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독배를 든 자 (7)
아네타는 간신히 꺼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정확히는 까무룩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 몸을 감싼 천 너머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서둘러 의사에게 보여야 할 것 같았다.
그나마 끙끙 앓지 않아 다행일까. 칼로스는 열이 오른 뺨을 쓸어 주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는 세르세가 서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주먹 쥔 손이 보였다. 그것만 봐도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떨지 가늠이 되었다.
칼로스는 그에게 어째서 아네타를 지키지 못했느냐고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특정한 이유 없이 보호해야 하는 이와 보호 받아야 하는 이를 구분 짓는 것을 아네타가 바랄 리도 없었다.
게다가 세르세는 위기의 순간에 아네타와 함께 있어 준 사람이었다. 칼로스는 아픈 곳을 찌르기 보다는 그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밧줄로 주의를 돌렸다.
“줄은 스스로 끊어 낸 모양이군. 수고를 덜었어.”
세르세는 자신은 물론 곁에 있던 크리스의 줄까지 끊어 놓은 상태였다. 아네타와 마찬가지로 용병들이 놓친 단검을 이용한 듯했다.
칼로스는 단검의 주인들을 죽 훑었다. 그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지만, 홀로 자리를 비우기엔 저들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라폴리 자작. 데번 남작을 데리고 날 따라오도록.”
결국 칼로스는 세 사람을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기 위해 복도로 나왔다. 적당한 장소를 찾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큰 테이블이 있는 방을 발견한 칼로스는 안으로 발을 들였다.
빈말로라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상태의 테이블을 보며 못마땅함을 느낀 것은 잠시였다.
저런 곳에 아네타를 눕혀 둘 수 없다고 생각하던 칼로스는 그보다 더 더럽고 차가운 바닥이 눈에 들어오자, 현실과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칼로스가 택한 방법은 뿌옇게 앉은 먼지를 바람으로 쓸어 내는 것이었다. 비교적 말끔해진 테이블 위에 아네타를 조심스럽게 눕힌 그는 겉옷을 벗어 덮어 주었다.
군말 없이 크리스를 품에 안은 채 안으로 들어서던 세르세는 그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를 돌아보며 칼로스가 꺼낸 말은 의외였다.
“잠시 아네타를 부탁하지.”
“제게 말입니까? 전하께서 직접 보살피실 줄 알았는데요.”
세르세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슬쩍 미간을 좁혔다. 늘 아네타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상대가 안 하던 행동을 하니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다.
“나도 마음 같아선 자작에게 아네타를 맡기고 싶지 않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말이지.”
“뭘 하러 가시려는 겁니까?”
“지금쯤 꽁지 빠져라 도망치고 있을 잔당을 잡으러 갈 거다.”
혹시 몰라 얼굴을 모두 확인해 두었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다. 칼로스는 그들을 단 한 명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칼로스는 포켓에 넣어 두었던 짧고 뭉툭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후발대에게 위치를 알릴 용도로 가지고 온 붉은색 연막이었다.
짐승 같은 촉을 지닌 테르사라면 알아서 잘 찾아오겠지만 아네타를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시켜야 했다.
마음 같아선 아네타를 업고 후발대와 동행하고 있을 의사에게 가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로는 풍압을 이겨 낼 수 없으리라.
칼로스는 창가로 가 연막에 불을 붙였다. 타다닥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심지를 타고 내려갔다.
이윽고, 그의 손에 들린 연막탄이 붉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방 안이 연기로 가득 차 버릴 것이 자명했기에, 칼로스는 그것을 창밖으로 던진 뒤 창가에 올라섰다.
“그럼 부탁하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칼로스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자신을 부르라는 당부와 함께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변신이었지만, 단련된 몸은 쉬이 지치지 않았다.
아니, 지쳤다 해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일과 관련된 이들을 모조리 잡아다 대가를 치르게 하기 전까지는.
칼로스의 예상대로 밖에 있던 용병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숨 가쁘게 도망가는 중이었다. 신호에 맞추어 날아오른 칼로스가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살벌한 굉음이 들려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줄행랑을 놓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등에 불이 붙은 듯 도망을 친다 해도 그들은 모두 칼로스의 손바닥 안이었다.
허공에 멈추어 날갯짓하던 칼로스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이들을 동시에 공격했다.
연달아 울리는 파열음과 함께 용병들의 비명이 메아리처럼 굽이치며 깊은 산골을 울렸다.
칼로스는 놀란 짐승들이 서둘러 기척을 감추는 것을 느끼며 쓰러진 용병의 발목을 으스러뜨릴 듯이 잡아 쥐었다.
이대로 카시반 산의 맹수들에게 던져 줄까 했지만, 이들에 대한 처분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칼로스는 끓어오르는 살심과 아쉬움에 혀를 차며 날아올랐다.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채 옮겨진 그들은 하나 같이 에레즈와 용병들이 있는 방으로 던져졌다.
목을 내려쳐 기절시킨 뒤 나무 뒤에 숨겨 두었던 용병도 예외는 아니었다. 칼로스는 모든 공모자들을 한곳에 몰아넣은 뒤 바우터가의 영광을 회수했다.
***
테르사가 이끄는 후발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하늘로 솟은 붉은 연기 기둥을 발견하곤 빠르게 산을 올랐고, 즉시 내부로 투입되어 상황을 정리했다.
