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70화 (70/122)

70화. 독배를 든 자 (8)

칼로스는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에레즈는 입 안에 차오르는 액체를 삼키지 않으려 했지만, 칼로스는 그마저도 뜻대로 되게 두지 않았다.

가까이 서 있던 기사에게 눈짓하자 그가 눈치 좋게 다가와 에레즈의 코를 막았다.

위로 들린 고개로 인해 숨을 쉬기 위해서는 입 안에 든 것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숨을 참아 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머지않아 한계가 왔다.

“쿨럭, 쿨럭!”

에레즈는 억지로 넘긴 독 때문에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입 밖으로 샌 것 없이 모두 삼킨 것을 확인한 칼로스는 그제야 하관을 잡은 손을 놓고 물러났다. 잠깐 닿아 있던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자, 아직도 자백을 거부하고 싶나?”

칼로스가 턱짓으로 가리켜 보인 것은 테르사가 들고 있는 해독제였다. 독을 삼킨 에레즈가 절망을 하든 흐느껴 울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는 명백한 협박을 입에 담았다.

테르사는 그런 칼로스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그가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네타가 곁에 있을 때 한정이었다. 지금은 그저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온 것뿐이었기에 놀라울 것도 없었다.

애초부터 테르사에겐 지금의 모습이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악!”

에레즈는 독을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과 함께 몸을 들썩였다. 본격적으로 독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칼로스는 에레즈가 독을 마시자마자 반응을 보이는 것에 간신히 이성을 붙들었다. 저런 독을 아네타가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남은 독을 모두 털어 넣은 탓일까. 미노시는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에레즈의 몸을 집어삼켰다. 뜨거운 불길에 살라먹혀지는 것처럼 타는 듯한 갈증과 고통을 느끼던 에레즈는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네타를 죽이기 위해 구해 온 독을 제가 먹게 될 줄은 몰랐던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칼로스를 노려보았다. 원망 어린 시선에 맞서는 것은 적나라한 경멸과 살의였다.

그의 눈빛 어디에도 사랑은 없었다. 에레즈에게 있어 칼로스의 행동은 배신이었다.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 줘야 하는 거지?”

칼로스의 물음에 에레즈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에 찢겨 엉망이 된 입술 사이로 토해 낸 것은 말이 아니었다.

쿨럭.

참지 못한 기침과 함께 속 안 깊은 곳에서 뜨겁고 진득한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밀려 나왔다.

투둑.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와 바닥을 적신 것은 검붉은 핏덩이였다.

에레즈는 정신없이 숨을 헐떡였다. 제 입으로 뱉어 낸 것이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하자, 점점 뻣뻣이 굳어 가는 몸과 별개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죽고 말 터였다.

“이쯤 되면 빠져나갈 구멍 따윈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할 텐데.”

눈앞에서 피를 토하는 걸 봤음에도 칼로스는 여전히 에레즈를 향해 동정 한 자락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동정은커녕, 더는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 테르사를 돌아보았다.

“로펠락 후작. 화로로 쓸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나?”

“있긴 합니다만, 고문까지 하시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칼로스는 흉흉한 눈초리로 에레즈를 노려보며 긍정했다. 한층 수위를 더한 압박에 고통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에레즈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만으로도 죽음을 목전에 둔 것처럼 괴로운 상황에 고문이라니. 피에 젖은 입술과 턱이 두려움에 덜덜 떨렸다.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겁에 질린 에레즈는 칼로스가 독에 이어 또 다른 강수를 두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말할, 게요. 말하면, 끄윽. 되잖아! 다, 다 내가 한 일이야!”

에레즈는 간신히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쇳소리처럼 가랑거리는 목소리는 지난날의 죄악을 시인했다. 그러나 칼로스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네가 실토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겨우 그 말 하나로 끝내겠다고? 기회를 줄 때 네 입으로 빠짐없이 불어. 안 그럼 그 쓸모없는 입,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칼로스는 듣기만 해도 섬찟한 경고에 이어 물었다.

“전대 바우터 남작이 지병으로 천식을 앓고 있음을 알고 있었나?”

“나는 몰랐…… 아니. 알고 있었어.”

심문의 첫 시작은 전대 바우터 남작의 죽음에 대해서였다.

에레즈는 살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그 사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시도에 그쳤다. 거짓을 고하려는 것을 눈치챈 칼로스가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올린 까닭이었다.

“무슨 수법으로 바스티아를 먹였지?”

“매일 드시던 약이랑, 함께 우려서.”

그 이후로도 칼로스의 질문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영광의 능력을 속인 것부터 습격 때의 이상 현상, 이번 납치 사건까지. 하나하나 낱낱이 파헤치며 심문하자, 지금껏 해 왔던 추측들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칼로스는 에레즈의 자백을 통해 바우터가의 집사인 젠이 그가 저지른 여러 범죄 행각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 말했으니까 됐지. 이제, 그 약을……!”

모든 범행 사실을 털어놓은 에레즈는 몇 번이나 숨을 멈추며 말했다. 목이 졸린 듯 자꾸만 숨통이 막혀 오자 밀려드는 어지러움에 고개를 가눌 수 없었다.

“자백은 이쯤이면 되겠지?”

“네.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상황을 정리해야겠군. 해독제를 가지고 와.”

그러던 때에 들려온 말은 희망이었다. 에레즈는 테르사에게서 해독제를 건네받은 칼로스가 병의 뚜껑을 열자 남은 힘을 끌어모아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

이제 살 수 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그리 안도하던 때였다.

병을 든 손을 앞으로 뻗던 칼로스는 허공에 대고 그것을 뒤집었다.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은 자연히 중력에 의해 마른 흙바닥 위로 쏟아졌다.

“이게 무슨……!”

