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독배를 든 자 (5)
강하게 주변의 공기를 밀어내며 날아오른 칼로스는 매서운 속도로 디안타로 향했다.
활짝 펼친 날개를 위협적으로 펄럭이며 빠르게 지상을 훑는 그의 눈은 날카로웠다.
창공이라는 이름의 영광을 소유한 자답게, 빠르게 스치는 바람은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깃털 사이사이를 스치며 안정감 있게 몸을 감싸 올리는 바람은 그에게 추진력을 부여했다.
쏘아지는 화살처럼 나아가는 그의 기세에 비행하던 새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덕분에 그는 야속하리만치 푸른 창천을 독점할 수 있었다.
평야가 주를 이루는 내륙에 위치한 디안타 인근의 산이라면 두 곳으로 특정된다.
지형이 복잡하기로 이름난 에론 산과 사나운 짐승이 많아 누구도 그곳에서 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카시반 산.
그중 아네타가 있는 곳은 에론 산이었다.
산속 어딘가에 옛 귀족이 살던 별장이 있을 거라는 버논의 정보를 떠올리며, 칼로스는 지척에 있는 카시반 산을 지나쳤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그 위의 상공을 지나며 면밀히 살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헐벗은 나무들뿐이었다.
에론 산에 당도한 칼로스는 눈으로 숲을 샅샅이 훑었다. 본래의 모습과 같이 검은빛을 지닌 머리가 좌우로 움직였다.
구불구불하게 나 있는 산길은 낙엽에 가려져 위에서 내려다봐야만 그 형태가 대충이나마 눈에 들어왔다.
‘족적을 찾는 건 포기해야겠군.’
흔적을 찾기엔 방해물이 너무 많다. 그리 느끼던 찰나, 바삐 움직이던 칼로스의 눈에 드디어 무언가가 걸렸다.
비탈진 산 중턱. 좁은 길에 가로막힌 듯 서 있는 것은 두 대의 마차였다. 칼로스는 굳이 고도를 낮추지 않고도 충분히 마차의 형태를 살필 수 있었다.
하나는 짐마차였고, 다른 하나는 개인 소유의 마차가 분명했다.
그중 후자는 틀림없이 귀족가의 것이었다. 단순한 재력가의 소유라기엔 크기가 정해진 규격 이상으로 큰 것이 그 증거였다.
제국에서 개인 소유의 마차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에게만 소유가 허락되는 것이었고, 귀족이 아닌 자에겐 그 크기마저 제한된다. 그 사실을 상기하는 즉시 칼로스는 더 높이 날아올랐다.
아네타가 이곳에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은 셈이었다.
날개를 펄럭인 칼로스는 단숨에 산 정상에 올랐다. 그는 그대로 가장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앉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불어온 바람에 칼로스는 급히 몸을 틀었다. 바람에 실려 온 비릿한 혈향을 감지한 까닭이었다.
독수리는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후각이 뛰어난 동물이다.
인간에겐 주어지지 않은 동물적 특성은 창공의 힘으로 모습을 바꾼 칼로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칼로스는 인간의 범위를 한참이나 뛰어넘은 후각으로 비릿한 피비린내를 쫓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교묘한 위치에 숨겨져 있던 별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칼로스가 발견한 것은 가파른 절벽 아래에 숨겨져 있던 별장뿐만이 아니었다. 놀라 확장된 동공에 비친 것은 피 냄새의 출처였다.
눈에 익은 금빛 머리카락이 그의 시야 안에서 너울거렸다.
‘아네타!’
그를 인도한 혈향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네타였다. 다친 손에는 치맛단에서 뜯어낸 천이 붉게 얼룩진 채 감겨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홀로 탈출을 감행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네타는 주변을 경계하며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했다.
칼로스는 당장이라도 아네타의 곁으로 날아가 그녀를 제 품 안에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용병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암녹색 이끼로 뒤덮인 입구는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지키고 있었고, 억지로 문을 뜯어낸 듯한 본관 앞과 서쪽 고목, 말라붙은 풀 따위가 무성한 후원에는 각각 한 명씩 보초를 서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그들을 모두 도륙하고 싶었지만, 우선순위는 따로 있었다.
칼로스는 아네타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어 다행이었다.
‘지금이라면 아네타에게 접근해도 크게 문제는 없겠어.’
판단이 서자 칼로스는 기척을 죽이고 빠르게 활강했다. 제멋대로 굽이치는 고목들은 그의 모습을 가려 주었다.
순식간에 아네타의 지척에 다다른 칼로스는 그대로 그녀의 앞에 나섰다. 그러곤 이번에야말로 소리 내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네타.”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갑자기 나타난 존재로 인해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던 아네타는 익숙한 형상을 지닌 이를 보는 순간 가슴을 쓸어내렸다.
“칼로스.”
칼로스는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허리를 감싼 팔은 그녀를 온전히 제 품에 가두었다.
아네타를 품에 안고 나서야 칼로스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목덜미에 코를 묻어 향기를 들이켰다.
하지만 무엇보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그녀란 존재 자체가 그에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아네타가 없는 동안 칼로스가 느낀 것은 그녀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였다.
칼로스는 이와 같은 일을 또 한 번 겪느니, 차라리 미노시라는 독을 제 손으로 들이켜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칼로스는 자신의 죽음보다 아네타의 신변에 생기는 문제가 더 두렵게 느껴졌다.