테르사 휘하의 기사단 중 가장 중책을 맡은 이는 의무관이었다. 그는 칼로스와 버논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 세 사람의 진료와 치료를 도맡아야 했다.
“라폴리 자작님께선 목과 팔다리에 타박상만 입으셨고, 데번 남작님 역시 독한 수면제를 흡입하여 깨어나지 못하고 계실 뿐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그에 비해 아데나워 후작 각하께서는…… 외상에 내상까지 입으셨네요.”
뺨에 남은 손자국은 차라리 애교였다. 목 뒤의 푸른 멍부터 엉망으로 찢어져 피딱지가 앉은 손, 독으로 인한 내상까지. 의무관은 한숨을 삼키며 차근차근 아네타의 상태를 설명했다.
“다행히 내상은 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빈혈 증세를 보이실 수도 있으니 주의를 기울여 주셔야 합니다.”
의무관은 혹시 모르니 아네타가 이주쯤 약을 복용하며 안정을 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말에 당연하다는 듯 그러겠노라고 답한 사람은 칼로스였다.
“공작 전하.”
그러던 중 테르사의 부하 기사 중 하나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반응한 칼로스는 고개를 돌렸다. 먼저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힌 기사가 전한 소식은 그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다.
“단장께서 공작 전하를 모시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가지.”
칼로스는 지체 없이 기사를 따라나섰다. 죄인들을 지키고 있을 테르사가 그를 찾을 이유는 하나였다. 에레즈 바우터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이다.
칼로스가 제 손으로 에레즈 바우터의 목숨을 거두지 않은 것은 그간의 범죄 행위에 대한 시인을 받아 내기 위해서였다. 어쨌거나 그는 영광의 소유자였고, 그런 이를 처형하기 위해서는 타당한 사유가 있어야 하니까.
그 과정에서 테르사는 증인이자, 처형자가 될 예정이었다.
“당장 이거 풀어! 풀라고!”
기사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죽은 고목이 빽빽이 들어찬 곳이었다. 때마침 들려오는 외침에 칼로스는 이 이상의 안내는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며 기사를 물렸다.
“너희들, 내가 가만히 안 둘 거야.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얌전히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에레즈 바우터는 상상 이상으로 안하무인이었다.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잡혀 죄인의 신분이 되었음에도 악을 쓰며 소리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했다.
칼로스가 들이닥치자 입도 벙긋하지 못한 채 떨던 이는 온데간데없었다. 애써 무시하던 기사들마저 질린 기색을 보이는 가운데, 칼로스는 성큼성큼 그 앞으로 다가갔다.
“오셨어요?”
“그래. 심문은 진행 중이었나?”
“예. 하지만 보신 바와 같이 조금의 진전도 없습니다.”
굳은 얼굴로 칼로스를 맞이한 테르사는 질린 기색을 보였다. 그의 조부와 관련한 일부터 위기의 순간에 다른 영광의 능력을 봉인했던 것까지. 그가 저지른 죄를 빠짐없이 나열하며 자백을 받아 내려 했지만, 에레즈는 소리만 질러 댈 뿐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칼로스는 테르사의 설명에 볼품없는 의자와 한데 묶여 있는 에레즈를 응시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가쁜 숨을 씩씩거리던 에레즈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여전히 칼로스가 자신에게 해를 가할 수 없을 거라는 믿음을 품고 있었지만, 기대와 달리 칼로스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맡지. 아까 말했던 물건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용하실 겁니까?”
“못할 이유는 없지. 뿌린 대로 거두게 하는 것뿐이니까.”
테르사가 꺼내 든 것은 두 개의 약병이었다. 그것은 구석에 숨겨져 있던 에레즈의 짐을 수색하다 발견한 미노시와 해독제였다.
무슨 목적으로 남겨 두었는지는 몰라도 이 독이 그의 손에 또 한 번 악용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본인이 한 방울도 빠짐없이 마시게 될 테니까.
“그게 왜 당신들한테…… 그걸로 뭘 하려고!”
익숙한 모양의 병 두 개가 보이자 에레즈는 화들짝 놀랐다. 두려움에 질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단단히 묶인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신들이 말한 건 사실이 아니야. 난, 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어. 그저 내가 빼앗긴 것들을 되찾으려 했을 뿐이라고!”
에레즈는 주장했다. 자신은 유일한 직계 자손이기 때문에 작위를 노리고 조부를 해할 이유가 없으며, 다른 영광의 능력을 봉인할 힘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칼로스, 당신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당장 이거 풀라고 해! 어서!”
그 뒤로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발뺌이었고, 헛소리였다.
칼로스는 더 들어 줄 가치가 없다는 듯 다가가 우악스레 그의 하관을 잡아 쥐었다.
그대로 힘을 주어 누르자 에레즈의 입은 자연히 벌어졌다. 에레즈는 그의 손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로펠락 후작.”
칼로스는 테르사를 호명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테르사는 주저 없이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는 병을 열어 건넸다. 약학에 능한 부하를 불러 미리 독과 해독제를 구분해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을 건네받은 칼로스가 병의 입구를 들이밀자, 공포에 질린 에레즈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하관을 잡혀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없는 입으론 무슨 뜻인지 모를 외침이 거듭 새어 나왔다.
그러나 칼로스는 그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에 동정을 느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병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