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진전 (4)
거리의 소란을 헤치며 들어선 마차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이윽고 바퀴가 완전히 멈추자, 창문은 하나의 액자처럼 거리의 풍경을 담아냈다.
두 사람이 찾아온 곳은 지난 암행 때와 같았다. 다시 파필 거리를 찾은 목적은 이전과 달라진 거리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칼로스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아네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변화는 마차 전용 도로의 폭이었다.
짐마차는 이전보다 수월하게 도로를 오가고 있었다. 상인들의 양해를 구하고 좁은 도로를 넓히는 공사를 진행한 보람이 있었다.
“다행히 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 같네.”
도로가 막혀 물건을 수급하는 데에 꽤나 애를 먹었겠지만, 일시적인 불편함을 참아 넘긴 대가는 확실했다. 상인들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하고, 또 몸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뿌듯해 보여, 당신.”
“당연하지.”
도로의 상태를 확인한 아네타와 칼로스는 천천히 거리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갔다.
날씨가 쌀쌀해지자 전에는 볼 수 없던 풍경이 보였다. 거리에 가판을 두고 따뜻하게 데운 우유나 술을 파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수확과 결실의 계절이니만큼 주가 되는 것은 풍족한 먹거리였다. 겨울에 대비하여 만든 절임 음식 역시 심심치 않게 보였다.
아네타는 곧 다가올 계절을 실감했다. 그러나 서늘한 바람도 바쁘게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열기를 식히진 못할 터였다.
“어쩐지 전에 왔을 때보다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아.”
“물질적인 풍요 덕분이 아닐까.”
“일리 있는 말이야.”
아네타는 칼로스의 말에 수긍하며 이번에는 물건의 가격을 세세히 살폈다. 때마침 칼로스도 같은 일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지, 아네타의 의견을 물어 왔다.
“가격표를 보니 가격 담합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인데. 아네타, 당신 생각은 어때?”
“내 생각도 같아. 어느 가게든 비슷한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더라고. 물건값으로 무리한 호객 행위를 하는 모습도 아직까지는 보지 못했고. 안 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네타는 부디 전자이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파격적인 조건을 거셨으니 그럴 수밖에. 원래 상인들이 주판알 튕기는 게 빠르잖아. 국가의 제도를 따르는 쪽이 더 이득이라는 걸 눈치챈 거지.”
러셀이 크리스의 가격 카르텔 안건을 통과시키자, 처음엔 불만을 제기하던 상인들은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러셀이 가격 안정화를 위해 협정을 맺은 상인들에게 세금 감면의 혜택을 주겠다고 공표한 까닭이었다.
말 그대로 파격적인 정책이었지만, 그렇다고 국가의 재정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제국은 기본적으로 부유한 강대국이었고 헛돈을 쓰지 않는 러셀 덕에 국고는 차고도 넘쳤으니까.
“그 정도 예산이야 충분히 감당 가능하지만, 세금 감면까지 해 주었음에도 제도를 악용하는 자가 생긴다면…….”
“재기 불능으로 만들어 본보기 삼아야겠지. 허튼짓하면 가만히 안 두겠다는 경고의 의미로.”
같은 상인들 사이에서도 고립되게 만들 용의도 있었다. 장사를 하는 이들에게는 인맥과 인맥을 통해 나오는 정보는 중요하니까.
굳이 분위기 조성을 할 필요는 없었다. 장사는 결국 경쟁이었다. 가격 담합으로 그 수위를 낮추었다고는 하나, 본질이 변하지는 않았다.
경쟁에서 품질과 함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가격을 가지고 술수를 쓴다면, 다른 상인들이 카르텔을 관리 감독하는 이들보다 먼저 나서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감시자가 되는 셈이었다.
아네타와 칼로스는 동일한 생각을 하며 칼을 갈았다.
그때였다. 사방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칼로스의 귓가에 유독 다급한 목소리가 닿았다. 여러 잡음이 뒤섞여 긴가민가하는 사이, 목소리는 다시 한번 들려왔다.
“소매치기야, 소매치기! 누가 저 놈 좀 잡아 줘요!”
절박한 목소리가 이번에는 무리 없이 칼로스의 귀에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온 소매치기가 아네타를 밀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가판대를 훑고 있던 아네타는 그 사실을 한 박자 느리게 눈치챘다. 하지만 소매치기는 그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저리 비…… 억!”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긴 칼로스는 앞으로 내밀어진 팔을 잡아 뒤로 꺾었다. 그대로 힘을 주어 바닥에 밀어붙이자, 소매치기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제압되었다.
힘 조절을 하지 않아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알 바 아니었다.
칼로스는 팔심으로 바닥에 엎어진 소매치기의 몸을 억누르며 아네타를 올려다보았다.
표정만 보면 그가 더 범죄자 같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놀라 잠시 굳어 있었던 아네타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칼로스. 당신 지금 사람 하나 잡을 것 같은 얼굴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로스가 찡그렸던 인상을 폈다. 아네타의 시선은 곧 그의 밑에 깔려 있는 소매치기에게로 향했다. 칼로스가 일을 친다면 대상이야 뻔했다.
