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68화 (68/122)

68화. 독배를 든 자 (6)

“우리는 지금 3층 왼쪽 복도 끝 방에 있어.”

칼로스에게 위치를 알린 뒤 분신의 능력을 해제하자, 둘로 나뉘었던 시야가 하나로 돌아왔다.

그로 인해 칼로스의 얼굴이 사라지자, 아네타는 그를 만나게 된 과정을 떠올렸다.

아네타가 분신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랜돌프의 손에 이끌려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였다.

조심스레 옷장 문을 열고 나와 열린 문 사이로 슬쩍 고개를 내밀자, 끌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 복도가 보였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루트는 두 가지였다. 본체의 몸으로 끌려갔던 중앙 계단과 오른쪽에 나 있는 좁은 계단. 그중 후자를 통해 밑으로 내려가자, 창밖으로 입구를 지키는 용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뒷문과 이어진 후원 또한 사정은 같았다. 결국 그녀가 택한 방법은 복도 끝으로 가 건물 측면으로 난 창문을 넘는 것이었다.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떨어져 나갈 것 같던 창문은 다행히 작은 소음과 함께 열렸다. 그곳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신경이 더욱 곤두섰다. 나아가는 걸음은 물론 내쉬는 숨결 하나마저 조심스러웠다.

한시라도 빨리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압박감 속에서 아네타는 가장 먼저 분신의 손에 있는 상처를 터트렸다. 칼로스라면 반드시 자신을 찾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 행한 일이었다.

‘그 사람에겐 혹시 몰라서 한 일이라고 했지만.’

아네타는 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칼로스를 떠올리며 입가에 흐른 핏물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능력을 해제함과 동시에 터진 상처와 달리, 바닥에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감아 둔 천이 없는 걸로 보아 동일한 영향을 받는 건 신체에 한정되는 모양이었다.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은 다친 손뿐만이 아니었다. 닦아 낸 것이 무색하게, 그녀의 입에선 또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나왔다.

도수 높은 술을 들이켠 것처럼 목구멍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괴로워? 고통스러워? 겨우 이 정도로 아파하면 안 되지. 내가 너 때문에 입은 피해가 얼만데.”

아네타가 또 한 번 각혈을 하자, 에레즈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아네타의 머리채를 단숨에 휘어잡은 건 그다음이었다.

우악스럽게 다가온 손끝에 금빛 머리카락이 휘감기자, 아네타는 두피가 당겨지는 통증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성치 않은 몸으로 독을 마신 데다, 영광으로 인해 체력이 크게 닳아 버린 탓인지 숨을 쉬는 게 점차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네가 먹은 독은 말이야. 약효가 아주 천천히 돌지만 그만큼 지독한 독이라고 하더라고. 지긋지긋한 너를 죽이기엔 제격이지.”

에레즈는 널 위해 큰맘 먹고 구해 온 것이라고 말하며, 더욱 세게 아네타의 머리채를 뒤로 당겼다. 거칠기 짝이 없는 행동에 아네타는 자연히 턱을 치켜들어야 했다.

그 모습을 그저 지켜만 봐야 하는 세르세가 자괴감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네타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생리적인 눈물이 고여 있었다. 끈 풀린 마리오네트처럼 힘없이 늘어진 팔다리가 덜덜 떨려 왔다.

칼로스에게 해독제를 받아 마시긴 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치료제가 아닌 해독제였다. 이미 입은 내상은 어쩔 수 없었으므로 아네타는 이를 악물며 버텼다.

“넌 지금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를 거야. 너만 없으면 이곳은 온전히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가 되겠지. 역시 이 세계의 꽃은, 주인공은 나야!”

하지만 더는 저 정신 나간 소리를 들어 줄 시간이 없었다. 격앙된 목소리가 귓가를 앵앵 울려대는 가운데, 아네타는 부러 입매를 끌어올렸다.

“글쎄. 과연 네 뜻대로 될까?”

아네타는 제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 낸 듯한 에레즈의 얼굴이 삽시에 일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능력을 발현했다. 아네타의 분신이 나타난 지점은 에레즈의 등 뒤였다.

“뒤! 뒤를 보세요!”

그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던 이들 중 에레즈에게 분신의 존재를 알린 것은 랜돌프의 부하였다.

부하가 연신 삿대질을 하며 분신을 가리키자, 아네타는 재빨리 분신을 움직여 에레즈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분신은 곧장 통제의 줄을 움켜쥐었다. 정전기가 오르듯 찌릿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통제의 거부 반응은 그리 강하지 않았고, 오래 가지도 않았다.

“뭐, 뭐야!”

에레즈가 목 부근에 닿아 오는 손에 기겁하며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분신이 통제를 거침없이 잡아 뜯은 이후였다.

아네타가 둘인 데다, 사정없는 손길에 이음새가 끊어지자 에레즈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 어떻게 능력을……!”

에레즈는 통제를 되찾기 위해 몸을 돌리면서도 틀어쥐고 있는 아네타의 머리채는 놓지 않았다.

덕분에 움직임의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분신은 그 틈을 타 주변에 있던 책장에서 다 헤진 책 한 권을 꺼내 들어 창문을 향해 힘껏 던졌다.

책은 아네타가 의도한 대로 낡은 창문을 뚫고 나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는 산산이 조각나며 바깥으로 쏟아졌다.

