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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72화 (72/122)

72화. 독배를 든 자 (9)

아네타는 숨을 헐떡이며 칼로스의 뺨과 입술 위로 가쁜 숨을 흩뿌렸다. 쉴 새 없이 부딪혀 오는 입술 때문에 하얗게 바랜 시야가 깜빡이며 점멸하는 순간이었다.

몸을 낮추고 있던 검은 형상이 불쑥 위로 솟더니 둘만의 세상에 빠져 있던 두 사람을 현실로 끌어냈다.

“멍! 멍멍!”

티르는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듯 짖으며 풍성한 꼬리로 바닥을 탕탕 내리쳤다. 제게 주의를 주었던 것과 다르게, 아네타에게 달려드는 주인의 모습에 불만을 느낀 것이다.

티르는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냐고 말하듯 불손한 눈빛으로 칼로스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러다 아네타가 뒤늦게 제 존재를 깨닫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납게 치켜떴던 눈매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티르?”

하마터면 다시 기절하는 줄 알았던 아네타는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칼로스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를 움직이기엔 터무니없이 모자란 힘이었지만, 칼로스는 마지못해 물러나 주었다.

티르는 아네타가 이름을 불러오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잉끼잉 애처로운 소리를 냈다. 약속한 게 있어 허락 없이 다가가지 못하니 아네타가 자신을 부르게끔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쩌다 내숭만 늘어서는.”

칼로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아네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행동들이 티르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당신에게 배운 게 아닐까 싶은데.”

“내게? 그럴 리가.”

칼로스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지만, 아네타의 감상은 변함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처연한 모습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티르를 향해 손짓했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팔 전체에 퍼졌지만 인상을 찡그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리 와, 티르.”

아네타의 부름에 티르는 잽싸게 반응했다. 몇 걸음 만에 가까워진 티르는 몸통으로 칼로스를 밀어내며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얼떨결에 자리를 빼앗긴 칼로스가 헛웃음을 지었지만 관심 밖이었다. 주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티르는 침대 위로 앞발을 올렸다.

아네타는 티르가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티르는 의외로 점잖게 그녀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약 냄새와 붕대 감긴 손을 보고 상태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티르는 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다친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를 눈치챈 아네타는 멀쩡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해 주는 거야?”

“멍!”

“고마워. 역시 우리 티르밖에 없네.”

아네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티르를 향해 애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에 칼로스는 질투와 함께 묘한 경쟁심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나도 걱정했어.”

“알아. 거기서 그런 표정으로 안아 오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아네타는 칼로스가 보였던 표정과 말투, 행동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떨림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별장에서의 상황을 언급하자, 칼로스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게 두 번씩이나 먼저 입을 맞춘 이유를 물어도 될까?”

“그 질문, 왜 안 하나 했네.”

아네타는 티르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칼로스를 응시했다. 그는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아네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칼로스는 그간 아네타의 변화에서 희망을 엿봤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희망에 불과했다. 부부로서 몸을 섞은 횟수도 적지 않으니, 입맞춤 같은 건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대답이 나오든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역시 사람인지라 도무지 마음을 비울 수 없었다.

“하고 싶어서 했어. 충동적으로. 날 위해 주고 걱정해 주는 당신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였거든.”

그런 그에게 아네타가 안겨 준 것은 실망이 아닌, 더 큰 희망이었다.

한 순간의 충동이라 할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네타는 누군가가 단순히 제 걱정을 해 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을 내어 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칼로스는 그녀가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기쁘다 못해 설레기까지 했다.

아네타는 그만큼이나 충동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사실 크리스의 집에서 정신을 잃는 순간에 칼로스 당신 얼굴이 떠올랐어. 그리고 후회했지. 조금 더 솔직한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 볼걸 그랬다고.”

“아네타, 그 말은……?”

“그래. 이젠 정말 당신이 이성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어. 좋아하는 것 같아, 당신을.”

마음 가는 대로 살아 보겠다는 다짐을 했었지만, 생각해 보면 다짐만 했을 뿐이지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네타는 그 사실을 생명의 위협까지 겪고 나서야 깨달았음에 자조했다.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아네타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이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둬 보려고. 더는 억누르지도, 감추지도 않을 거야. 당신이 있는 그대로 마음을 내보이면서 내게 부딪혀 오는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해 볼게.”

아네타는 여느 때보다 솔직한 마음을 칼로스에게 전했다.

“이거, 꿈은 아니지?”

“꿈이길 바라?”

“아니. 절대.”

“걱정 마. 꿈 같은 거 아니니까.”

아네타의 확답이 들려오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게 서 있던 칼로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아네타의 곁에 있는 티르에게로 향했다.

분명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영리한 티르는 말로 하지 않아도 제 주인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었지만,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들어주고 싶지 않은 요구였다.

“티르.”

하지만 칼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름까지 불리자,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게 된 티르는 체념과 함께 마지막으로 아네타의 손을 핥아 주었다. 그러곤 주인이 바라는 대로 침대에서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 칼로스가 다가왔다.