에레즈는 허망한 눈으로 자신을 살릴 해독제가 쏟아지는 것을 봐야만 했다.

칼로스는 에레즈의 반응을 똑똑히 눈에 담으며, 이번에는 병을 잡은 손을 놓았다.

쨍그랑.

귓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일순간 멍해졌던 정신을 깨웠다. 해독제를 흡수해 색이 짙어진 바닥 위로 엉망으로 깨어진 병 조각이 흩어졌다.

해독제가 없으면 이 고통은 계속될 것이고, 그 끝은 결국 죽음뿐이다. 에레즈는 사라진 해독제를 보며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자백하라며! 자백하면 살려 주는 거 아니었어?”

“내가 언제 너를 살려 주겠다는 말을 했었지?”

그러다 또다시 피를 쏟아 냈지만, 악을 쓰며 외치는 그에게 칼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되물었다.

“그런 죄를 저질러 놓고 목숨이 붙어 있길 바란다니. 어처구니없군.”

희망 고문을 통해 자백을 유도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칼로스는 에레즈가 자백을 하든 말든 고통을 덜어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도륙을 내어 바다에 뿌려도 시원찮을 상대에게 해독제라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갈수록 극심해지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에레즈는 묶여 있던 의자와 함께 옆으로 넘어갔다.

바닥에 부딪힌 충격으로 몸부림이 한층 더 격해졌지만, 그를 보는 칼로스는 일말의 연민도 느끼지 않았다.

“살려 줘…… 제발 나 좀 살려 줘.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끅. 제발. 하라는 건, 뭐든 다 할게.”

“잘못한 걸 알면 그에 대한 사죄는 목숨으로 하면 되겠군. 나는 원래 너 같은 부류가 하는 말은 믿지 않아. 살기 위해서 지껄이는 말이라면 더더욱.”

에레즈는 자신이 잘못했다며 눈물로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냉철하기 그지없자, 애원은 곧 발악이 되었다.

“왜,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 넌 내 것이어야 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은 확실했는데, 왜 나를 죽이려는 거냐고! 나는, 주인공인데!”

피와 함께 토해 낸 외침은 에레즈를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충분했다.

남은 힘을 모두 끌어다 쓴 모양인지, 에레즈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헐떡였다.

“망상도 심하면 병이라던데. 상태가 심각하네.”

두서없이 쏟아 낸 발악에 테르사가 질린 듯이 고개를 젓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즈 바우터는 범인(凡人)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로펠락 후작. 이제 그만 형을 집행하지.”

그에 반해 칼로스는 에레즈의 말을 철저히 헛소리로 치부하며 무시했다. 그러자 테르사는 언제 질린 표정을 지었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에레즈의 앞으로 가 섰다.

에레즈의 상태는 형을 집행한다는 말에도 제대로 반응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있었다.

테르사는 실핏줄이 터진 눈을 반쯤 뒤집고는 몸을 떨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에레즈 바우터. 너를 친족 살해와 작위 찬탈, 그리고 살해 미수 및 납치, 감금, 협박 등의 혐의로 작위를 박탈하고 즉결 처형한다.”

선고를 마친 테르사는 에레즈가 누구도 원망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본인의 행동에서 비롯된 결과를 고스란히 돌려받았기 때문이니까.

“끌고 가.”

칼로스의 지시가 내려오자, 관통을 손에 쥔 테르사는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녀에게 처분이 맡겨진 이상, 에레즈 바우터의 몸은 죽어서도 온전하지 못하리라.

“이제 남은 건 너희들뿐이군.”

테르사와 기사들이 처형을 위해 에레즈를 끌고 가자, 남은 것은 용병들이었다. 몸을 돌린 칼로스는 무리 중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랜돌프를 응시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칼로스의 뒤에 박혀 있던 시선의 주인이었다. 돌아서는 순간 시선이 마주친 그는 잠잠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직 저희에게 내릴 처분을 정하시기엔 이릅니다.”

“그런 걸 정할 자격이 죄인의 신분인 너희들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후작 각하와 거래를 하나 했거든요.”

“거래? 무슨 거래를 말하는 거지?”

랜돌프가 말하는 거래라면 칼로스 역시 알고 있었다. 아네타의 분신과 마주했을 때 그녀가 말해 준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칼로스는 금시초문인 척 물었다.

그러자 랜돌프는 아네타와 했던 거래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아네타에게 ‘기회’를 얻기도 전에 칼로스의 손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거짓으로 내용을 바꾸어 말하지 않을까 알게 모르게 신경을 세우고 있던 칼로스는 아네타가 말한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랜돌프의 말에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선 얼굴로 경고했다.

“만약 너희들이 저지른 죄를 사해 달라고 청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꿈 깨는 게 좋을 거다. 그런 요구를 들어줄 일은 없을 테니까.”

굳이 칼로스가 막으려 들지 않아도 아네타의 선에서 정리될 것이 뻔했기에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애초에 아네타가 그들과의 약속을 지킬지 지키지 않을지 미지수였지만 칼로스는 거기까지 언급하지 않았다.

“걱정 마십쇼.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바라는 건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뭐지?”

“도와 주셨으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가 얻은 기회를 그들에게 주셨으면 합니다.”

랜돌프는 칼로스에게 자신이 원하는 기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목적이야 뻔했다. 아네타에게 전해달라는 의미로 꺼내는 말임이 분명했다.

칼로스는 저들의 말 따위 들어주고 싶지 않았지만,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과 아네타가 다시 마주할 일 따위는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칼로스의 표정은 묘해졌다.

“정말 바라는 게 그것뿐인가?”

“네. 그렇습니다.”

칼로스가 재차 물었지만, 랜돌프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를 본 칼로스는 직감했다.

아네타는 분명 눈앞에 있는 자의 요구를 들어줄 거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