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진전 (2)
이혼한 칼로스와 아네타의 분위기가 전과 달라지자, 귀족들은 귀신 같이 그 사실을 눈치채고 수군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변화가 관계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칼로스를 대하는 아네타의 태도가 눈에 띄게 유해진 까닭이었다.
칼로스를 밀어내기 바빴던 아네타가 그를 받아들이자, 그녀의 곁을 맴돌다 가차 없이 거절당한 이들은 밀려드는 후회와 안타까움에 땅을 쳤다.
역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고, 아네타 아데나워도 마찬가지였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접근했다면 지금 저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착각과 상상은 자유라고 하니 아무리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더라도 입만 다물고 있었으면 반이라도 갔을 텐데. 그들은 그 답도 없는 생각을 고스란히 입 밖으로 냈다.
지나가다 우연히 그리 말하는 영식을 본 테르사는 코웃음을 쳤다. 결혼 전, 아네타와 같은 상황을 여러 차례 겪었던 그녀는 날카로운 일침을 가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어떤 도끼로 찍느냐에 따라 다르지. 너희들은 쇠도끼는커녕 나무 도끼도 안 될 것 같은데.”
다른 건 몰라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안 될 놈은 끝까지 안 된다. 백날을 찍어 봐라. 나무가 넘어가나. 테르사는 아네타가 넘어가는 것보다, 그들의 신체 중 어느 한 곳 부러지는 게 더 빠를 거라고 여겼다. 칼로스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저들은 칼로스가 아닌 자신에게 걸린 것에 감사해야 했다. 테르사는 혀를 차며 한심하기 그지없는 이들을 지나쳤다.
***
아네타와 칼로스는 이미 자신들에 관한 소문이 퍼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칼로스는 아네타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거리를 두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그의 생각보다 아네타는 들려오는 말들에 의연했다.
“정말 괜찮아?”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칼로스는 자신의 물음이 새삼스럽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묻는 이유는 이미 익숙해졌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그런 거, 이제 일일이 신경 안 쓰려고.”
다행히 아네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한평생을 그런 수군거림 속에서 살아왔다. 그렇다 보니 절로 깨닫는 게 있었다. 잘하든 못하든, 별다른 의미 없는 손짓 하나만으로도 떠들어 대는 이들이니 관심을 끄기로 했다.
“그것보다 진전이라…… 우리 상황과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네.”
비록 계약 결혼이었지만 부부 관계였던 때도 있었고, 후계자를 목적으로 한 침대까지 썼었는데 진전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생각해 보면 우리 둘, 진도 순서가 엉망이야. 결혼부터 시작해서 잠자리, 이혼, 연애 순이라니. 이혼만 빼면 완벽한 역순이잖아.”
“그럼 이번엔 본래 순서를 따라가면 되지. 물론, 이혼은 빼고.”
“그거, 다음엔 잠자리를 노리겠다는 선전포고는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칼로스는 살살 눈웃음을 쳐 왔다. 그를 처음 봤을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누가 이 남자를 보고 그때의 그 칼로스 발티모어라고 생각할까. 아네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안하지만, 잠자리는 결혼 뒷 순서로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왜. 혹시 내가 지금껏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그런 거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칼로스는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같은 공간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은밀한 밀어를 속삭이듯 구는 모습에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감이 대단한데.”
“그럴 수밖에 없지.”
“이유 있는 자신감이다, 이거지?”
아네타는 차마 뻔뻔하게 되묻는 말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쩌나. 그 자신감의 근본 때문에 그런 건데. 난 해 뜨는 거 보고 자기 싫어.”
“안 그럴게. 날 믿어, 아네타.”
“안 믿어. 못 믿어.”
아네타가 두 번 연속으로 불신을 보이자, 칼로스는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런다고 본래의 날카로운 눈매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지만, 아네타의 눈에는 퍽 안쓰러워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당신은 그쪽으로는 이미 신용을 잃었거든. 그 약속 지킨 적, 한 번도 없잖아.”
“그건…… 당신이 너무 예뻐서 그래.”
“내 탓하지 말고.”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은 것과는 별개로, 아네타의 단호함은 여전했다.
칼로스는 결국 말없이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했다. 그동안 아네타는 고개를 돌려 벽에 달린 시계를 보았다.
“마침 슬슬 폐하를 뵈러 가야 할 시간이네.”
아네타가 러셀을 알현하러 가야 할 시간임을 알리자, 칼로스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다는 듯 그녀 앞으로 손을 내민 것은 그다음이었다.
“가자.”
더는 거절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칼로스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그런 그를 알고 있는 아네타는 기꺼이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굳은살이 박여 단단한 손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끊임없이 내쳐졌음에도 끊임없이 내밀어진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그녀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달구었다.
‘진작 이 손을 잡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몇 번이고 반복했던 생각이 불쑥 솟아났지만, 아네타는 곧 마음가짐을 바꾸었다. 이제라도 잡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아네타와 칼로스는 손을 잡고 나란히 레녹스를 나섰다. 그 광경을 여럿이 목격하고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아네타는 관심은 물론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그가 전해 오는 온기에 더 집중하는 게 나았다.
