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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66화 (66/122)

66화. 독배를 든 자 (4)

“그자는 오지 않을 거다. 아니, 정확히는 오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겠지.”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영광을 소유한 가주들은 서로의 안위에 염려를 표하고, 문제가 생겼을 경우 너 나 할 것 없이 나서서 신속하게 대응한다. 가진 권력이 특별한 만큼 다른 가주의 안위가 제 안위와 같다고 여기는 까닭이었다.

그와 같은 특성이 오랫동안 이어져 온 만큼 에레즈의 불참에 몇몇은 자연히 의문을 품었다.

“조부상을 당한 이후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라는 이유로 영지에 내려갔다더군.”

“……자리를 비운 시기가 이상할 정도로 딱 맞아떨어지는군요.”

침음과 함께 흘러나온 헤첸 백작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즈가 아네타에게 이유 모를 악감정을 품고 있으며, 하는 행동이 수상쩍다는 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이미 눈치채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그들조차 마음 한 구석에 의심의 싹을 틔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데나워 후작, 라폴리 자작, 데번 남작. 이 세 사람을 납치한 범인으로 에레즈 바우터를 의심하고 있다.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껏 밝히지 않았던 사실들을 밝혀야겠지.”

러셀은 에레즈의 능력이 거짓이며, 조부를 독살하고 작위를 찬탈한 사실을 밝혔다.

그에 이어 습격이 있었던 연회에서 영광의 능력을 통제했던 사람 역시 에레즈였음을 밝히자, 그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능력에 대한 건 연회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친족 살인에 작위 찬탈이라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놀라움이 가신 자리에 남은 것은 분노였다. 잠시 격분하던 그들은 칼로스가 유독 말이 없자, 지금은 감정을 표출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가까스로 분을 삭였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에레즈 바우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도 가능하겠군요.”

그러던 중, 줄곧 침묵하던 클로린 공작이 꺼낸 말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클로린 공작이 사형을 언급하자, 회장에 있던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였다. 제국 역사상 영광의 가문 일원은 몰라도 가주를 처형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 영광의 주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과 영광을 지키기 위해서 황제에게 협력해 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주의 처형은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후계자 문제였다.

에레즈 바우터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복잡했다. 그의 조부인 전대 남작의 죽음 이후 바우터라는 성을 사용하는 이는 에레즈 하나만 남은 까닭이었다.

직계 혈족이 없다면 영광이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클로린 공작은 그를 모를 리 없음에도 뜻을 꺾지 않았다.

“남작을 죽이면 영광의 거취에 대한 문제가 생길 테지만 이미 수차례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폐하. 선처해 주시면 안 된다고 사료됩니다.”

조부를 죽이고 나타나 영광의 능력을 속인 것만으로도 사유는 충분했다. 거기다 귀족가 가주 셋을 납치하기까지 했으니 죄목이 극히 악질적이었다.

클로린 공작이 강하게 주장하자,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대와 같다. 그래서 범인이 진정 에레즈 바우터라면 재판 없이 즉결 처형을 명하려고 하는데.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거수해 보도록.”

당연하게도 황제의 결정에 반대를 표명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장일치로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러셀은 에레즈에 대한 처분을 결정지었다.

그러던 때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궁의 시종장이 성치 않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조급한 걸음은 그들이 앉은 테이블 앞에서 멎었다.

러셀이 무슨 일이냐는 듯 시선을 주자, 시종장은 깊게 고개를 숙이며 소식을 고했다.

“폐하, 케이너 백작께서 황궁에 당도하셨습니다.”

“드디어 쓸 만한 정보를 얻은 모양이군. 도착하면 지체 없이 바로 안으로 들여보내.”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둘 사이에 오간 대화는 간결했다. 시종장이 반듯한 자세로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나자, 테르사가 앞서 언급된 이름에 관심을 보였다.

“케이너 백작이라면 무역 협상을 위해 루티본 왕궁으로 떠나지 않았습니까. 벌써 돌아온 겁니까?”

“그래. 제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보를 모아 오게 했지.”

여독을 풀기도 전에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 것으로도 모자라 발품까지 팔게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그만한 적임자도 없었다.

러셀은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를 듣고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마침 저기 오는군.”

시종장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둔 터라 버논은 조금의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이가 등장하자, 칼로스는 누구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알아낸 건, 있어?”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버논은 그의 금빛 눈동자에 담긴 조급함과 간절함을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 역시 그와 같은 심정이었기에, 곧장 러셀에게로 시선을 돌려 정보원들과 함께 입수한 정보에 대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보고 드립니다, 폐하. 오늘 새벽, 용도를 알 수 없는 짐마차 한 대가 제도를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검문을 맡았던 경비병들이 뇌물을 받은 것인지, 그들의 신상이나 신분은 물론 출입 기록마저 없었습니다.”

