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독배를 든 자 (8)
테르사가 에레즈 바우터를 향해 관통을 겨눈 것은 그가 핏덩이로도 모자라 내장 조각까지 뱉어 내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에레즈의 숨이 가늘어지는 순간에 마지막 고통을 선사함과 동시에 그의 숨통을 끊어 주었다.
수백 개의 화살은 비처럼 쏟아졌다. 화살받이가 된 에레즈의 시신은 당연하게도 흉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기사들은 익숙하다는 듯 시신을 제도까지 운구했고, 사로잡힌 용병들 역시 함께 압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용된 것은 산의 중턱에서 발견되었던 두 대의 마차였다.
***
칼로스가 정신을 잃은 아네타를 데리고 후작저에 도착한 것은 하늘이 검게 물들었을 무렵이었다.
아연실색하며 달려 나온 이사벨에게 아네타를 맡긴 칼로스는 곧장 황궁으로 가 러셀을 알현해야 했다.
칼로스는 보고를 올리는 과정에서 용병들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또한 별장에서 회수했던 에레즈 바우터의 영광을 내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내보인 바우터 가문의 영광에는 엉망으로 금이 가 있었다. 러셀은 그걸 보고 적잖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창밖으로 떨어진 걸 회수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영광이 에레즈 바우터의 숨이 끊기는 순간 이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물리적인 충격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단순히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깨진 거라면, 로펠락가의 관통은 진즉에 소실되고 없었겠지.”
영광이 물리적인 충격에 의해 망가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증거로 건국일로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온 영광들엔 작은 흠집 하나 나 있지 않았고, 그것은 수백 년을 전장에서 굴러온 관통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르지. 다른 능력을 통제하는 능력 같은 건 나나 내게 충성을 맹세한 자가 가진 능력이 아닌 이상 성가실 뿐이니까.”
러셀은 지배자적 발언을 하며 통제의 표면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금속 위로 남은 균열은 손끝에 선명한 감각을 남겼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산산이 조각날 것 같은 그것의 거취야 당연했다.
“영광은 국고에 보관할 테니 그리 알리도록 해.”
러셀은 에레즈의 즉결 처형을 명하는 순간부터 정해 두었던 장소를 말했다. 통제는 국고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다른 국보들과 함께 엄중히 보관될 예정이었다.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주인이 악한 짓을 저지른 데다, 망가지기까지 했어도 영광은 건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보물이었다. 다른 국보들보다 우선시 되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에레즈 바우터의 시신은 산에 버려 짐승들 먹이로 던져 주는 걸로 하지.”
“용병들은 어쩌실 요량이십니까?”
“거래가 있었다고 하니 그들에 대한 처우는 아데나워 후작이 깨어나면 의견을 묻고 정하려 하는데.”
“예.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칼로스는 러셀의 결정에 불평 없이 수긍했다.
그에겐 곧 축객령이 내려졌고, 조급한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선 칼로스가 향한 곳은 공작저였다.
그는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밀린 일을 해치우듯 빠르게 하루 첫 식사를 끝냈다. 목욕과 환복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여유 없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린든은 마지막 단추를 채우기도 전에 다시 저택을 나서려 하는 칼로스를 보며 물었다.
“후작저로 가시려는 겁니까?”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선선히 수긍한 린든은 칼로스를 막아서지 않았다. 잠시도 쉬지 않는 칼로스가 걱정이 되었지만, 만류한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주인이 아님을 노집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린든은 순순히 물러났지만, 칼로스의 발길을 붙드는 복병은 따로 있었다. 문 앞에서 서성이던 티르는 칼로스가 가까워지자 그의 앞을 막고는 짧게 짖었다.
“멍!”
티르가 새끼일 적부터 길러 온 칼로스는 자신의 반려견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원할 때만 보이는 눈빛과 앞을 가로막는 행동. 그 두 가지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티르. 함께 가고 싶어서 그래?”
“멍!”
티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짧게 짖었다. 주인의 애정을 담은 손길에도 티르의 얼굴에선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사용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아네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되었으리라.
“데려가 줄게. 대신 말썽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해. 아네타를 봐도 저번처럼 달려들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
칼로스의 허락은 티르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나서야 떨어졌다. 날아서 가는 편이 가장 빠르겠지만 저리도 원하는데 어쩌겠는가. 칼로스는 티르를 위해 본래의 계획을 접어 두고 마차를 준비시켰다.
시간은 오래 소요되지 않았다.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무섭게, 티르는 앞발을 들어 문을 열었다. 칼로스는 자신보다 앞장서서 걷는 모습을 보며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가만 보면 자신이 아네타의 반려견을 맡아서 키우고 있는 것 같았다.
“제국의 영광을 뵙습니다.”
준비된 마차는 텅 빈 거리를 달렸고, 빠르게 후작저에 도착했다. 서둘러 나와 그를 맞이한 것은 칼로스와도 안면이 있는 아네타의 직속 시녀였다. 칼로스는 시녀의 인사를 받아주곤 물었다.
“아네타는?”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침실까지 안내해 드릴까요?”
“부탁하지.”
칼로스는 티르와 함께 시녀의 뒤를 따랐다. 시녀는 침실 앞에 다다르자 칼로스의 방문을 알린 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이는 아네타의 손에 약을 바르고 있는 의무관이었다. 보이지 않던 이사벨은 의무관의 곁에 서서 직접 그를 돕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공작 전하.”
의무관은 칼로스의 뒤로 보이는 티르의 존재에 놀란 기색을 보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칼로스에게 중요한 것은 인사가 아닌, 아네타의 치료였다.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마저 하도록.”
