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진전 (1)
아네타가 다시 황궁으로 출근하게 된 것은 제도로 돌아온 지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가 겪은 일들이 파다하게 알려진 까닭에, 마주친 이들은 하나같이 걱정 어린 낯으로 안부 인사를 건넸다.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네타는 짧게나마 호응해 준 뒤 그들을 지나쳤다.
황궁 정문에서 레녹스까지 가는 동안 같은 일은 몇 번이고 반복됐다. 몇 걸음 걷지 않아 한 명, 또 몇 걸음 걷지 않아 한 명.
자꾸만 멈춰 서게 되는 상황이 퍽 성가셨지만, 저택에만 있을 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사벨의 철저한 감시 아래,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 위에서만 보내야 했으니까.
이사벨은 당장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출근을 미루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청해 왔지만, 아네타는 모르는 척 거절했다.
‘일상으로 돌아간 모습을 보여야 나를 손만 대도 깨질 유리처럼 대하는 상황이 끝나지.’
엉망이 된 생활 패턴 탓에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후회가 막심했지만, 막상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 잠이 싹 달아났다.
‘역시 나오길 잘했어.’
아네타는 오랜만에 맡는 아침 향기가 달가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서늘한 공기가 폐부에 가득 차자,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아네타는 어쩐지 가벼운 걸음으로 레녹스로 향했다. 집무실 앞에 다다라 노크와 함께 문을 열자, 칼로스가 반겨 주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아네타.”
아데나워 후작저에서 지내다시피 하며 아네타의 곁에 머물렀던 그는 오늘도 긴 시간을 떨어져 있던 정인을 보듯 그녀를 맞이했다.
무언가를 읽고 있었던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손에는 종이가 쥐여 있었다.
“나 왔어. 그런데 뭘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었던 거야?”
아네타는 칼로스의 손에 들린 것을 힐끗 보았다. 크기를 보니 서류 같지는 않았다.
“신문이야. 누가 이곳으로 보냈길래 읽어 봤더니 당신에 관한 기사가 나 있더라고.”
“나에 관한?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아네타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기억을 되짚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사가 나올 만한 일은 없었다.
“설마 납치 관련한 기사는 아니지?”
그거라면 수일이 지난 지금까지 끈질기게 우려먹을 만도 하다. 아네타가 미간을 찌푸리자, 칼로스는 제 앞에 있는 테이블 위로 신문을 펼쳤다.
“아니야. 이리 와서 직접 봐.”
“뭔데 그래?”
아네타는 칼로스의 옆으로 다가가 테이블 위로 시선을 두었다. 굳이 다른 활자를 눈에 담을 필요도 없이 기사의 헤드라인에는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네타 아데나워 후작을 둘러싼 추문, 모두 허위 사실에 불과해.」
아네타는 손을 뻗어 신문을 집어 들었다.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아네타의 추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악의적인 루머라는 대목에 강세를 둔 기자는 아네타가 여러 예술인들을 같은 방식으로 후원하고 있었다는 증언도 함께 실었다.
“증인으로 마담 리페와 당신의 피후원자들이 이름을 걸고 나섰다던데.”
칼로스의 말에 따르면 기자는 직접 발로 뛰며 증인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모은 증언들은 고스란히 아네타가 화가 엘렌을 특별 대우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중 리페는 아네타가 처음으로 남성 화가를 후원하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나마 밝혔다. 언젠가 아네타가 리페에게 고해하듯 털어놓았던 사실은 대중들로 하여금 아네타의 결백을 믿게 만들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이는 엘레나가 죽기 전, 아데나워 후작저에 걸려 있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리페의 권유로 엘렌이 공개한 그림을 보고 아네타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만큼 두 사람의 그림체는 아무리 그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알아챌 만큼 흡사한 화풍이었다.
그렇게 아네타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그녀를 둘러쌌던 추문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이제 곧 추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재판 결과도 나올 테니, 내가 오명을 벗는 건 시간문제겠네.”
“그렇겠지.”
아네타는 만족을 느끼며 기자 이름을 확인했다. 신문이 허마이오니에서 발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대로, 해당 기사를 작성한 사람은 리타였다.
“신문은 리타가 보내온 건가?”
“맞는 것 같아. 이런 메모도 함께 붙어 있던데.”
리타가 대가를 바라고 이와 같은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다. 아네타의 믿음대로 칼로스가 내민 메모에는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겠다는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아네타는 자신이 리타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받은 도움에 대한 보답은 반드시 돌려주리라. 다짐과 함께 신문을 접어 내려 두자,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던 칼로스가 무언가를 가져왔다.
그의 손에 들린 갈색 병은 퍽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그리고 이건 당신 약. 어제 저녁에 다 떨어졌을 거라면서 의무관이 가져다주더군.”
“그 약, 드디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모르니 적어도 이 병이 바닥날 때까지는 계속 복용하라고 했어. 부디 당신이 의사 말을 잘 듣는 착한 어른이길 바라.”
의무관은 사흘 전에 아데나워 저택을 떠나 본래의 위치로 복귀했다.
아네타는 리타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칼로스를 응시했다.
그는 그새 약병을 열어 아네타가 먹어야 할 양을 스푼에 덜어 내고 있었다.
“그 착한 어른, 가만히 있어도 당신이 만들어 줄 것 같은데. 약 먹을 시간이 될 때마다 귀신 같이 나타나잖아.”