이어서 버논은 그들이 굳이 모두가 피하고자 하는 야간 검문을 자원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에 분노가 극에 달한 칼로스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기세로 탁자를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가 장내를 울렸지만, 칼로스의 행동에 불만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이 자리에서 그가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가주들은 그저 타들어 가고 있을 그의 속을 짐작하며 근심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칼로스는 한겨울 마른 가지처럼 뻣뻣이 굳어 버린 손을 움켜쥐었다. 그 안에 든 피 묻은 장식이 그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혹시 몰라 뒤늦게 제도의 출입을 통제하고, 사람을 풀어 인근 지역까지 수색하게 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칼로스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버논을 응시했다.

그는 일분일초라도 빨리 아네타의 행방에 대해 듣고 싶었다.

“행방에 대해 알아낸 것은 없나?”

그런 아우의 마음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듯 러셀이 물었다.

“에레즈 바우터가 찾아간 길드에서 디안타 인근의 산속에 있는 버려진 별장을 소개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수상한 마차의 행적이 끊긴 곳도 별장 부근이라고 하니 분명 그곳으로 갔을 겁니다.”

제 딴에는 은밀하게 움직였겠지만, 에레즈는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바로 무거운 돈주머니 앞에서 한없이 가벼워지는 길드장의 입이었다.

버논은 이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막대한 액수의 돈을 쏟아붓는 척했다. 그러자 길드장은 자신이 민가와 먼 장소를 알아봐 주는 것은 물론 떠돌이 용병들과 연결해 주었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버논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무언가 더 있을 거라는 판단에, 대동했던 기사들을 시켜 길드장을 제압한 버논은 장부를 뒤지다 또 다른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러셀이 굳이 버논을 보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이런 쪽의 감이 좋았다.

“또, 그 길드는 에레즈 바우터에게 ‘미노시’라는 이름의 독을 구해다 주었다고 합니다.”

“미노시라면 분명…….”

그 이름은 칼로스도 들어본 적 있는 것이었다. 미노시라 불리는 독초를 몇 배로 농축하여 만든 동명의 독은 처음엔 가벼운 고통이 찾아오지만, 그 강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세진다.

차라리 극독을 먹고 즉사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서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내장을 녹여 버리는 그것은 암살보다는 주로 고문에 이용되는 독이었다.

그 지독한 독이 누구에게 쓰일지는 뻔했다. 칼로스는 아네타의 행방에 이어 미노시까지 언급되자, 더는 출발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버논, 해독제. 해독제는 가지고 왔겠지?”

“내가 그 정도 머리도 없을까 봐? 여기, 이거야.”

버논은 당연하다는 듯 등 뒤로 메고 있던 가방에서 갈색의 작은 병 하나를 꺼내 건네었다.

그것을 받아 깨지지 않게 품 안에 잘 갈무리한 칼로스는 급히 고개를 돌려 상석을 응시했다.

“더는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폐하. 제가 먼저 디안타로 향하겠습니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인내할 만큼 인내했다. 칼로스는 이제 러셀이 막아선다 해도 아네타를 구하기 위해 떠날 작정이었다.

“허락한다. 선발대는 발티모어 공작에게 맡기도록 하지. 그리고 로펠락 후작, 그대도 지금 당장 휘하의 기사들을 이끌고 후발대로 출발하도록. 최대한 빨리 따라붙어.”

“존명.”

다행히 러셀은 칼로스가 먼저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제 이름이 호명될 것을 짐작하고 있던 테르사가 관통을 챙겨 들었다.

전투가 아닌 일에 전장의 영웅인 그녀가 나서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테르사는 항의는커녕 자신이 나서는 게 당연하다는 듯 희번덕 눈을 빛냈다.

반드시 아네타와 두 사람을 무사히 데리고 돌아와야 한다는 공통된 목적을 가진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맞추다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로스는 문을 통해 걸어 나가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황제가 보는 앞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창문턱을 밟고 올라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무운을 빌지.”

화답하듯 들려오는 러셀의 목소리와 함께 칼로스는 검은 독수리로 모습을 바꾼 뒤 단번에 날아올랐다.

“그럼 저도 이만 기사들을 소집하러 가겠습니다.”

한시를 다투는 상황이니 조금이라도 빨리 무장을 끝내고 출발해야 한다. 칼로스가 급하게 디안타로 출발하자, 후발대를 맡은 테르사 역시 자리를 뜨려 했다.

“폐하, 저도 후발대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

그때, 무언가를 고민하던 버논이 앞으로 나섰다. 자신이 따라가 봤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동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진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신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피로가 여실히 묻어나는 얼굴이었지만, 러셀은 버논을 만류하고 나설 생각은 없었다.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니 말린다고 해서 순순히 응할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러셀은 테르사에게로 눈을 돌렸다.

“로펠락 후작. 나는 후작에게 후발대의 지휘권을 넘겼다. 그러니 그대의 의사를 묻고 싶군.”

“저는 괜찮습니다. 백작의 말마따나 방해가 될 것 같지도 않고요.”

테르사는 다행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속도를 높이기 위해 마차 없이 이동할 계획이니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라고 못 박았다.

그럼에도 버논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결국 동행 허락을 받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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