 갇혔지만, 아네타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칼로스를 응시했다.
칼로스는 푸른 눈동자 안에 온전히 제가 담기자, 만족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알차게 사심을 충족할 생각이거든.”
“그래,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시던지.”
아네타는 재미있다는 투로 말하며 앞에 있는 칼로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에 칼로스는 언제 선전포고를 했냐는 듯 멍해진 얼굴로 굳어 버렸다. 그는 스스럼없이 입을 맞춰 오는 아네타의 행동에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또 그런 표정이네. 내가 입 맞추는 게 싫어?”
아네타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부러 물었다. 여전히 굳어 있는 칼로스에게서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싫을 리가 없잖아.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더라도 그렇게 느낄 일 없어.”
의도했던 대로 칼로스는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테이블을 짚었던 손을 거두고 상체를 바로 세운 그는 세상 진지한 얼굴로 아네타의 말을 부정했다.
“그럼 방금 그걸로 사심 충족은 잠시 미뤄 두고 식사하는 게 어때. 당신, 나 보느라 얼마 먹지도 않았잖아.”
아네타는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에서 서서히 식어 가고 있는 음식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겨우 서너 입이나 먹었을까. 허기도 잊은 채 애정을 쏟아 내는 모습에 가슴이 설렜지만, 이제는 그가 제 몸도 좀 챙겼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네타의 걱정을 알았는지, 칼로스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그는 아쉬움을 달래다 불쑥 떠오른 생각에 자신이 아네타가 있는 쪽에 두고 온 와인을 응시했다.
술에 취한 척 아침까지 함께 있어 달라고 엉겨 볼까. 아네타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려 보고자 수를 쓰려 했던 칼로스였지만, 불행히도 그의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눈치 빠른 아네타로 인해 좌초되었다.
“식사하라고 했지, 와인 마시라는 말은 안 했어. 이건 내가 다 마실 거니까 정 아쉬우면 당신은 거기 있는 식전주라도 마셔.”
식전주도 술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리 칼로스라도 그걸 마시고 취하진 않을 터였다. 도수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것을 먼저 맛보아 알고 있는 아네타는 눈을 빛내던 칼로스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자 애써 웃음을 감추었다.
***
“그때…… 했더니 크리스가…….”
강제 연금에 가깝던 자택 근무를 끝내고 당분간 자유를 만끽하게 된 사람은 아네타와 칼로스뿐만이 아니었다.
버논은 오늘도 레녹스의 집무실로 찾아와 크리스의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아네타는 그의 말을 배경음악 삼아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레스토랑을 나선 뒤에 보낸 시간은 소소했지만, 그보다 값진 시간은 없었다. 단순히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워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이 아쉬운 만큼, 아네타는 종종 어제처럼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이야, 우리 결혼하기로 했어. ……아네타, 듣고 있어?”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버논은 아네타가 제 말을 조금도 귀담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너 지금까지 내가 한 말 하나도 안 듣고 있었지?”
“듣고 있었어. 너 결혼하기로 했다며. 그것 참 축하할 일…… 잠깐, 방금 뭐라고?”
버논이 뒤늦게 눈치챈 사실에 두 눈을 가늘게 뜨자, 아네타는 방금 그가 했던 말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내뱉다 멈칫했다.
예고 없이 터진 폭탄과도 같은 소식에 아네타는 사고가 정지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차라리 제 귀가 잘못된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아무래도 내가 요즘 할 일이 없어서, 너무 무료한 나머지 헛것을 보고 듣는 모양이야. 다시 말해 봐. 누가 누구랑 뭘 한다고?”
“내가 크리스랑 결혼한다고!”
“……바틀로트의 날은 한참 전에 지났어, 버논. 이런 장난은 받아 줄 생각 없으니까 계속 할 거면 그만 돌아가.”
버논은 강조하듯 외쳤지만, 아네타는 두 귀를 틀어막은 듯 현실을 부정했다.
‘바틀로트’는 거짓말과 장난을 좋아하다 그로 인해 재산을 모두 잃고 마는 옛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의 이름을 본 딴 ‘바틀로트의 날’에는 많은 이들이 가벼운 거짓말과 장난을 치고 다녔다.
하루쯤은 그처럼 마음껏 장난을 쳐보자는 취지로 평민들 사이에서 시작된 놀이까지 언급되자, 버논은 칼로스에게 한탄하듯 말했다.
“칼로스! 네가 뭐라고 말 좀 해 봐!”
“버논.”
책상 앞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던 칼로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에 영향을 받아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힌 버논이 대답했다.
“어.”
“희망 사항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다니면 안 돼. 그런 짓은 나도 안 해.”
“…….”
버논은 칼로스마저 자신을 배신하자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그러다 안주머니 안에 넣어 둔 것이 가슴을 치던 손에 구겨진 것이 느껴지자, 별안간 얼굴을 환히 밝혔다.
그에겐 사실을 입증할 물건이 있었고, 자신만만하게 꺼내 들었다.
“너희들이 아무리 부정해도 사실은 사실이야. 이것 봐. 난 이미 청첩장 의뢰까지 맡기고 왔다고. 이건 그 견본이고.”
버논이 당당히 자신과 크리스의 이름이 적힌 청첩장을 내밀자, 아네타는 모르쇠하려는 목적으로 들었던 잔을 떨어뜨렸다. 카펫이 쏟아진 차로 엉망이 되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대체 어쩌다 연애도 건너뛰고 덜컥 결혼을 하겠다는 건데?”
아네타의 물음에 버논은 답했다. 제도로 돌아온 날, 자신들이 눈물겨운 재회를 했으며 바로 그때 자신이 고백을 했었다고.
“그래서?”
“네 마음도 나와 같다면 결혼하자고 했지.”
“……크리스는 그걸 받아들였고?”
“받아들였으니 내가 이걸 의뢰했겠지?”
버논은 아네타 보란 듯이 구겨진 청첩장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그 얄미운 행태에 아네타는 미간을 좁혔다.
“난 크리스의 보호자로서 결혼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해.”
난데없는 자칭 보호자의 주장에 버논은 펄쩍 뛰었다.
“언제부터 크리스의 보호자가 네가 된 건데!”
“네가 크리스를 내 밑으로 넣은 순간부터. 불만 있어? 있어도 말하지 마. 넌 그 일과 관련해서 내게 빚이 있으니까.”
아네타는 버논을 금지옥엽 곱게 키운 딸을 뺏어 간 몹쓸 도둑을 보듯 응시했다. 후작가 저택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을 훔쳐가도 저리 보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버논은 굴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르긴 뭐가 일러. 너희 두 사람도 그 나이 때 결혼했으면서!”
버논은 아네타가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건 알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