함께 걷는 길이라서 그런지 황제궁까지의 거리가 평소보다 짧게 느껴졌다. 이는 비단 아네타만의 감상은 아닐 터였다.
황제궁에 도착해서는 잡았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잡고 있었다고, 벌써부터 빈손에 온기가 달아나 아쉬운 마음이 솟아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네타는 그가 잡았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시종장의 안내에 따랐다.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놀라운 변화였다.
놀란 것은 아네타뿐만이 아니었다. 러셀은 소문의 진상은 물론 사실 여부까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증거를 보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네타는 그를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인사를 마쳤다.
두 사람은 늘 그랬듯 상석에 앉은 러셀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자리에 앉았다. 마주보고 앉은 구도였지만,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은 러셀을 향한 채였다.
“상태를 확인하려고 불렀는데 다행히 괜찮은 것 같군, 아데나워 후작.”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동안 먹어 온 약들이 모두 러셀이 하사한 약재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의무관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네타는 서신에 이어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했다.
러셀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이윽고 그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언급했다.
“두 사람, 요즘 분위기가 좋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다.”
칼로스는 마치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주저 없이 긍정했다. 언뜻 듣기엔 무미건조한 투였지만,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네타와 러셀은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칼로스.”
아네타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칼로스를 말리려 했지만, 그보다는 러셀의 말이 더 빨랐다.
“됐으니 둬라. 그것보다, 그 냉철하던 녀석을 저리 만들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책임져 줬으면 좋겠군.”
러셀이 만류한 건 칼로스가 아닌 아네타였다. 그는 대답 같은 건 필요치 않다는 듯 칼로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물었다.
“그리도 좋으냐?”
칼로스의 대답이야 뻔했다.
“네. 좋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스스럼없이 러셀의 물음에 긍정했다.
“네가 좋다면 됐다. 두 사람 다 연애에 한해서만 답답하게 굴기에 속에서 천불이 일던 참이었는데.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군.”
가감 없이 느낀 바를 말해오는 러셀의 태도는 신랄했다. 아네타와 칼로스는 차마 그 위로 말을 얹을 수 없었다.
“일이라도 못했으면 쫓아낼 수라도 있지.”
“…….”
“…….”
조개처럼 입을 다물며 시선을 피하는 두 사람을 보며, 러셀은 끌끌 혀를 찼다. 그러다 이제 그만 서류를 처리해야 할 시간이라는 걸 깨닫고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당분간 한가할 예정인 눈앞의 연인과 달리, 러셀의 책상엔 아직도 봐야 할 서류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이만 서류를 처리해야 할 것 같군.”
완벽주의인 러셀이 자신의 인가가 필요한 서류를 두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러셀은 두 사람에게 다른 일을 시켰다.
“두 사람은…… 밀폐된 공간에서 노닥거리지 말고, 정 할 일이 없으면 지난번처럼 암행이라도 다녀오도록.”
러셀은 그 말을 끝으로 아네타와 칼로스를 쫓아내듯 내보냈다. 말이 좋아 암행이지, 실상은 칼로스에게 아네타와 데이트할 구실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러셀은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 정도 보상이야 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자신이 두 사람을 죽어라 부려먹기만 하는 주군이 아니라는 자기만족을 얻었다.
처음엔 누군가가 그에게 피곤해서 헛것을 듣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직접 앞에 데려다 두고 보니 그제야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러셀은 지금껏 보아 온 모습 중 가장 환하게 핀 아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도했다.
그는 제 하나뿐인 핏줄이 이대로 쭉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
“아네타. 내일 말이야.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암행을 나가 보는 게 어때?”
러셀이 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일념하에, 칼로스는 황제궁을 나서며 넌지시 아네타의 의사를 물었다.
“좋아.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아네타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승낙하자, 그의 얼굴이 환히 피었다.
“일하러 가는 건데도 그렇게 좋아?”
물론 아네타도 러셀이 무슨 의미로 그런 제의를 했는지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시치미를 뗀 이유는 짓궂은 장난기가 돈 탓이었다.
‘실망할까?’
아네타는 칼로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칼로스의 반응은 아네타의 예상과는 달랐다.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에서 뭘 하든 상관없어. 그만큼 당신을 사랑해.”
칼로스의 예고 없는 고백은 아네타에게 아주 잘 먹혀들었다. 그녀는 일할 땐 일을 하더라도, 점심때부터는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해 달라는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때였다. 칼로스와 함께 레녹스를 향해 걷던 아네타는 제도에 있어선 안 되는 얼굴을 발견하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 아네타?”
아네타가 따라오지 않자, 칼로스는 의문을 느끼며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같은 구간을 초조한 얼굴로 오가고 있는 중년 여성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아는 사람이야?”
“응. 저 사람, 내가 스펜드 고아원의 원장으로 보낸 사람이야.”
“원장으로 보낸 사람이 여기 왜 있어?”
“글쎄. 다른 건 몰라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러 온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네타는 마침 시선이 마주친 여성, 데보라를 보며 대꾸했다. 데보라는 아네타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