“네.”
칼로스의 만류에 의무관은 도로 의자에 앉았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제 손에 적나라하게 꽂힌 탓이다.
개중에는 사람의 것이 아닌 시선도 하나 있었다. 슬쩍 뒤를 돌아본 의무관은 티르의 사나운 외양이 눈에 들어오자, 슬그머니 고개를 본래 위치로 돌렸다.
그는 자신을 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이곳에 홀로 두고 떠난 제 상관 테르사를 잠시나마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서둘러 끝내 버리자. 그것이 의무관이 내린 결론이었지만, 상처를 돌보는 손길만 빨라졌다 뿐이지 그의 사전에 결코 대충이란 없었다.
능숙한 솜씨로 마무리 짓고 다시 붕대를 감아 준 의무관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칼로스의 입이 열렸다.
“아네타의 상태는 어떻지?”
“빠르게 호전되고 있습니다. 해독 작용 때문에 나던 열도 거의 내렸으니 곧 의식을 되찾으실 겁니다.”
안정을 되찾고 있다는 진단에 한시름 덜어 낸 칼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내가 지킬 테니 두 사람은 쉬다 오도록.”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을 이유는 없지.”
“그럼 필요하실 때 불러 주십시오.”
의무관은 칼로스의 권유가 빈말이 아님을 알고 순순히 응했다. 하루아침에 강도 높은 행군을 두 번이나 한 데다, 환자는 물론 신경 쓸 곳이 많아서인지 그의 체력은 바닥이 나 있었다.
“제가 머무실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의무관이 호의를 받아들이자, 자연히 이사벨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당분간 후작저에서 머물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곳에 지내는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칼로스는 그로부터 수 시간 동안 아네타의 곁을 지켰다.
그동안 이사벨이 여러 번 자신과 교대할 것을 청했지만, 칼로스는 망부석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언제 눈을 뜰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참을성 있게 자리를 잡고 앉아 긴 시간을 버틴 것은 티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의 정성이 통한 것일까. 칼로스가 붙들고 있던 아네타의 손이 잠시나마 움직인 것도 같았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칼로스는 기대 어린 눈으로 아네타를 살폈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눈을 뜬 아네타는 어둠 걷힌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밝게 트인 시야로 익숙한 천장과 칼로스의 얼굴이 들어오자, 아네타는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칼로스?”
“그래. 나야.”
익숙한 존재에 아네타는 천천히 무뎌졌던 몸의 감각을 깨웠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여 상체를 세우는 그녀를 칼로스가 도왔다.
독을 마셔 둔해졌던 감각은 다행히 기절해 있는 동안 회복되어 있었다. 아네타는 등 뒤를 받친 칼로스의 손을 느끼며 물었다.
“일은, 잘 해결된 거야? 크리스랑 세르세는?”
눈 뜨자마자 한다는 게 남 걱정이라니. 칼로스는 속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끓는 것을 느꼈지만, 퍽 그녀다운 모습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도 같았다.
“……무사해.”
그렇다고 해서 아네타를 향한 원망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아네타는 굳은 얼굴로 짧게 답하는 칼로스를 보며 그 사실을 눈치챘다.
“내게 화가 난 모양이네.”
“맞아.”
칼로스는 스스럼없이 긍정했다.
“그거 알아? 당신이 내게 화내는 거, 이번이 처음이야.”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모르는 척 외면하거나 말없이 제도를 떠났다 돌아왔을 때에도 칼로스는 아네타에게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이번 일에는 진심으로 화가 난 것처럼 보이자, 아네타는 신기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웃지 마.”
그 상황에 맞지 않은 웃음에 칼로스는 힘주어 두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평소라면 그 웃음 한 번에 모든 원망이 사르르 녹아내렸겠지만, 이번만큼은 자제해야 했다.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은 아네타로 하여금 하나의 충동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그것은 분신의 능력을 해제하기 전에 느꼈던 충동과 결이 같았다.
“어떻게 풀어 줘야 할지 모르겠어. 이러면 화가 좀 풀릴까?”
아네타는 이번에도 충동을 충동으로만 두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에 기습으로 입을 맞추었다 떨어진 것이다.
그러자 칼로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아네타. 이런다고 내가, 내가…….”
“봐줄 것 같냐고?”
“…….”
“봐줄 것 같은데. 이미 화 풀렸잖아, 당신.”
칼로스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붉게 물든 얼굴로 연신 마른세수를 하던 것도 잠시였다. 번쩍 고개를 든 칼로스는 돌연 큰 손으로 아네타의 뒷목을 감싸 왔다.
“넘어갔어. 넘어가긴 했는데, 아직 부족해. 더 해 줘.”
“나, 지금 힘이 하나도 없는데.”
“그럼 당신은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하느냐는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벌릴 때였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칼로스는 아네타가 말을 꺼낼 틈도 없이 그녀의 입술로 달려들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드는 혀는 거침없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불씨가 피어오르듯 열기가 맺힌 것은 순식간이었다. 뜨거운 혀는 자비 없이 입 안을 정신없이 헤집었다. 혀끝이 입천장을 쓸자, 아네타는 그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키스는 점점 짙어졌다. 두 사람의 혀는 시간이 갈수록 더 노골적이고 진득하게 얽혀들었다.
질척한 물소리가 적나라하게 귓가를 비집고 들었다. 칼로스는 아네타의 숨과 타액을 모조리 집어삼킬 듯 여유 없이 아네타를 몰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