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진전 (3)
“고아원에 있어야 할 당신이 무슨 일로 황궁에 있는 거죠? 내게 볼 일이 있어서 온 건가요?”
아네타는 가까이 다가온 원장 데보라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지금쯤이면 한창 엉망진창인 고아원 체계를 바로잡고, 적응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시기일 텐데. 아무리 보육 교사를 추가로 고용했다고 해도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도로 올라온 것이 의아했다.
그저 그런 일 때문에 이곳까지 오기엔 스펜드 고아원이 있는 론프와 제도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아네타는 머뭇거리는 데보라의 대답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게, 다름이 아니라 각하를 만나 뵙기를 청하는 아이가 있어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
“네. 아이 말로는 각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해요. 조금의 틈만 생기면 자꾸 혼자 빠져나가려고 해서 수차례 타이르기도 하고, 야단도 쳐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데보라는 아이가 혼자 고아원을 빠져나가는 것에 성공했을 때 일어날 사고들을 염려하다, 결국 동행을 자처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아이와 한 번만 만나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리고 그 끝에 건넨 말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어떻게 보면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아네타는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십중팔구 용병들과 관련된 것일 테니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여겼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 건 없고요?”
“네. 각하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한 게 전부였어요. 저는 아이가 한 약속을 믿고 있습니다.”
언제 덜덜 떨었냐는 듯, 데보라는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아이를 향한 신뢰를 드러냈다.
그 모습을 높이 산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 번 만나 보는 걸로 하죠.”
아네타가 만남을 수락하자, 데보라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그에 반해 칼로스는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괜찮겠어?”
“응.”
아네타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할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리한 부탁을 한다면 난감하기야 하겠지만, 거절한 뒤 돌려보내면 그만이었다.
“알겠어.”
아네타가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것 같자, 칼로스는 순순히 수긍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아이는 어디에 두고 혼자 들어온 거지?”
“황궁 정문 앞에 있어요. 각하께서 거절하실 경우를 고려해 기사분들께 맡기고 왔습니다.”
데보라는 두 사람의 마음이 변할세라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데보라의 뒤를 따라 황궁의 정문으로 향하자 그곳을 지키던 기사들에게서 인사가 쏟아졌다. 그들이 비켜선 자리에는 데보라의 말대로 아이가 하나 있었다.
“헨델.”
데보라는 아이를 헨델이라고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던 아네타는 아이의 이름을 듣고 버논이 가져다준 서류에 적혀 있던 인적 사항을 떠올렸다.
아이는 고아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열다섯 살이었지만, 겉보기로는 그보다 한두 살쯤 더 어려 보였다.
헨델은 아네타와 칼로스를 번갈아 보다, 머지않아 아네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자신이 찾는 아데나워 후작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네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헨델이 돌발 행동을 보인 것은 그녀가 제 앞에 섰을 때였다.
헨델은 아네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으로 넙죽 엎드렸다.
아네타는 그 모습을 보고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바닥에 이마를 댄 아이의 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만큼 그 모습을 나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어지는 말에 아네타를 비롯한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형들을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앳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일순간 사위가 고요에 잠겼다.
조용히 상황을 살피던 기사 중 하나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정확히 꽂혀들 정도였다.
“……헨델, 각하께 드리고 싶다는 말이 그 말이었니?”
“네.”
데보라가 애써 놀라움을 감추며 묻자, 헨델은 긍정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랬어요. 만약 다른 분이 피해자였다면…… 형들은 진작 목이 잘렸을 거고, 형들이 그런 일을 한 원인인 저희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고요.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애한테 별소리를 다 했다. 아네타는 헨델과 데보라의 대화를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칼로스 역시 느끼는 바가 같은지 아이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는구나. 나는 네가 용병들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내 앞에서 엎드린 줄 알았는데.”
“용서, 못 해 주시잖아요.”
아네타가 느낀 바를 고스란히 드러내자, 헨델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어느새 아이의 두 눈에 고여 넘실대는 눈물도 그 안에 비친 총기를 가리진 못했다.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헨델의 반응에 마음이 안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네타는 긍정했다. 고아원 일만 아니었다면 목을 베어야 마땅한 이들이었다. 이 이상의 선처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네 형들이 그런 짓을 벌인 원인이 너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원인은 너희가 아닌, 그 원장 부부니까. 그리고 감사 인사에 대한 답은 미안하다는 말로 해야 할 것 같구나.”
아네타는 헨델의 앞으로 몸을 낮추었다. 그러곤 아직도 엎드려 있는 아이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나라의 녹을 받는 사람 중 하나로서, 또 그들과 같은 어른으로서 진심으로 사과할게. 너희들에게 그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헨델을 일으킨 뒤 자신 역시 똑바로 선 아네타는 스스럼없이 아이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인 눈이 요동치자, 잠시 아이의 상태를 살핀 아네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화는 이걸로 끝내는 게 좋겠어. 이제 그만 돌아가렴.”