아네타는 그런 그의 감정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아무런 저항 없이 그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아네타가 제 목숨 줄이라도 된다는 듯 매달려 있던 칼로스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별다른 이상이 없는 듯하자, 그의 시선은 자연히 피로 얼룩진 하얀 손으로 향했다.
“손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납치당할 때 저항하다가 생긴 상처를 일부러 터트린 거야. 당신이라면 멀리서도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테니까. 일종의 지표였달까.”
혹시 몰라 시도한 일이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다. 아네타가 그리 말하자, 칼로스는 애가 닳아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다친 손을 잡았다. 그 위에 감긴 천을 쓰다듬는 표정은 퍽 애달팠다.
“다친 곳은 더 없는 거지?”
“이 몸은 괜찮은데, 다른 몸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다른 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 설마?”
칼로스는 뒤늦게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렸다. 세르세 라폴리. 그가 가진 영광이 머릿속을 스치자, 얼굴 근육이 절로 굳어졌다.
“그 설마가 맞아. 지금 이 몸은 세르세의 영광으로 만든 분신이거든.”
애석하게도 아네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긍정이었다.
“당신 몸으로 빠져나온 게 아니었어?”
“이적에 걸린 제약 때문에 분신을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덕분에 독주를 마시게 생겼네. 두 잔 모두 독이 들어 있을 것이 자명한데, 독이 없는 잔을 고르면 세르세와 크리스를 살려 주겠다고 하더라고.”
아네타는 시간을 벌기 위해 골랐던 잔을 그의 등장에 놀라 쏟았으며, 에레즈 바우터가 그걸 보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덧붙였다.
“그 독은 분명 미노시일 거야. 에레즈 바우터가 수도 변두리에 있는 길드에서 그 독을 구했다더군.”
“독의 이름을 아는 걸 보니 해독제도 가지고 있겠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가지고 오긴 했지만, 그걸 먹는다고 해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절대 마시지 말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
“아니. 나는 마실 거야.”
아네타는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보였다. 칼로스는 나락으로 떨어진 듯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아네타.”
“그런 얼굴로 봐도 달라지는 건 없어, 칼로스. 당신은 여기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순간 창공의 힘을 봉인당하고 말 거야. 검을 뽑는다고 해도 인질이 있는 이상 상황은 더 악화될 테고. 그러니 차라리 내가 독을 마시고 에레즈 바우터를 방심하게 만들게. 어떻게든 그의 능력을 해제시킬 테니까, 당신은 내가 신호를 주면 그때 들어와.”
분신의 몸에 생긴 변화는 능력을 해제할 때 본체의 몸에도 똑같은 영향을 끼친다. 분신의 몸으로 해독제를 마시고 본체와 몸을 합치면 때에 맞추어 약효가 돌 것이다.
아네타는 그와 같은 계산을 마쳤고, 자신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러나 칼로스는 아무리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해도 동의할 수 없었다. 세상 어느 누가 사랑하는 사람이 독을 먹겠다고 나서는 데에 의연할 수 있을까.
극구 만류하고 나섰지만, 아네타는 그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미안, 칼로스. 이미 마시고 있어.”
“당신 정말!”
작게 소리치는 칼로스의 낯빛은 제가 독약을 마신 듯 창백한 얼굴이었다. 마치 심장이 끝없는 절벽 아래로 내동댕이쳐지는 것 같았다.
칼로스는 다급히 품 안을 더듬어 해독제를 꺼냈고, 뚜껑을 열어 아네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답지 않게 덜덜 떨리는 손은 그가 얼마나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마시고 돌아가. 지금 당장.”
“난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파리하게 질린 낯은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됐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본 아네타는 손을 뻗어 칼로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때였다. 아네타가 예고 없이 앞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발뒤꿈치를 들었다. 이어지는 행동에 원망을 담고 있던 칼로스의 얼굴이 일순간 멍해졌다.
입술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이 그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아네타는 그가 놀라움에 굳어 버린 틈을 타 언제 그랬냐는 듯 뒤로 물러났다.
칼로스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곤 제 입가로 손을 올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아네타가 제게 먼저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 무슨…….”
칼로스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벙긋거리는 사이, 아네타는 그에게서 받은 해독제를 들이켰다. 병이 바닥을 보이자, 아네타는 그것을 도로 그에게 돌려준 뒤 말했다.
“조금 있다 보자.”
무어라 말을 덧붙일 틈도 없이 아네타는 한마디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아네타가 능력을 해제하자, 홀로 남은 칼로스는 그녀의 돌발 행동에 대한 놀라움은 잠시 접어 두고 또다시 검은 독수리로 모습을 바꾸었다.
아직 본관 근처로 접근할 수 없으니, 고목 앞을 지키고 있는 용병을 처리하고 그곳에서 신호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칼로스에게 있어 소리 없이 용병 하나를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용병은 뒤늦게 제 등 뒤로 착지한 칼로스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칼로스는 거대한 날개로 용병의 입을 틀어막았다. 몸에 기억하는 각도로 그의 목을 꺾어 기절시키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날개를 거두자, 축 늘어진 몸은 흙바닥 위로 볼품없이 내동댕이쳐졌다. 그로 인해 뿌연 모래 먼지가 일어나자, 바람으로 그것을 걷어 낸 칼로스는 언제라도 아네타의 부름에 응할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