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독배를 든 자 (10)
찜찜한 표정을 짓던 버논은 곧 자신이 아데나워 후작저에 방문한 이유를 상기했다.
그가 폐하께서 전하라고 하셨다며 손에 든 서류 봉투를 하나씩 건네자, 침대 헤드에 기댄 아네타는 그것을 받아 들며 물었다.
“크리스의 상태는 어때? 깨어났어?”
“어제 저녁에 깨어났어. 아픈 곳 없이 씩씩하게 잘 먹고 잘 자고 있고.”
“다행이네.”
“그래. 불행 중 다행이지. 그러니까 이제 네 걱정이나 해. 셋 중에 가장 엉망이었던 사람이 누굴 걱정하는 건데?”
버논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겠다며 한탄했지만, 그 말을 귀담아 들을 아네타가 아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봉투 입구를 뜯었다. 내용물을 꺼내 들자 버논은 눈치 좋게 입을 다물었다.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것은 떠돌이 용병들의 신상 정보였다. 서류를 통해 파악한 공통점은 모두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모두 성인이 되기도 전에 고아원에서 나와 돈벌이를 위해 검을 잡았다.
스펜드 고아원. 아네타는 한두 번 들어본 게 전부인 이름을 되뇌며 함께 들어 있던 또 다른 서류를 집었다. 그것은 고아원 원생들의 인적 사항과 장부 내역이었다.
아네타가 집중한 것은 후자였다. 기록된 것과 다른 정황이 포착되었다며 일일이 비교 분석 해 놓은 서류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후원금은 물론 나라에서 지원 받은 운영비까지 횡령한 건가.’
아무리 횡령에 대한 죄가 중하다지만, 이 일과 관련 없는 서류를 함께 가지고 왔을 리는 없었다.
아네타는 칼로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들어 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지도 몰라.”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감이 잡혔지만, 제 짐작이 맞지 않길 바라며 낱장을 넘겼다.
아네타는 종이 한 장에 나열된 문자들을 읽어 내리며 그곳 아이들이 사는 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온갖 지원을 아낌없이 쏟아 부은 것처럼 보이는 기록과 다르게, 고아원의 실태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원장 부부는 마을에서 헌옷을 모아다 아이들에게 입혔고, 상태가 좋지 않아 싸게 들여온 음식들마저 아껴 가며 먹였다.
그렇게 해서 남은 돈은 모조리 제 자식들의 풍족한 생활을 위해 사용했다.
부부가 저지른 학대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술버릇이 고약한 원장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그의 부인 역시 남편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이들에게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값을 하라며 온갖 소일거리를 시킨 뒤 수익이 들어오는 족족 갈취한 것이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아이들의 상태가 좋을 리 없지.’
아네타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같은 내용의 서류를 보고 있던 칼로스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칼로스. 이제 그만 용병들이 내게 무얼 요구했는지 알려 줄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래, 그래야지.”
칼로스는 랜돌프의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확인할 때까지 미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가 아네타를 바라보는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그 고아원 아이들이 평범한 아이처럼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거였어. 또 모든 죄를 인정할 테니, 에레즈 바우터에게서 받은 의뢰비만큼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해 달라고 하더군. 그 돈은 자신들의 목숨값이라면서.”
용병들이 에레즈의 의뢰를 받아들인 이유는 제 동생 같은 아이들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배운 것도 없이 무작정 검을 잡은 그들은 한 번에 목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고 했다.
또한 그들은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믿을 만한 이에게 돈을 맡기고 제국을 떠날 생각이었다. 말이 좋아서 떠난다는 것이지, 실상은 도주를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칼로스의 난입으로 그 모든 것이 무산되자, 랜돌프는 돈을 전해 주는 것만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았다. 칼로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칼로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들을 아네타와 버논에게 말해 주었다.
당장 뼈와 살을 분리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이들의 사연을 전해 주는 것에는 다른 의미가 없었다.
칼로스는 그저 아네타가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랐다.
“그것 외에는? 다른 요구는 없었어?”
“없었어.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더군.”
아네타는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들어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 말의 의미는 불행히도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 같았다.
문제의 고아원은 개인의 소유였다. 그 말은 즉, 지원금을 받더라도 아네타의 관할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네타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립 시설 역시 국가의 관리 아래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칼로스. 당신 말대로 마음이 바뀌었어. 이런 식으로 거래의 대가를 치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지난번 다이아몬드 사건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내게 사연 있는 이들을 끌어 모으는 힘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닐까. 아네타는 진지한 고민과 함께 결론을 내렸다.
“좋아. 의뢰비는 용병들이 바라는 대로 아이들의 몫으로 두자. 단,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제한 없이 배울 수 있게 해 주는 식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싶어. 그래야 나중에 고아원을 나가서도 제대로 자립할 수 있을 테니까.”
“좋은 생각이야. 아이들에게 그만한 액수를 한 번에 넘겨주면 범죄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니까. 누구를 지목해서 돈을 넘겨주려 했는지는 몰라도, 그편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해.”
“우리를 못 믿겠다고 하면 공증을 해 주면 되고.”
버논과 칼로스는 차례로 아네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중 버논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네타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네타. 설마 그들의 사정이 딱하다고 해서 용서해 주려는 건 아니지?”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딱한 사정이 있다고 해서 내 목숨을 노렸던 기억까지 미화되거나 사라질 리가 없잖아. 게다가 목숨을 위협받은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행히 아네타는 어림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봐줄 수 있는 선은 딱 의뢰비까지야.”
용병들은 고아원에 관련한 문제를 자신들만 알고 있을 게 아니라 어디든 알려야 했다. 영주를 믿을 수 없다면 제도의 관리에게, 매체에, 단체에 알려야 했다.