그 말은 억지로 눈물을 참아 내고 있는 아이를 위한 배려였다. 눈에 힘을 주며 버티고 있던 헨델도 그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헨델은 아네타의 앞에서 허리를 푹 숙여 보인 뒤 재빨리 뒤돌아 뛰어갔다. 그러자 당황한 데보라는 아이를 쫓아가기 위해 급히 인사를 남긴 뒤 멀어졌다.
“헨델, 같이 가야지!”
아네타는 헨델의 뒷모습에 시선을 두었다. 멀어지는 작은 등 뒤로 아이가 눈물을 참으며 돌아서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무래도 아이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
다음 날.
아네타는 칼로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난번 암행 때 입었던 옷을 꺼내 들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두 번째라 그런지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네타가 입은 옷을 바라보는 시녀들의 눈빛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네타가 다시는 꺼내 입을 수 없도록 조각내어 불에 활활 태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민가의 옷을 태워 버리는 것은 상상으로만 그쳐야 했다. 저래 보여도 일단은 황제가 보낸 물건이었으니까.
믿기지 않는 것과 더불어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주인의 소유물을 함부로 망쳐 놓을 수는 없었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시녀 코코는 치솟아 오르는 거친 생각을 지우며 입을 떼었다.
“각하께서는 거적때기를 걸쳐도 빛이 나는 분이시지만, 그래도 아쉬워요. 모처럼 공작 전하와 함께 외출하시는 건데 민가의 옷을 입고 가셔야 한다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 놀러가는 게 아니라 업무의 연장선이니까.”
비교적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이점 외에도 장시간 걸어 다닐 것을 고려하면 평소 입는 옷보다는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낫다.
아네타는 착용하고 있던 장신구를 풀며 말했다.
“오늘은 언제 들어오실 예정이십니까?”
“아마 저녁때쯤에 들어올 것 같은데. 암행은 점심때 끝낼 예정이지만, 그 이후로는 칼로스와 시간을 보내려고.”
“그럼 저녁 식사만 준비시키겠습니다.”
아네타는 이사벨의 물음에 스스럼없이 칼로스와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아네타가 장족의 발전을 보이자 이사벨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에 반해, 코코를 비롯한 몇몇의 시녀들은 여전히 치장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날에는 꼭 치장을 해야 하는데…….”
아네타가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저택의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눈치채고 있었다. 아네타와 칼로스가 연인 혹은 그에 준하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따지고 보면 정식으로 하는 첫 데이트이니 한껏 치장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어 속이 끓었다.
“얘도 참. 상대에게 잘 보여야 하는 분은 각하가 아닌 발티모어 공작 전하시잖아. 각하께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지.”
그러던 때에 입을 연 사람은 코코와 붙어 다니다시피 하던 릴리였다. 자명한 사실을 말하듯 지금까지의 관계를 빗댄 말을 꺼내자, 시간을 확인한 아네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 이제는 아니야. 나도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졌거든. 그러니 치장은 다음에 하는 걸로 하자.”
솜씨 발휘는 그때 마음껏 하라는 말을 남긴 아네타는 어느새 흥분으로 두 뺨을 물들인 시녀들을 외면하며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겼다.
문을 나서기 무섭게, 등 뒤로 기쁨과 환호에 찬 비명이 들려왔다. 이사벨이 시녀들을 타박하여 소리는 금세 잦아들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도 웃음기가 묻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말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막상 시녀들이 저리 반응하니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들뜬 목소리로 이어지는 대화 소리를 뒤로한 아네타는 열기가 몰려 홧홧한 얼굴을 식히며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중간쯤 내려왔을까. 때마침 문이 열리더니 칼로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발을 들이는 것과 동시에 한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는 아네타와 시선이 마주치자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요즘 따라 유독 그의 웃는 얼굴을 자주 보는 것 같았다.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아는 아네타는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다.
“좋은 아침이야, 아네타. 잠은 잘 잤어?”
“나름. 당신은?”
“나는 잘 못 잤어. 오늘이 기대 돼서.”
“어린애 같네. 설렌다고 잠도 못 자고.”
아네타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를 놀리듯 말했지만, 칼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뻔뻔하게 받아쳤다.
“이게 다 당신에게 빠져서 그래. 당신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떨리는 걸 어떡해.”
나름 칼로스가 건네는 사랑 고백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닌 것 같다. 다른 이가 했다면 코웃음만 쳤을 텐데, 역시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잠시 입만 벙긋거리던 아네타는 또 한 번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자 서둘러 칼로스를 지나치며 말했다.
“……늦었어. 여기 서서 이러지 말고 마차로 가자.”
아네타가 먼저 걸음을 떼자, 칼로스는 다 안다는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같이 가, 아네타.”
칼로스는 세 걸음 만에 아네타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그녀의 회피가 이전의 회피와 다르다는 걸 알기에, 그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