“당신이 유독 몸 챙기는 일에만 불성실한 사람이라서 그래. 당신이랑 오래도록 사랑하면서 살고 싶으니까 나라도 챙겨야지.”
칼로스는 당사자인 아네타보다 더 열심히 그녀의 약을 챙겼다. 지금 모습만 봐도 그랬다. 약을 물에 타는 그를 보니 어째서 의무관이 약병을 그녀가 아닌 칼로스에게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자, 마셔.”
아네타는 건네어진 잔을 내려다보았다. 물에 희석했음에도 검은색에 가까운 색을 띠는 액체는 쓴 냄새를 풍기며 맛을 짐작케 했다.
그녀는 받아 든 잔을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컵을 기울여 내용물을 머금자, 특유의 쓴맛에 몸서리쳐졌다.
그러나 칼로스는 찌푸려진 미간을 보고도 단호한 눈빛으로 종용했다.
“남김없이 마셔야 해, 아네타.”
이사벨이나 칼로스나. 기본적으로 그녀에게 무른 두 사람은 이럴 때에만 유독 엄해진다. 봐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아네타는 어쩔 수 없이 얼마 전에 마셨던 독약보다 더 쓰디 쓴 약을 쭉 들이켜야 했다.
그녀가 잔을 내려 두자, 칼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물을 따라 건넸다.
아네타는 입 안을 헹궈 내듯 잔을 완전히 비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몇 번을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맛이야.”
아니, 애초에 이 끔찍한 맛에 익숙해질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아네타는 병에 가득 차 있는 약을 보며 질린 듯 혀를 찼다.
약을 먹은 뒤로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류를 처리했다. 웬만한 건 납치를 당하기 전 저택에서 모두 마무리했기 때문에 밀린 서류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열댓 장뿐인 서류를 단시간에 처리한 아네타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맞은편에 앉은 칼로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칼로스는 아네타보다 먼저 서류를 끝냈는지, 책상 위로 턱을 괸 채 아네타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싶을 정도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까닭에 아네타는 입을 떼었다.
“……왜 그렇게 보고 있어?”
“예뻐서.”
칼로스는 서슴없이 진심을 말했다. 아네타는 그 말이 퍽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해 준 말이 믿기지가 않아서.”
“아직도 실감이 안 나?”
“당신이 나게 해 줄래?”
“설마 또?”
아네타는 칼로스가 곁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요구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그 말. 또 해 줘.”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칼로스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아네타를 바라보았다.
칼로스가 듣길 원하는 말은 아네타의 곁에 붙어 있는 동안 시도 때도 없이 해 달라고 청했던 말이었다.
아네타는 그때마다 칼로스가 바라는 대로 해 주었다.
“좋아해.”
“다시 한 번만.”
“당신을 좋아해, 칼로스.”
칼로스는 좋아한다고 말하는 아네타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신에게 애정을 말하는 그녀의 입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모양을 고스란히 기억하겠다는 듯이.
누가 보면 고작 좋아한다는 말에 그리 기뻐하느냐고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아네타의 마음은 ‘고작’이 아니었다. 몇 번을 들어도 설레고, 자꾸만 듣고 싶은 말에 쓸데없는 말을 가져다 붙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네타는 그 말이 그렇게 좋냐고 묻지 않아도 충분히 그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아네타는 조금 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랑해.”
그 끝에 그녀를 사로잡은 건 깊고 짙게 밀려드는 감정이었다.
결코 닿지 못할, 닿아서도 안 될 평행선이라고 여겼다. 그저 같은 곳, 같은 목적을 향해 나란히 나아가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그런데 그 선이 궤도를 이탈했다. 그는 끝없이 닿아 오려 손을 뻗었고, 그녀의 마음은 그에 물들었다.
그녀가 그었던 선도 어느새 그를 향해 휘어졌다. 당혹스러울 만큼 쉴 새 없이 내달렸다.
들이쉬는 숨보다 더 간절한 마음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아네타는 칼로스를 향한 제 마음이 매순간마다 더 깊어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놀라 굳어 있던 칼로스는 가슴 벅찬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네타의 옆으로 다가온 그는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은 채 몸을 낮추었다.
그러곤 더없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는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고백했다.
“사랑해. 당신을 나 자신보다 더 깊이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오늘보다 내일 더, 내일보다 모레 더 당신을 사랑할 거야. 내가 세상을 살아온 이유가 당신을 만나 사랑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어.”
아네타를 향한 칼로스의 사랑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 무게에 짓눌려 괴롭기도 했지만, 칼로스는 그 아픔마저도 사랑했다.
그것이 그의 사랑이었다. 무겁지만 버티고 싶어지는 사랑이었다.
“앞으로는 당신이 안심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 당신 마음을 얻었다고 해서 당신을 불안하게 하거나, 소홀히 대하는 일은 맹세코 없을 거야. 그러니 당신은 내 곁에만 있어 줘.”
칼로스는 아네타가 자신을 믿고 마음을 내 준 만큼, 지금보다 더 깊은 사랑을 그녀에게 안겨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런 그의 절절한 마음은 고스란히 아네타에게로 전해졌다.
“아니, 그런 노력은 필요 없어. 당신은 이미 내게 있어서 그런 사람이니까.”
변함없이, 또 거짓 없이 사랑을 고백해 온 그를 어찌 감히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아네타는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결국 두 선은 겹쳐졌지만, 그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