만약 아네타였다면, 에레즈의 사주를 밀고하는 대가로 고아원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상황을 알릴 방법은 얼마든지 더 있었다. 다른 방법이 통하지 않아 이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면 처분을 두고 갈등했겠지만, 용병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시도도 없이 단번에 아무 죄도 없는 타인을 희생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아네타는 그것이 가장 최악의 선택지라고 단언할 수 있었고,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고아원 원장 부부가 그들에게 가해자였듯이, 그들 역시 아네타와 다른 두 사람에게 가해자였으니까. 아무리 그들에게 사연이 있었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용병들의 처분은 어떻게 할 생각인데?”
“폐하께 무기징역 선고를 청할 거야.”
“에레즈 바우터처럼 사형을 시키는 게 아니라?”
“원칙대로라면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좀 특수한 상황이잖아. 그 점을 어느 정도 감안할 수밖에 없어.”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정석대로 처벌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사정을 고려해 융통성을 보이는 것이 옳다. 아네타는 아직 저릿한 팔을 주무르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처벌을 말했다.
이번에도 역시 칼로스와 버논은 반발하지 않았다.
무기징역은 사회적 죽음과 다를 바 없는 데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니 불만은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처럼 느껴질 것이다.
제국은 절대 세금을 수감자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고, 음식이나 보급되는 물건들의 값은 언제나 극악스러운 강도의 노동으로 치러야 했으니까.
“남은 건 고아원 문제인데.”
감옥살이가 확정된 것은 용병들뿐만이 아니었다. 아네타는 원장 부부에게 떨어질 형량이 적어도 30년 이상은 될 거라고 예측했다. 더불어 지원금을 빼돌려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기까지 했으니 재산 몰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정황상 스펜드 고아원이 국가 소유의 시설로 귀속되는 것은 확정에 가까웠다. 칼로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처벌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을 짚어 주었다.
“일단 원장직을 맡길 적임자부터 찾는 게 어때.”
“그래야지.”
스펜드 고아원에는 그녀가 고르고 골라 검증된 사람이 보내질 것이다.
아네타는 그것이 분신을 모르는 척 눈감아 준 것에 대한 마지막 대가라고 생각하며 적당한 인물을 머릿속으로 추렸다.
***
제국 역사상 최초로 영광의 주인이 처형당했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소식이 휩쓸고 지나간 제도는 충격에 빠져 있었다.
러셀은 보란 듯이 이번 사건에 대한 진실을 알렸고, 증거를 제시했다.
낱낱이 밝혀낸 이유는 누구도 에레즈의 처형에 대해 토를 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러셀의 의도대로 에레즈의 처분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그랬다간 꼼짝없이 황제는 물론 영광의 가주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될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꼬투리 하나 잡자고 그와 같은 막심한 손해를 자처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에레즈가 납치한 세 사람의 가문은 각자 다른 소속이었다. 황제파의 아데나워, 귀족파의 라폴리, 그리고 중립의 데번까지.
가문의 일원도 아닌 가주를 납치했으니 귀족들이 한 마음 한뜻으로 입을 다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에레즈 바우터의 죄와 죽음이 밝혀지자, 용병들에 대해서도 자연히 알려졌다.
러셀은 용병들이 지하 감옥에서 다른 지역으로 호송될 때, 아네타에게 그들을 만나 보겠냐고 물었지만, 그녀의 거절로 대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네타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앉아 하나씩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원장 교체는 원장 부부의 체포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또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네타는 고민을 거듭하다 이사벨을 불러 제 뜻을 밝혔다.
“앞으로는 주기적으로 각지의 고아원을 살피게 해야겠어. 사용인들 중에 적당한 사람으로 몇 명 추려 줘, 이사벨.”
“예, 알겠습니다.”
아네타는 따로 사람을 고용하는 것보다 기존의 사용인에게 추가로 봉급을 지급하고 정찰을 보내는 쪽을 선택했다. 그 편이 더 신뢰도가 높다는 말에 이사벨은 이견 없이 지시를 받아들였다.
이사벨이 방을 나서자, 아네타는 러셀이 보내온 서신들을 정리했다. 지원금을 받으려면 사설 또한 국가의 관리하에 놓여야 한다는 새로운 방침에 대해 논의한 흔적이었다.
러셀은 보호 시설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경우, 해당 지역의 영주 역시 피해를 보게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야 영주가 앞장서서 약자의 보호에 힘쓸 테니까.
그렇게 일이 착착 진행될 동안 칼로스는 에레즈의 의뢰를 받았던 길드와 바우터 남작가를 정리했다.
에레즈의 악행과 관련된 자들은 각자 죄질에 걸맞은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중 가장 많은 일에 연루된 데다, 전 바우터 남작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집사 젠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아네타는 에레즈의 장신구를 훔쳐 달아나려던 젠이 결국 추격대에 잡혀 죽었다는 소식을 떠올렸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자라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에 비해서 에레즈 바우터의 죽음은 아직도 실감이 안 나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뜬 것뿐인데 표독스러운 얼굴로 노려보던 이가 죽고 없다니. 관계가 어땠든 기분이 참 묘했다.
하지만 자업자득인 것을 어쩌겠는가. 아네타는 에레즈의 협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손에 쥐어야 했던 독배를 떠올렸다.
독을 마신 건 자신이었지만, 그 순간 진정으로 독배를 들고 있던 자는 에레즈 바우터가 아니었을까. 아네타는 그리 생각하며 등받이에 늘어지듯 몸을 기댔다.
이제 정말 악연이 끝났다.
원작의 주인공인 에레즈의 죽음으로써, 아네타는 이제 온전히 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