“그거 이리 내놔. 미쳤어?”

분신은 허공을 할퀴듯 휘둘러지는 에레즈의 손을 피하며 쥐고 있던 통제의 널찍한 펜던트에 줄을 감았다. 그러곤 뚫린 창밖으로 통제를 던져 버렸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면서도 죄책감은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성치 않은 몸으로 들고 있다가 빼앗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바깥으로 던져서 칼로스에게 좀 더 확실한 신호를 보내는 게 나았다.

아네타는 놀라 입을 벌리고 서 있는 에레즈를 보다, 어느 순간 어지럼증을 느끼며 급하게 능력을 해제했다.

하나보다는 둘인 쪽이 에레즈의 손에서 벗어나기 수월하겠지만, 지금 아네타에겐 두 개의 영광과 몸을 동시에 움직일 체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더 유지했다간 정신을 놓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급히 내린 선택이었다.

그러나 에레즈 바우터는 아네타를 곱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아네타에게서 이적이나 분신을 빼앗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닥으로 밀어붙였다.

“너, 당장 말해. 어떻게 능력을 쓸 수 있는 거야!”

내가 분명히 못 쓰게 막았는데. 혼잣말로 작게 씨근덕거리는 목소리는 에레즈의 몸에 눌려 있는 아네타의 귀에 무리 없이 닿았다. 그녀는 에레즈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도 모르겠어? 넌 모두를 완벽하게 속였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네 진짜 능력 같은 건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어. 그저 모르는 척, 능력이 통하지 않는 척했을 뿐이지.”

아네타는 목이 쉰 것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진실을 알려 주었다.

에레즈를 속이기 위해 했던 일은 지금 생각하면 낯간지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쉽게 속아 줘서 고마워. 덕분에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찾았거든.”

방법을 찾았다. 그 자신만만한 말에 의문을 품을 새는 없었다. 갑자기 들려온 굉음과 함께 방 안의 창문이 모조리 깨져 나간 탓이다.

그와 동시에 들이닥친 것은 강한 바람을 몰고 나타난 칼로스였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세기로 불어오는 바람에 랜돌프와 용병들은 한 팔로 얼굴을 가리며 단검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시도에 불과했다.

용병들은 다발적으로 들려온 파열음과 함께 벽으로 날아가 부딪혔다. 공기가 응축되어 터짐과 동시에 그들의 몸을 날린 것이다.

개중에 머리를 부딪친 자들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자는 랜돌프를 포함하여 몇 되지 않았다.

그러나 칼로스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또다시 공기를 응축하여 그들의 명치를 강타한 것이다.

“커흑!”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급소를 얻어맞은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다른 무엇보다 확실한 처리 방법이었다.

용병들이 쓸려간 자리에 남은 것은 여전히 기절한 상태인 크리스와 능력의 여파로 인해 중심을 잃은 세르세뿐이었다. 바닥엔 주인 잃은 단검들이 나뒹굴었고, 그중 하나는 아네타의 지척까지 굴러왔다.

사납게 몰아치던 돌풍은 칼로스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멎었다. 살벌한 표정의 그는 까드득 이를 갈며 아네타의 상태를 살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아네타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에레즈를 치워 버리고 싶었지만, 무턱대고 능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척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은 아네타에게 충격이 가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에레즈 바우터. 그 손, 지금 당장 놓는 게 좋을 거다.”

칼로스는 넘실거리는 살기를 지우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사색이 되어 뒤를 돌아본 에레즈는 그가 서슬 퍼런 금안을 번뜩이자 턱을 덜덜 떨었다. 대답 한 마디 못 할 정도로 겁에 질렸음에도 그의 손은 거두어질 기미조차 없었다.

아네타는 에레즈의 주의가 칼로스에게 쏠린 틈을 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떨어진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칼로스가 구해 줄 때까지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은 닿을 듯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네타는 포기하지 않았고, 간신히 그것을 제 앞으로 끌어오는 것에 성공했다.

단검을 손에 쥔 아네타는 곧장 칼로스의 앞에서 얼어붙은 에레즈를 향해 날을 세웠다.

“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남은 힘을 쥐어짜내다시피 하여 머리채를 잡고 있는 에레즈의 팔을 횡으로 긋자, 고통에 찬 비명이 귓가를 찔러들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살갗을 가르자 에레즈는 반사적으로 손을 거두었다.

아네타는 에레즈가 머리카락을 놓는 즉시 옆으로 몸을 굴려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칼로스는 아네타와 에레즈 사이의 거리가 벌어지기 무섭게 능력을 발현했다.

쾅!

에레즈는 용병들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한 힘으로 제압당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에 처박힌 그의 몸은 앞으로 튕겨 나와 힘없이 바닥 위로 고꾸라졌다.

칼로스는 바닥에 쓰러진 에레즈의 손목을 사정없이 지르밟았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고통을 느낀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를 벌레 보듯 응시하던 것도 잠시, 칼로스는 급히 걸음을 옮겨 아네타에게로 향했다.

“괜찮아, 아네타? 그러게 내가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혼내는 건 나중에. 지금은 몸이 좀 안 좋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 천천히 숨을 고르는 아네타의 상태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칼로스는 걱정으로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아네타를 품에 안아 올렸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버티던 아네타는 칼로스의 품에 안긴 뒤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들자 눈앞이 빠르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미안, 칼로스. 나…… 조금만 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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