그에 의문을 표할 틈도 없이, 아네타의 시야가 반전되었다. 칼로스가 조심스레 그녀의 뒷머리를 감싼 채 뒤로 밀어 눕힌 것이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아네타.”

아네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칼로스는 낮은 목소리로 거듭 속삭였다. 누군가에겐 고작 좋아한다는 말일 뿐이겠지만, 칼로스에겐 의미가 남다른 말이었다.

“당신, 이러려고 티르를 쫓아낸 거야?”

아네타는 그가 말을 하거나 숨을 내쉴 때마다 제 어깨에 뜨거운 숨이 번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물었다.

칼로스가 허리 힘으로 버티고 있는 덕에 그녀에게 실리는 무게는 없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네타는 불퉁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티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쫓아낸 게 아니라, 잠깐 비켜 달라고 부탁한 거야.”

칼로스는 해명하듯 말했지만, 아네타를 뺏긴 티르의 반응은 가차 없었다. 휙 소리 나게 고개를 돌린 티르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나 삐쳤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모습이었다.

공작저로 돌아가 삐친 티르를 달랠 생각을 하면 눈앞이 아득했지만, 지금 그에게 우선순위는 아네타였다. 칼로스는 한참 동안이나 아네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버텼다.

아네타는 약속대로 그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 주었다.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린 건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던 때였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아네타는 불현듯 떠오른 존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들을 잊고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레즈 바우터랑 용병들은 어떻게 됐어?”

“에레즈 바우터는 폐하께서 즉결 처형을 명하셔서 로펠락 후작의 관통으로 처형당했어. 시신은 산짐승 먹이로 던져 주기로 했고, 작위를 박탈당한 바우터가도 곧 정리될 거야.”

칼로스는 자신이 에레즈 바우터에게 독을 먹였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아네타가 알게 된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그녀에겐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용병들은 황궁 지하 감옥에 갇혀 있지. 처우는 당신 의견을 묻고 정한다고 하시더군.”

“내 의견을 반영하신다고?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모조리 목을 베어 버리실 줄 알았는데.”

“당신과 그 대장이라는 자가 했던 거래 때문일 거야.”

“그 거래, 사실 지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는데 말이지.”

아네타는 여전히 거래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 않았다.

랜돌프가 분신에 대해 모르는 척 넘겨주긴 했지만, 그 사실이 그가 저지른 다른 잘못들까지 상쇄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에레즈의 사주를 받아 납치를 감행하지 않았다면, 그런 빚을 질 일은 없었을 테니까.

“나도 당신이라면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들어 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지도 몰라.”

아네타는 칼로스의 말이 꼭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말처럼 들려 의아함을 드러냈다.

“무슨 요구를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 거야?”

“알고 있어. 당신과 대면시키고 싶지 않아서 물어봤거든.”

아네타는 적어도 그들이 목숨을 살려달라는 부탁 같은 건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칼로스가 저런 반응을 보일 리 없었을 테니까.

아마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에레즈 바우터처럼 처리해 버리지 않았을까. 아네타는 그리 짐작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당신이 들어줄지 말지 결정하기 전에 그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폐하께 조사를 부탁드렸어.”

“결과는 나왔어?”

“그건 나오는 즉시…….”

날이 밝았으니 슬슬 소식이 들어올 때도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아네타의 물음에 답하던 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의해 칼로스의 말이 끊겼다.

“나야, 칼로스. 네가 원하는 정보를 가지고 왔어.”

그리고 그 노크 소리의 주인은 들어간다는 말과 함께 문을 열어젖혔다. 들려온 목소리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이의 것이었다.

칼로스는 때마침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한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저 녀석을, 통해서 전해 주시기로 하셨지.”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을 때 작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아네타도 깨어 있었네. 듣기로는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왜 아네타가 아닌 네가 안정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칼로스.”

칼로스의 말대로 러셀의 명령을 받고 온 버논은 두 사람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응시했다. 언제 그렇게 사랑이 싹 튼 거냐는 물음에 아네타는 결국 또 한 번 칼로스를 밀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칼로스. 이만 비켜 줘.”

칼로스는 아네타의 요구에 순순히 물러났다. 그러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티르가 버논에게로 다가가 바지를 물어 당겼다.

“오, 티르. 너도 여기 있었어?”

버논은 오랜만이라는 인사와 함께 연신 바짓단을 잡아당기는 티르의 앞에서 몸을 낮추었다. 그때였다. 눈높이를 맞추며 아는 체를 하는 그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툭 올라왔다.

버논의 머리 위로 올라온 것은 티르의 앞발이었다. 티르는 앞발을 움직여 버논의 머리를 툭툭 치더니, 흡족한 기색을 보이며 그가 열고 들어왔던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알 수 없는 행동에 버논이 혼란에 빠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방금, 티르가 나한테 뭘 한 거야?”

“뭐겠어. 칭찬이지.”

정확히 말하면 아네타와 칼로스를 떨어뜨린 것에 대한 칭찬일 것이다. 주인인 칼로스의 설명에 버논은 멍하니 티르가 떠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칭찬을 받은 게 아니라, 당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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