“나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암행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은데. 사람들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됐거든.”
칼로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네타의 말대로 지나가던 행인은 물론 물건을 팔던 상인들까지 세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사이 소매치기에게 당했던 피해자가 밝아진 얼굴로 달려왔다.
피해자는 곧장 자신의 돈주머니를 되찾으려 했지만, 소매치기는 이를 악물며 그것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칼로스는 피해자를 돕기 위해 다른 손으로 소매치기의 손목을 옥죄었다. 도드라진 뼈 바로 위, 움푹 들어간 부분을 손아귀 힘으로 강하게 조이자, 소매치기는 통증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쥐었던 손을 폈다.
칼로스의 도움으로 돈주머니는 무사히 주인의 손에 들어갔다. 천으로 된 주머니를 열어 원래 있던 액수가 맞다는 것을 확인한 피해자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경비대가 나타난 것은 안도한 피해자를 돌려보낸 직후였다.
신고를 받고 신속히 출동한 그들은 현장에 도착하는 순간 입을 떡 벌렸다. 몸소 범인을 제압하고 있는 칼로스와 곁에 있는 아네타를 알아본 것이다.
‘인사하지 말고 모르는 척해.’
아네타는 당장이라도 자신들의 신분을 거리 한복판에서 밝힐 것 같은 그들을 향해 입모양으로 말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경비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합 다물었다.
경비대는 아네타와 칼로스가 민가의 옷을 입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수개월 전, 두 사람과 마주했던 동료들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경비대의 대대적인 개편을 주도한 당사자와 마주치자, 그들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저기…….”
“소매치기를 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입을 뗀 경비대원 중 하나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하자, 다른 한 명이 잽싸게 끼어들어 감사를 전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그들에게 칼로스는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소매치기를 인계 받은 경비대는 가 봐도 좋다는 칼로스의 말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몰린 시선은 떠나갈 줄을 몰랐다.
아네타는 차라리 자리를 뜨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우리가 확인해야 할 건 모두 확인했으니까 이쯤하고 갈까?”
“그래. 당신 말대로 하자.”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시선이 따라붙자, 아네타와 칼로스는 비교적 인적이 드문 외곽 쪽으로 돌아서 거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외곽은 상가 거리보다 한산했다. 한껏 차분한 분위기의 거리를 걷게 되자, 걸음은 절로 느려졌다. 다음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느긋한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칼로스가 예고도 없이 나란히 걷던 아네타의 손을 잡은 것은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네타가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자, 그는 더 단단히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손 놓으라는 말은 하지 마. 이제 사심을 충족할 시간이니까.”
칼로스는 상가를 벗어났으니 업무도 끝난 거라고 주장했다. 그 모습이 사뭇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자, 아네타는 자신이 사랑에 빠져도 제대로 빠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런 말할 생각 없어. 걱정 마.”
누군가의 손을 잡고 길을 걸어 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아네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전엔 내가 당신이랑 손잡고 이곳을 걷게 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 했었는데.”
“나는 아니야. 이런 날이 오기를 늘 기대하고, 기다리고, 꿈꿔 왔어. 그런데 그러길 잘한 것 같아. 결국 이렇게 소원이 이루어졌잖아.”
칼로스는 손끝으로 제 손에 감싸인 아네타의 손등을 살살 쓸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지자,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 당신 덕분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해. 이게 다 꿈이고, 허상이면 어쩌나 두려울 만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당신을 보며 또다시 살아가겠지. 당신을 사랑하고, 소원하고, 기다리면서.”
분명히. 그리 읊조리는 목소리는 짙은 확신을 담고 있었다.
“절망은 하겠지만 생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아. 살아서 당신을 봐야 하니까. 무언가를 바라고, 또 그것을 이루는 건 살아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일이니까 지독하게 살아남아서 당신 곁에 섰을 거야.”
칼로스는 정면에 두었던 시선을 아네타에게로 돌렸다.
“이게 내 진심이고, 바닥이야. 이런 내 마음이 당신에게 무겁게 느껴질까?”
“가볍게 느껴진다면 거짓말이겠지.”
진중한 목소리로 건넨 물음에 아네타는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멈춰 선 그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당신 마음을 가볍게 여길 수 있을 리 없잖아.”
저러다 말 거라고, 에레즈가 나타나면 분명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건 모두 과거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무게가 짐처럼 얹어져서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건 아니야. 오히려 내가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기반이 되어 주었다면 모를까.”
아네타는 칼로스의 눈동자를 애정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 우리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손잡고 나란히 걷고 있을 테니까. 내가 이 손을 놓고 당신을 떠날 일은 없을 거야.”
가랑비에 옷 젖어들 듯 서서히 그에게 젖어든 가슴은 어느새 그와 같은 감정을 가득 머금었다.
만약 처음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네타는 결국 그가 쏟아 내는 사랑에 굴복했을 것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사람을 끝까지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나도 이제 당신 없는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거든.”
아네타는 잡고 있던 손을 올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놀란 얼굴의 그를 보자 웃음이 절로 새었다.
이제는 자신이 그에게서 받은 사랑을 돌려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